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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헷 Nov 11. 2022

고통 속에서

어제부턴가, 엊그제인가

통증 때문에 잠을 설치고 있다.

이 통증은 생리통처럼 어디가 아프다고 콕 찝어 말할 수는 없이

아랫배 전체에서 여기저기 벼락을 치거나 묵직한 무게감으로 존재감을 과시한다.


통증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괜히 주변 사람들에게 불똥이 튀기 마련.

가족들은 슬쩍슬쩍 내 눈치를 살핀다.

통증에 속아넘어가는 것도 한두번이지.

나의 통증은 오롯이 내 과제라는 것을

이제는 통증 속에서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숲을 걷다가 통증이 밀려오자 말수가 적어진 나에게

엄마는 괜히 유쾌한 제스처를 보내며 내 기분을 환기시켜보려 한다.

죄송하고 감사하다.

"엄마 나 신경쓰지 말고 엄마의 순간에 집중해. 나도 그러고 있으니까."

이런 말이 엄마 마음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여줄까?

자식이 없는 나는 알턱이 없다.


일단 한번 통증이 밀려들어오면 드는 감정은 당혹감이다.

통증의 의미를 묻는다.

'나아가는 신호인가, 악화되는 신호인가.'

별달리 답이 없으니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본다.


본디 통증이란 무얼까.


문득 나에게 이 통증이 합당하지 않은 거라는,

무언가 무척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엉뚱하지만, 믿을만한 내면의 소리가 들린다.


나는 사랑으로 지어진 존재이고,

사랑받아 마땅하다.

생명의 열정과 기쁨을 누릴 자격이 '없는' 생명체는 없다.

나를 창조한 그 어떤 힘도 내가 질병으로 고통받고,

그로 인해 삶의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런데 나는 왜 아플까?

무엇으로 인해 아플까?

이 아픔은, 적어도 지금 내게는 '실존'한다.

나는 이 실존하는 고통을 나는 부정해야할까, 수용해야할까?


정답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고통속에서라야 내가 드디어 나와 연결된다는 거다.

오로지 내 몸에만 집중하는 시간 속에서 나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묻고 답했다.

고통에 몸부림 치는 시간 속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잠을 설치고 있을 여러 존재들과 만났다.

내 이해는 확장되고, 연민은 깊어지고, 사랑은 뚜렷해졌다.


고통이 그런거라면, 그렇게 밀어낼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친구와 계속 동행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이 지구상에서 오다가다 만나는 수많은 인연 중 하나처럼  

정성으로 모시고 정성으로 배웅해주고 싶다.


조카 소이가 그린 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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