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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Feb 12. 2017

책임을 묻는 책임 _ 영화 <재심> 리뷰

마흔아홉 번째 지난주




이야기와 책임


 일상은 소중하다. 단지 ‘살아지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시간들이 우리를 꾸준히 단련시키는 탓이다. 그런데 이토록 존귀한 일상이라는 시간은 그 변화의 폭이 작다. 일상성의 권태로움이 흔히 다람쥐 쳇바퀴로 비유되며, 일찍부터 힐난의 대상이 되었음을 상기한다. 반면, 흔히 ‘사건’이라 불릴만한 짧지만 강렬한 순간들은 크나큰 에너지의 전환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는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모을만한, 소위 ‘이야기감’이 되는 사건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이를 가장 대중적인 매체로 옮겨 담을 때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지난주, 개봉을 앞둔 한 편의 영화가 ‘영화감이 되는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길 때의 책임감’에 관한 질문을 던져왔다.



※ 마흔아홉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에서는 영화 <재심>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이 부분 이후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원치 않는 분들은 읽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개봉 전인 작품을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영화의 사명과 영화 <재심>


 영화 <재심>은 2000년 8월 전북 익산의 약촌오거리에서 벌어진 실재 사건을 배경으로, 무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한 사람과 이를 돕는 변호사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렇다. 그리고는 있다. 그리고는 있으나, 조명하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재심>은 안전한 영화다. 시종일관 안전하게 전개된다. 초반 다소 그 호흡이 짧다는 특징만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과 상업영화의 문법이라는 틀 속에서 안전하게 머무른다. 이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대상으로 삼는 존재와 사건을 돌이켜보자면, 그리 간단하게 넘길 수 있는 사안만은 아니다.


 <재심>이 비추는 현우(강하늘 분)는 억울한 일을 당한 당사자이다. 그래서 그의 분노는 자연스럽다. 더욱이 어려운 가정 형편에, 어머니의 건강마저 악화되었다. 그러니 좌절 또한, 자연스럽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 이상으로 현우의 내면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않는다. 기껏 ‘차인표를 닮았다’라는 말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 이전과 이후를 끼워 맞추는 정도이다. 영화는 차라리 변호사 이준영(정우 분)에 주목하기로 한다. 실제 사건의 주인공으로 ‘재심 전문 변호사’라는 별명까지 붙은 박준영 변호사의 경우는 다소 덜 극적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을까? 영화는 준영에게도 나름의 역전 스토리를 부여하며, 영화의 장치로 삼는다. 이 과정에서 준영의 가족 간 불화나, 친구인 창환(이동휘 분)과의 관계는 정작 이 영화에서 가장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대상인 현우를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는다. 그런데 사건의 중심축은 현우가 당한 누명과 옥살이이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재심’을 향한 노력이다. 그러다 보니, 감정과 전개가 어그러지며 시선은 둘 곳을 잃게 되었다. 좀 더 감상을 이어가 보자.


* 영화 <재심> 스틸컷


 비리 형사는 열심히 때린다. 그러다가 검사에게 무릎을 까이기도 한다. 거기에다 현우의 모친은 눈마저 멀어버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준영의 친구와 검사가 한 통속이었다. 인물만이 아니다. 폐허가 된 모텔은 로펌의 화려함과 대비를 이루고, 현우의 그림 하나로 결정적인 증인이 마음을 바꾼다. 언뜻 떠오르는 이상의 극적인 전개 장치들은 결국 결말과의 큰 대비를 통해, 더 높은 카타르시스를 부여할 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소위 ‘상업영화 다움’을 실천하기 위해 실화로부터 조금, 혹은 많이 멀어진 채로 만들어진 극적인 상황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영화에도 사명이 있다면? 세상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김에 있어, 잘 만들고 못 만든 차원을 떠나 하나의 사건 자체를 소비하게 되는 것이라면?





이 땅의 '현우들'을 위하여 


 마침 영화 감상 후 리뷰를 작성하고 있는 이 시간에 또 하나의 재심사건 기사¹를 접하게 되었다. 2000년 3월, 자신을 성추행한 아버지에게 수면제가 든 술을 마시게 하고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기소돼, 2001년 3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은 김신혜 씨에 관한 기사이다. 김 씨는 당시 범행을 자백했지만,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며 "동생이 아버지를 죽인 것 같다"는 고모부의 말에, 자신이 동생을 대신해 감옥에 가겠다고 거짓 자백을 했다며 무죄를 호소한 바 있다. 이 기사의 마지막 두 문장은 기사문의 불가피한 건조한 문체조차, 이토록 가슴을 갑갑하게 만들 수 있음을 상기하게 한다.


검찰은 항고가 기각되더라도 대법원에 재항고할 수 있다. 이 경우 대법원에서 재심 개시를 확정해야만 재심이 성사된다. 재심 개시 결정에 대한 항고·재항고, 재심 재판, 그에 대한 항소·상고까지 가게 되면 김 씨의 무죄 주장 진실 규명 작업은 수년이 더 걸릴 수도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본다. 재심에 이르는 험난한 과정이 영화 <재심>에서는 브로맨스가 강해지거나 약해지는 난관의 주기로 그려진다. 하지만 위 기사에서 보듯, 이 땅의 ‘현우들’이 실제로 부딪히는 장벽은 담당 변호사와의 오해가 아닌, 험난하리만치 까다로운 ‘재심’으로 가는 절차에 있다. 그리고 극 중의 현우나 김신혜 씨와 같이 10년,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들은 출소하더라도 중한 죄를 저지른 범죄자라는 낙인을 찍고, 죽음과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설령 ‘재심’이 열려 누명을 벗게 되더라도, 잃어버린 시간은 보상받을 수 없다. 이것이 ‘형사 보상금’이라는 명목상의 위로로 온전히 상쇄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 영화 <재심> 스틸컷


 뉴스가 못 하는 것을 영화는 할 수 있다. ‘형사 보상금’ 따위로 보상될 수 없는 파괴된 내면과 시간의 피폐함을 얼마든지 더 보여줄 수 있었다. 그저 브로맨스를 비추고, 악랄한 형사와 몸싸움을 벌이며, 검사와 변호사 간의 어두운 뒷거래를 들추는 것으로 이 땅의 ‘현우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까? 한 인간이 사회의 거대한 부조리 앞에 홀로 무너져 있을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한 일련의 시도가 굳이 이처럼 극적인 장치들을 필요로 하는지를 묻는다. 이 나라에서 잘못된 판결을 뒤집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 과정에서 인간 내면이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 그토록 힘든 일을 돕는 변호사의 인간적 고뇌는 안녕하기만 한 지…. 영화 <재심>은 이와 같은 질문들을 극적인 전개 장치 아래로 묻어버린다. 10년 동안 죄 없는 사람이 감옥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극적이다. <재심>의 욕심이 아쉽다.









책임을 묻는 책임


 영화관을 나서 광장으로 나가보자. 광장의 구호는 다양하다. 하지만, 해결을 촉구하는 문제의식의 기저에 흐르는 본질은 하나다. 


“잘못을 했으면, 책임을 져라!” 


 하지만 좀처럼 책임은 요원하고, 우리는 15주째 광장에 서고 있다. 책임 없음이 그 얼마나 사회에 큰 해악인지를 절감하는 시절인 것이다. 이 와중에 한 사회의 가장 준엄한 결정을 내리는 집단이 그 과오에 책임을 진다는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그 영화는 세상에 몇 되지 않는 이야기를 영화화하겠노라 선택함으로써, 제작 자체에 대한 ‘책임감’도 함께 안게 되었다. 책임지지 않는 세상에서, 영화 <재심>이 책임을 묻는 책임을 진 채, 관객에게 어떤 울림으로 다가갈지 지켜볼 일이다.


*** 영화 <재심> 스틸컷




참고

 ¹

 - 연합뉴스 , 장덕종 기자, 2017년 2월 11일 자, “법원 무기수 김신혜 재심 결정…검찰 항고 기각”

 - 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
    =0009025019&sid1=001&lfrom=kakao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및 *, **, ***

 - 네이버 영화 중 <재심>

 - 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49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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