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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헷 Apr 17. 2020

암 판정 받은 날 - 인생의 전환점

다시는 나를 소외시키지 않겠다는 서른의 다짐


산부인과 담당교수님 표정이 좋지 않다. 내 앞 차례로 들어갔던 산모와 어린아이에게는 복도까지 들릴 정도로 밝은 목소리로 환대해주셨던 분이다. 어쩌면 그때부터 긴장을 해야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OO씨, 암이에요."


 그 말을 꺼내시던 순간 교수님 미간에 드리워졌던 측은함과 단호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예후와 치료 방법에 대한 설명이 장황하게 이어졌지만, 난데없이 찾아온 이 단순한 사실 하나 -내가 암이라는-를 소화시키는데 모든 신경이 소모되고 있어 다른 정보는 소화할 수가 없었다.


"녹음을 좀 해도 될까요?"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에서 녹음앱을 찾아 켰다. 처연했다. 누가 옆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이성을 바짝 곤두세우진 않아도 되었을까. 아냐, 누가 있었다면 그 사람 충격받을 걱정 정작 내 감정은 돌보지 못했을 나였다. 혼자라서 다행이야. 아직 나밖에 몰라서 다행이야. 내가 다 컨트롤 할 수 있어. 처절하게 정신줄을 가다듬었다.

 

 상담이 끝나고 추가 검사를 위해 대기하면서 엄습하는 불안감을 느꼈다. 누군가 내 눈을 봤다면 길 잃은 양의 눈빛과 비슷한 무엇을 보았으리라. 머리는 멍해지고, 가슴은 두근거렸다. 풍선이 터지기 전에 바람구멍을 내는 것 같은 마음으로, 나에게 계속 병원을 가보라고 재촉했던 친구에게 카톡 하나를 보냈다.


- 나 암이래


  이내 전화가 걸려왔다. 울어야 되는데 울지 못하고 있을때마다 수도꼭지를 열어주곤 했던 친구다. 서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무장해제가 되는 기특한 관계. 친구 목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눈물이 터져 나왔다. 눈물 콧물을 그야말로 질질 짜면서 그 큰 병원에서 혼자 감당해야했던 서러움, 긴장감, 불안함을 흘려보냈다.




 눈물 속에서 드러난 하나의 명확한 감정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5년간의 열애, 이별, 그리고 투잡...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나는 마음이 아플때마다 일에 몸을 혹사시키는 방법으로 아픔을 잊으려했다. 몸이 녹초가 되서 잠자리에 들때마다 '나는 성장하고 있고, 이별을 건강하게 극복하고 있는거'라고 격려했다. 그게 나한테서 나를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지독하게 소외시키고 있다는 걸 그때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아마 검사결과가 암이 아니라 호르몬 불균형이라던지, 양성 종양 같은거였으면 나는 또 나를 압박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내몰았을거다. 내가 그렇게 소외시켰던, 내가 '감히' 소외시켰던 내 자신에게 너무 미안했다.


 검사가 끝나고 약속대로 아는 동생과 점심을 먹으러 갔다. 어젯밤 함께 술을 퍼마셨던 친구다. 몸속에 암이 자라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리 신나게 퍼마셨다며 서로를 자조하고 쌀국수로 해장을 했다. 쌀국수는 또 왜그렇게 맛있는지, 몸속에 암이 자라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빼고 세상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다만, 나의 세상은 달라졌다.

 

 나는 다시는 나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 감정, 내 생각, 내 욕구로부터 나를 소외시키기엔 내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았는지 알수 없는게 인생이다. 구지 암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앞서거나 뒤서거나 할 수 있는게 인생이다. 우리 모두 알고는 있지만 체감은 못하는데, 암이 '그거 진짜야'라고 나한테 쐐기를 박아준거나 다름 없었다.


 그래 쐐기가 박혀버렸다. 암 진단을 받은 뒤로 나는 항상 나에게 '유한'한 시간이 있음을 상기한다.

 이게 마치 꼬리표처럼 어떤 결정을 내려야할때마다 나를 따라다니는데, 난 또 그게 무척 좋다. (읭?) 그걸 알지 못했더라면 내렸을 수많은 어리석은 결정들을 한방에 쓰레기통에 갖다버려준다. 그걸 알지 못했더라면 보았을 수많은 눈치들과 신경썼을 수많은 시선들도 내 인생에 1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항상 상기시킨다.


 암은 정말 반갑지 않은 손님이지만, 동시에 정말 소중한 것이 뭔지 분별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해줬다. 적당히 충격적이지 않고서야 말을 들어쳐먹질 않는 나를 위해 우주가 너무 강력한 펀치를 날린 것 같은 기분은 들지만, 실은 나는 요즘 사는게 꽤 만족스럽다.

 암에 걸리기 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조금 더 좋다.


 암에 걸리고 깨닫게 된 소중한 존재들, 순간들, 경험들이 정말 많다. 삶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반짝이는지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다. 특히 나처럼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살고 있는 사람들, 마음 속으로 울고 있는 그 가련한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가 가닿았으면 하고 바란다.



Photo by Anders Jildé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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