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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헷 May 04. 2020

'어쩌면 죽음'이라는 가능성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게 만드는.


 마케팅으로 커리어를 전환한지 3년 만에 나에게도 그럴듯한 기회가 찾아온 듯 싶었다. 믿고 따라갈만한 멋진 대표님들을 만났고 7개월의 사투 끝에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었다. 회사에는 전문 잡지에 실릴 멋진 프로젝트들이 대기중이었고 내겐, 조만간 서울로 옮겨 착실하게 커리어를 쌓는 일만 남은 것 같았다.


 그런데 암이라뇨.


 한 집 건너 한 집이 암환자라지만 나는 예외일 거라 생각했다. 그것도 나이 서른에는.

 암 판정을 받은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생존율을 검색해보는 거였다. 다행히 자궁내막암은 완치율이 높은 질환이었다. 단, 자궁을 절제한다는 조건 하에서 말이다.


 꽤 오랜기간 내게 꿈이라고 불릴만한게 있었다면 '엄마'가 되는 일이었다. 서른에 접어들고 육아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간접체험하면서 살짝 내려놓은(?) 꿈이긴 했지만 '자궁절제'라는 말을 들었을 때 동공이 흔들렸던 이유는 아마 '생물학적 엄마로서의 가능성'이 박탈되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을 거다.


혹, 평생 자궁을 쓸 일이 없다고 해도 내 몸의 장기를 도려내는 것은 꺼려졌다. 자궁을 보존하는 치료법이 궁해지자 내 관심사는 자연스레 자연치료로 향했다.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헤아려가며 자연치료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급진적인 식습관이나 생활습관의 변화로 암이 자연치료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희망을 발견할 수는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나는 자연치료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연치료를 선택하고 가장 먼저 마주해야했던 것은 '어쩌면 죽음'이라는 가능성이었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는게 중요하지만, 때로는 최악의 상황을 산정해보는게 마음 편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래, 죽을 수 있다. 세포가 비정상분열을 계속해대는 암이라는 질병을 갖고 있는 이상 그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다. 완치판정을 받고 난 다음에도 말이다. 그 가능성 때문에, 나는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아니, 내려놓을 수 있었다.


 먼저 일을 내려놓았다. 전에는 가장 억척스럽게 부여잡던 것이었는데, 암인걸 알자마자 그렇게 내려놓기 쉬웠던 것도 없었다. 덕분에 내가 일을 그렇게 사랑하는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괜한 스트레스를 주는 인간관계도 내려놓았다. 겉으로 드러나게 정리한 건 없지만 내키지 않는 관계는 그냥 마음속에서 떠나보냈다.


 그렇게 나 자신을 돌보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하나씩 정리해갔다. 비우면 채워지는 게 진리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가능성은 많은 가능성을 내려놓게 했지만, 또 다른 많은 가능성을 열어 보여주었다. 내가 얻은 가장 큰 가능성은 누구나 좋아하는 일을 시작해도 된다는 것이다.



 나는 어릴적부터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는데 예민했다.  뭔가 '괜찮은' 일을 '제대로' 해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늘 있었다. 해야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전자가 늘 우선이었고, 그건 대체로 나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눈치나 체면' 때문일 때가 많았다. 그런데 암이, '어쩌면 죽음'이라는 가능성이 삶이라는 시간의 유한함을 깨닫게 해주었다.


 누구나 '내가 내일 죽는다면 당장 무얼 할까?', '내게 한달이라는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면?' 같은 상상을 한다. 나도 수 없이 했더랬다. 그러나 행동에는 옮기지 않았던 그 버킷리스트들을 당장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덜컥 생겨버린 것이다.


 덕분에 전에는 차마 꿈이라고 할 수 없었던 것들을, 이제는 '해보고 싶다'고 떠들고 다닌다. 그 중 몇 가지는 시도조차 못해볼 수 있겠지만, 그렇게 떠들어대는 중에 또 다른 가능성을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이 유한하다는 진리 앞에 '좋아하는 일을 해도 될까?'라는 질문은 흔적도 없이 녹아내린다. 진짜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고민할 시간을 가능한 더 행복한 순간으로 채우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보다 시도조차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진다. 그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하다보면 남은 여생을 채우고 싶은 일을 더 빨리 찾게 될지도.


 암에 걸린 뒤 나는 이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중이다. 덕분에 얼마나 자주 행복감을 느끼는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나는 이 시간들이 30년 인생에서 일어난 꽤 멋진 이벤트라고 여긴다.


이게 모두 '어쩌면 죽음이라는 가능성' 덕분이었다.


사실 이 가능성은 당신에게도 열려있다. 그 사실을 정말 아프기 전에 깨닫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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