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번째 지난주
피(血)에도 없고, 뼈(骨)에도 없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이 있다. 이를 프랑스 사회학자인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0)는 ‘아비투스(habitus)’라 명했다. 그에 의하면, ‘아비투스’란 사회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개인이 획득하는 영구적인 하나의 성향 체계이다. 따라서 그것은 타고난 천성과 기질과는 구분되며, 한 개인이 탄생한 이후 문화적인 취향과 소비의 근간과 같은 일종의 '성향'을 의미한다. 故 남경태 선생은 그의 저서 <개념어 사전>에서 ‘아비투스’를 설명하면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는 아버지와 뽕짝을 듣는 아버지의 경우를 예로 든다. 두 가정의 자녀들이 각기 다른 성향을 지니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또한 무의식적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부모세대가 직접 유전자에 낙인찍지 않은 성향까지도 닮은 채로 살아간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상속되어, 불가피한 아버지의 이름으로 우리를 살게 한다. 지난주, 세 사람의 아버지가 각자의 자녀에게 전한 ‘아비투스’가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¹ ² ³
첫 번째 아버지는 이름난 사람이다. 그는 사망하였으나, 여전히 가장 논쟁적인 지점에 있다. 이 아버지는 두 번째 아내와의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같은 모국어를 공유하는 사회 속의 일반 가족 집단과는 워낙 다른 삶의 얼개를 지녔으므로, 이 가정에서 아버지로부터 딸에게 전해졌을 ‘아비투스’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아버지가 대통령인 집안의 국가에 대한 특별했을 애착을 짐작한다. 특히 아버지가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온전히 자기 자신과 국가를 동일 시 하는 국정운영을 펼쳤으므로, 이와 같은 기이한 국가관이 장녀에게 온전히 이입되었을 것을 상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더욱이 장녀가 어머니를 잃은 이후 어린 나이부터 퍼스트레이디 직을 이행한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유일한 기댈 곳인 아버지에 대한 효심으로 더 강하게 전이하고, 이것이 더욱더 협소한 국가관을 공고히 했으리라 점쳐본다. 결국, 한국적이라 불리는 장녀의 효심에 더해, 매우 특수한 사건과 국가 그 자체로 인지되는 아버지의 존재가 첫 번째 가정의 ‘아비투스’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이 특수한 ‘아비투스’는 장녀가 정치인으로 성장하면서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결국 단순한 ‘아비투스’를 넘어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아가게 하는 작용을 일으켰다. 결국, 그녀도 그토록 바라던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는 그녀의 아버지가 총탄에 서거한 지 33년 만의 일이었다.
두 번째 아버지는 기이한 인물이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승려이자 목사였고, 7개의 이름을 가졌으며, 총 6명의 아내를 두었다고 전해진다. 1994년에 숨을 거두었으며, 그때가 그의 나이 83세였다. 그는 첫 번째 가정의 어머니가 숨을 거둔 때부터, 첫 번째 가정과 관계를 맺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4년의 일이다. 이후의 행적은 이 아버지와 첫 번째 가정의 장녀가 각각 모 봉사단체에 총재와 명예총재로 함께 임명되어 활동했다는 정도이다. 그 이외의 것은 소위 ‘카더라’와 엮어 있는 것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는 적절하지 않다. 다만, 주지할 것은 첫 번째 가정과 마찬가지로 매우 흔치 않은 가정의 모습이었다는 점과, 이에 따른 특수한 ‘아비투스’가 자녀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자녀 중 5녀로 알려진 딸의 이름이 근래 다시 오르내리는 것이 이 ‘아비투스’와 전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예측이 그것이다.
알려진 바에 한해서만 예측의 범위를 한정하자면, 어떠한 방식으로 건 고위 권력층과 관계를 맺어온 아버지의 활동력이라는 특수한 ‘아비투스’가 3남 6녀의 자녀 중 가장 강하게 이입된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며, 그것이 5녀가 아니었겠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젊은 시절부터 첫 번째 집안의 장녀와 두 번째 집안의 5녀가 가까운 사이로 지내왔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들 간에 특수한 양가의 ‘아비투스’에 대한 상호 이해도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아비투스’의 본뜻이 그러하듯, 무의식적인 차원이었을 것이며, 강력한 부권(父權)에 기대어 있는 처지에의 동질감으로 이어지며, 더욱 공고해졌으리라 보인다. 이후 매우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 관계가 유지되었음을 추정하게 하는 최근의 사건에 대한 전언은 아직 어떤 단계에 있다는 판단으로 언급하지 않도록 한다. ⁴ ⁵
마지막으로, 세 번째 아버지는 지난주에 숨을 거두었다. 향년 69세의 일이었다. 그는 ‘농민’이자, ‘노인’으로 2016년의 한국사회에서 가장 외진 곳으로 밀려난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대열의 가장 앞선 곳에 서 있으려 했고, 시위 도중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고 외진 곳으로부터 영영 작별을 고했다. 발단은 첫 번째 가정의 장녀가 대통령이 되며 약속한 쌀값 수매가에 관한 것으로 말미암는다. 대통령이 되기 위한 후보 시절, 그녀는 17만 원인 수매가를 21만 원까지 올리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도리어 쌀값은 10만 원을 조금 웃도는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농민들은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폴리스라인을 넘어섰다는 이유로 물대포는 그의 머리를 향해 내리 꽂혔다. 그는 쓰러졌고, 그로부터 317일이 지난 후 그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⁶
기실 악연은 더 오래된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 번째 집안의 아버지는 1968년 중앙대 법대에 입학하였으나, 1971년 10월 위수령 사태에 반발해 시위를 벌이다 제적됐다. 그는 그 후 복교했으나 1975년 첫 번째 아버지의 유신정권에 맞서 전국대학생연맹에 가입해 활동하다 2차 제적을 당했다. 다시 10·26 사태로 복교하였으나, 이듬해 신군부의 기습적 계엄 확대로 기숙사에서 계엄군에게 체포됐다. 결국, 7월 말 중앙대는 또다시 그에게 퇴학 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그는 고향인 보성군 웅치면으로 내려가 농군이 됐다. 이후에도 가톨릭농민회에서 농민운동을 하고 1992년 전국 부회장도 지냈다. 그가 부회장을 맡았을 때, 기존의 생존권 투쟁 대신 평화·생명·공동체 운동을 이끌었다. 그와 오래 지내온 동료들이 그를 두고 ‘생명의 농민’이라 부르는 이유다. ⁷
신념의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은 배제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가 늘 ‘앞에 있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이 같은 자신의 신념을 자녀들에게도 물려주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도라지, 두산, 민주화와 같은 자녀들의 이름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이는 무의식적인 차원이 아니기에 ‘아비투스’로 규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으나, 아버지의 강한 신념이 자녀들에게 ‘아비투스’로써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자녀 간 아버지의 신념을 공유하는 정도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같이 강인한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두 번째 집안과 마찬가지로 이 세 번째 아버지 역시, 첫 번째 집안과 질긴 인연을 이어왔으나, 두 번째 집안과 같은 그 어떤 공유나 교류의 지점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사망에 대해 2016년 10월 2일 현재까지,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고 있다.
지난주 세 아버지의 자녀들이 만났다. 물론 물리적인 시공간을 함께한 만남은 아니었다. 적어도 -한정된 몇몇의- 뉴스 지면상에는 이들이 모두 등장했다. 특히 지난주, 세 번째 아버지가 사망에 이르자, 이 세 자녀는 모두 부친을 잃었다는 공통의 아픔을 지니게 되었다. 또 하나 공유하게 된 사실은 그럼에도 남아 있는 아버지의 이름이다. 그것이 전임 대통령의 그것이건, 행적이 묘연한 자의 그것이건, 농민의 그것이건, 그 자녀들은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 모양새는 다르다. 앞선 두 집안은 아버지의 이름자를 타고 간다면, 세 번째는 아버지의 이름을 이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아비투스’로 돌아간다. 앞선 두 집안의 ‘아비투스’는 ‘현대사’라는 시간 속에서 벌어진, ‘전근대적인’ 이 나라의 기이한 장면 속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총을 앞세워 나라를 통치하고, 이에 빌붙어 권세를 누린, 어느 것 하나 상식적이지 않은 집안의 기운은 특수한 ‘아비투스’를 형성했다. 그러자 그의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올라탔고, 제 삶에 불리할 것이 없었던 주어진 것을 마음껏 누렸다. 반면, 세 번째 집안의 ‘아비투스’는 이에 대한 반발로써 이루어졌다. 한 사회의 거대한 부조리에 대한 항거가 일부 아버지들만의 몫이 되자, 그 무거운 신념의 ‘아비투스’가 온전히 몇몇 자녀들에게로 향한 것이다. 여기에 비극적인 죽음으로 세 번째 아버지가 사망하였기에, 이에 대한 무거운 마음을 가눌 길 없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세계라지만, 시간만은 앞으로 나아간다. 이제 기이한 시절의 아버지들을 모두 떨쳐버리고, 상처받은 자녀들을 함께 보듬고 위로하며, 다시는 몇몇의 사람들과 그 가정에 책임의 무게를 전가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백남기’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으로 그 무게를 나눌 수 있기를, 덧붙여 바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참고
¹
- 문학비평용어사전, 한국문학평론가협회, 국학자료원, 2006
- terms.naver.com/entry.nhn?docId=1530461&cid=41799&categoryId=41800
²
- 위키백과 중 “아비투스 (사회학)”
- ko.wikipedia.org/wiki/아비투스_(사회학)
³
- 남경태, 『개념어 사전』, 들녘, 2006, p.251-254
⁴
- 한겨레, 2012년 7월 17일 자, “이름 7개, 부인 6명, 승려 목사 ‘최태민 미스터리’”
- 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42931.html
⁵
- 뉴스타파, 심인보 기자, 2016년 9월 29일 자, “최순실+박근혜 ‘40년 우정’ 동영상 발굴”
- newstapa.org/35182
⁶
-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백승호 음반기획사 '퀴들사운드' 대표, 2016년 9월 25일 자, “니들이 죽였다”
- huffingtonpost.kr/seungho-baek/story_b_12178338.html
⁷
- 뷰스앤뷰스, 최병성 기자, 2015년 11월 21 자, “3번 제적, 투옥, 농민운동... 누구보다 치열했던 백남기 씨 삶”
- viewsnnews.com/article?q=126007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및 *****
- 연합뉴스, 김현태 기자, 2016년 9월 25일 자, “시위 중 물대포 맞아 혼수상태 백남기 농민 사망”
- yonhapnews.co.kr/photos/1990000000.html?cid=PYH20160925345100013&from=search
*
- 중앙 선데이, 2013년 2월 17일 자, “대통령 딸로 4회, 퍼스트레이디로 1회, 의원으로 2회, 부시 축하사절로 1회”
- mediaspider.joins.com/?art_id=A13081247765
**
- 한겨레, 2012년 7월 17일 자, “이름 7개, 부인 6명, 승려 목사 ‘최태민 미스터리’”
- 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42931.html
***
- 뉴스타파, 심인보 기자, 2016년 9월 29일 자, “최순실+박근혜 ‘40년 우정’ 동영상 발굴”
- newstapa.org/35182
****
- 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2016년 9월 29일 자, “시신 부검, 반대합니다.”
- yonhapnews.co.kr/photos/1990000000.html?cid=PYH20160929138300013&from=se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