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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헷 Mar 18. 2022

자기연민이 사라졌다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자기연민에 빠져있는 사람은 자기가 자신을 연민하고 있다는 걸 잘 모른다. 나는 그랬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나 들이닥친 불행이 버거울 때면

'하... 나는 왜..'

'다 지긋지긋해...'

등의 깊은 한숨을 속으로 푹푹 내쉬곤 했지만 그게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내게 자기연민에 빠져있었다는 걸 깨달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자기연민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뒤였다.




#1

 릴적부터 나는,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면 항상  무거운 판자가 나를 짓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판자를 제끼고 빠져나가든지, 짊어진 채로 살아야 하는데 가녀린(?) 두팔로 그걸 들어올는 건 너무 힘겨울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판자를 진채로 살아가기로 했다. 어차피 남들에겐 보이지도 않는 판자니까. 판자는 어딜가도 나를 따라다녔고, 종종 판자를 잊고 산 적도 많지만 삶이 주는 난관에 봉착할 때면 항상 판자가 인사를 건넸다.

"나 잊고 살았어?"




#2

암진단을 받고 어쩌면 나는 더 우울해졌고, 더 심한 한계감을 느꼈을 수 있지만 늘 판자를 지고 살아왔다는 측면에서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판자를 두개 지고 가나, 열개 지고 가나 힘겨운 건 매한가지니까.




#3

암이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는 걸 몸으로 체감하고 난 뒤에야 정신이 번쩍들어 살길을 도모했다. 운좋게 자연치유의 선구자를 만나 병원치료에만 의존하지 않고, 육체적-정서적-정신적-영적으로 치유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시간을 가졌다. 정말 고맙게도 몸이 반응해줬고, 어느정도 정상 컨디션을 찾아가는 중이다.


선구자는 늘 말한다. "암을 죽을병, 나는 암환자, 그래서 나는 죽는다." 이 죽음의 삼단 논법에서 빠져나오는게 첫번째 할일이라고. 그런 생각 아래에선 그 어떤 치유법도 듣지 않는다고.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그게 얼마나 완벽하게 설계된들 사령관인 우리의 생각(관념)을 단 1인치도 넘지 못한다고 말이다.




#4

나의 삼단 논법은 좀 달랐다.

'나는 나약한 인간, 암은 어려운 병, 그러니 나는 암을 이기지 못할거야'가 나의 삼단 논법이었다.

내 세포들이 본래 지닌 완벽한 치유력을 발휘하게 하기위해 '나 나약한 인간, 나는 의지박약'이라는 관념을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여기서 세포기억을 지운다는 힐링코드라는 기도? 명상법?이 큰 도움이 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세포기억이 흐릿해져 갔다.




#5

평소 답지 않게 병원 로비에 한가롭게 앉아있던 어느날이었다. 문득 무언가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살면서 처음 느끼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마치 내가 굉장히 불쌍히 여기던 강아지가 있는데 강아지가 사라진 기분, 그래서 걱정되는게 아니라 원래 그 강아지 자체가 불쌍한 애가 아니었는데 내가 혼자 불쌍히 여기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기분, 그러니까 걱정거리가 없어진 개운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어느날 문득 갑자기 자기연민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는 아직 암환자고, 앞길은 캄캄하고, 몸 걱정 뿐 아니라 먹고살길도 걱정이고, 넘어야 할 산이 태산인데 아무리 스스로를 요리조리 살펴봐도 내가 불쌍한 지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동안 나를 불쌍하게만 바라봐 온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티가 난다고 우울감, 자기연민이 사라지자 그게 얼마나 나를 많이 차지하고 있는 구성요소였는지 알았다. 가벼운 느낌과 동시에 자아감이 상실된 것  같은 허전함까지 느기 때문이. 그때 알았다. 내가 얼마나 심한 자기연민에 빠져 살아왔는지.




#6

자기연민이 사라짐과 동시에, 평생 나를 따라다닌 판자의 존재도 사라져버렸다. 판자는 스스로 설정한 일종의 자기한계였다. 내가 판자를 넘어서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관념이 사라짐과 동시에 스스로를 향한 동정심도, 한계감도 모두 자취를 감췄다.


자기연민이 사라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건 그저 멀쩡하고 완전하며 그 어떤 한계도 느껴지지 않는 귀한 생명 그 자체였다.



나는 어쩌면 암을 이기는 법을 배우면서, 항상 나를 짓눌렀던 자기한계를 벗는 법을 배운 것이다. 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깨달음을 배울수 있었을까?


 아마 그랬을거다.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배워야 할 것을 가르쳐주었을테니. 그러니 꼭 암에 걸려야만 이런 경험을 할수 있는 게 아니다. 삶에 찾아오는 모든 고난과 시련을 극진히 모셔야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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