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Mar 26. 2017

그런 '슬로운'은 없다. _ 영화 <미스 슬로운> 리뷰

쉰다섯 번째 지난주




환상으로서의 영화


 욕망은 결핍을 파생한다. 채워지지 않은 결핍은 다시 욕망이 된다. ‘욕망’이 아닌 ‘희망’이나 ‘바람’으로 표현의 정도를 순화시켜도, 작동은 유효하다. 각자의 욕망은 각기 나름의 색채를 지니기도 하지만, 몇 개의 얼개로 묶는 일이 어렵지 않을 만큼 또 닮은 데가 있다. 그렇게 욕망의 실천 불이행으로 인한 결핍이 집단의 차원으로 이루어지면, 부득불 자본이 관계한다. 자본은 그저 숫자가 많으면 관계하는 탓이다. 도리어 문제는 관계하는 방식에 있다. 현찰의 지급을 강요하기 위해서는 공동의 결핍을 메워줘야 하는데, 마침 여기 훌륭한 수단이 있다. 멋진 영상으로, 세련된 음악으로, 통쾌한 환희로! 영사기는 만족을 대리하기 위해 쉼 없이 돌아가고, 스크린에는 이루지 못한 환영이 투영된다. 결국, 영화는 대중의 환상을 투사한다. <지난주>, 한 편의 영화가 오랜 미국의 문제에 당당히 맞서는 한 명의 로비스트를 등장시켰다. 환상처럼......



※ 쉰다섯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에서는 영화 <미스 슬로운>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이 부분 이후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원치 않는 분들은 읽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개봉 전인 작품을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현실



오래된 문제


A well regulated Militia, being necessary to the security of a free State, the right of the people to keep and bear Arms, shall not be infringed.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State)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

- 미국 헌법 수정 제2조 (Amendment II) ¹

 

 미국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어느 지점에 이르면 방아쇠가 당겨지고, 당장의 갈등은 사라진다. 그렇다면 총기 구매의 시점부터 규제하면 되는데, 이것이 또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영화 <미스 슬로운>에 등장하는 로비스트는 거대한 자본의 파생물이다. 이미 이권은 국산복합체 국가 미국의 주요 산업의 한 축이 되었고, 정치권은 이들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위험한 인물들이 일제히 총을 내려놓는다는 보장이 없는 한, 나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베개 밑에 둔 총을 내다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헌법은 무기 소지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비극은 반복되고, 논의도 이어지지만, 모두 손에 총을 든 채다.




브래디를 위하여


 1981년 3월 30일 비 내리던 오후, 오찬 연설을 마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워싱턴 힐튼호텔을 나서고 있었다. 기자단 주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정신병력이 있는 존 힝클리 주니어(John Warnock Hinckley Jr.)였다. 그는 여배우 조디 포스터 관심을 끌기 위해 대통령 암살을 기도했다. 힝클리의 권총은 리무진을 향해 걸어가는 레이건을 겨냥했고, 2초 만에 6발이 발사되었다. 다행히 대통령은 총알이 심장에서 12cm 떨어진 곳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백악관 대변인 제임스 브래디(James Brady)는 머리에 총을 맞았다. 총알이 관통한 오른쪽 뇌의 손상이 너무 심해 의사들도 고개를 흔들었고, 주요 방송사는 초기 보도에서 브래디 대변인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브래디는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반복되는 수술과 재활의 긴 시간 동안 고통과 싸우며 그는 살아남았다. 브래디는 휠체어에 의지해 여생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신원조회를 의무화하는 총기규제법 추진에 앞장서며, 총기 규제 강화 운동의 ‘상징’으로 부상한다. 이 법안은 영화 <미스 슬로운> 속 총기 규제법안의 배경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휠체어에 앉은 브래디가 지켜보는 가운데 클린턴 대통령이 서명한 것은 1993년 11월 말, 그 끔찍한 날로부터 12년이 넘게 걸린, 그야말로 긴 여정이었다. 법무부는 지난 20년 동안 브래디 법 시행으로 전과자와 정신이상자 등 부적격자에 의한 불법 총기 구매가 200만 건 이상 차단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건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죽었을지 모를 수많은 사람”이 브래디 법 덕분에 오늘,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는 의미이다. ² 


* 클린턴 대통령의 서명을 바라보는 제임스 브래디





그리고 영화



대체 왜 여성인가?


 영화 상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영화의 주요 인물은 일제히 여성이다. 총기 규제안을 막고자 하는 정치인은 반대 여론의 중심에 ‘젊은 여성들’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워싱턴 최고의 로비스트 ‘슬로운(Elizabeth Sloane)’을 찾아간다. 마침 그도 여성이다. 그리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상황을 반전시키는 사건의 주인공인 에스미(Esme Manucharian)나 반전의 주인공이 되는 몰리(Jane Molly) 모두 여성이다. 왜일까?


 미국의 총기 사고의 최대 피해자가 여성 이어서일까? 그렇지는 않다. 2005년부터 2015년까지 미국에서 총기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 수는 30만 1천797명에 달하는데, 하루 평균 30여 명의 총격 사망자 가운데 약 50%가 흑인 남성이었다. 참고로 이들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6%에 불과하다. ³ 가해자 대부분이 남성임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총기에 관한 동경을 남성성과 분리해 생각하기도 어렵다. 여기 하나의 사례가 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해 4월 20일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 17주기를 맞아, 심리학자 피터 랭맨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대형 총기 난사 사건은 무너진 남성성을 복원하려는 상황에서 발생한다”라고 분석했다. 랭맨은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인 해리스의 어린 시절을 유심히 살폈다. 해리스는 태어날 때부터 다리에 장애가 있었고 고교 입학 전 흉부 기형으로 수술을 받았다. 그럼에도 군인을 꿈꿨다. 이때부터 해리스에게 총은 남성성의 상징이 됐다. 해리스는 범행 전 “총을 들었을 때 신이 된 것처럼 강해지고 자신감이 생긴다”는 글을 남겼다. WP는 “스스로 벌레 같다고 느꼈던 해리스가 사람을 살리거나 죽이는 결정을 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⁴


 얼핏, 미국의 총기 문제에서 여성은 무관한 존재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 속 에스미와 같이 직접적 피해의 대상이 되거나, 현실 속 브래디의 아내로 여생을 총기 규제에 헌신한 사라 브래디(Sarah Brady)처럼 간접적이지만 큰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남성성의 상징인 총에서 발사된 총탄이 날아드는 형국에서, 직접 혹은 간접 피해를 당하지만, 정작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에스미의 기나긴 침묵처럼…. 그런데 이상의 현실적 배경과는 거리를 둔 채, 영화 <미스 슬로운>은 총기 문제에서 여성을 전면에 등장시켰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좀처럼 그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어째서 남성성의 상징과 남성 일반으로부터 초래된 비극에 있어, 해결의 주체로 일제히 여성을 내세운 것일까? 남성들이 벌여놓아 묵힐 대로 묵힌 거대한 설거지 더미가 어째서 여성에게 오롯이 전가된 것인가? 이에 관해 영화 <미스 슬로운>은 끝내 답을 내어놓지 않는다.


** 영화 <미스 슬로운>에서 총기 사건의 피해를 비밀로 간직한 에스미





달콤해서 쓸쓸한


 이제 여성이 아닌, 슬로운에 주목해 보자. 슬로운은 특별하다. 경력에의 막대한 이익과 승리의 추구라는 다소 미약한 동기 부여에도 불구하고, 슬로운의 승리는 영화적 쾌감을 선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쾌감은 이내 허무로 전이된다. 왜일까?


 영화 <미스 슬로운>은 슬로운을 로비스트로서는 단연 최고로 묘사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철저하게 나약한 모습을 비추며, 어설픈 균형 잡기를 시도한다. 약에 의존하는 모습, 남성 매춘부와 관계를 맺는 모습, 에스미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모습들은 슬로운이 유능할 뿐, 그저 한 명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각하기 위해 소비된다. 이처럼 인간적인 특징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시도는 슬로운이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현실로 잡아당기는 작동을 수행한다. “이 사안의 해결을 위해서는 슈퍼 히로인과 같은 능력이 필요하지만, 좀 현실적으로 보였으면 좋겠으니 인간미 있게 그리자”는 편리한 균형 감각이 작동한 것은 아닐까? 혹시 이것이 미국 내의 총기 규제 찬성론자들이 누구라도 혜성처럼 나타나 총기규제에 반대해주기를 바라는 환상을 품는 지경에 이르렀음은 아닐까? 하지만 그런 로비스트, 아니 그런 슬로운은 없다.


*** 주인공 슬로운이 청문회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모습


 결국, <미스 슬로운>은 환상에 관한 영화다. 전쟁과 약탈의 역사가 남긴 야만의 흔적을 이처럼 통렬하게 해결할 여성도, 로비스트도, 그리고 그런 슬로운은 없다. 가끔 영화는 환상을 심어주며 눈을 하늘로 옮겨 달고는 한다. 물론 그것조차 영화 감상의 주된 동기로 작동할 수는 있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는 발을 땅에 붙이지 않고서는 요원할 뿐임을 상기해 보자면, 영화 <미스 슬로운>이 현실의 문제를 다룰 때 너무 달아나 버렸다는 아쉬움이 남음은 어쩔 수 없다. 모두가 총을 든 채, 서로 내려놓으라 하는 지경에서, 홀연히 천사가 나타나 모든 총을 가져가기를 바라는 꿈은, 그런 영화는 너무 달콤해서 슬프다.









오바마의 눈물과 <미스 슬로운>


 지난해 1월 5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총기 희생자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강력한 총기 거래 규제를 담은 행정명령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눈물을 보였다. 내용은 모든 총기 판매인이 연방정부의 면허를 얻어 등록하고, 구매자의 신원조회를 의무화함으로써 끊이지 않는 총기 폭력 희생자를 줄이겠다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우리는 급박함을 느껴야 한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게 더는 변명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결국 지난 2012년 총기 난사로 희생당한 코네티컷 주 뉴타운 초등학교 학생들을 언급하며 눈물을 흘렸다.


“숨진 초등학생 20명을 생각하면 미칠 지경이다.”


**** 총기 사고로 희생된 초등학생을 언급하며 눈물을 흘리는 오바마 대통령



 세상은 참 어렵다. 브래디의 오랜 투쟁에도, 오바마의 눈물에도 미국은 트럼프를 선택했다. 다시 <미스 슬로운>을 보자. 영화가 현실의 문제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 가장 주요한 지점은 책임을 다하였는지의 여부이다. 세상에서 이야기를 쉽게 취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이야기에 관해 진지하고 엄숙한 고찰을 스크린에 담아 내었는지의 여부는 숙제를 검사하는 관객의 올바른 태도라 단언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미스 슬로운>은 그간 이 사안에서 주체가 아니었던 여성을 황급하게 소환하거나, 주인공은 히로인이기도 하며 인간적이기도 해야 한다는 기계적 균형을 취하며 그저 극적인 요소로 소비하기에 급급했다. 결국 영화 <미스 슬로운>이 이토록 거대한 사태 앞에 책임을 다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자, 슬로운의 극적인 승리가 브래디의 오랜 투쟁과 오바마의 눈물과 그리고 희생자와 유가족의 아픔과는 너무나도 멀어 보였다. 이 공허한 현실과 환상의 괴리 앞에, 더없이 쓸쓸해진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섰다.






참고


¹

 - 위키피디아 “미국 수정 헌법 제2조” 항목

 - ko.wikipedia.org/wiki/미국_수정_헌법_제2조


²

 - 한국일보 오피니언, 박록 주필, 2014년 8월 7일 자, “브래디 ‘투쟁’의 유산”

 - koreatimes.com/article/868170

 ※ Brady 법률은 모든 무기 구매에 연방 배경 조사를 허용함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법률로 1993 년 11 월 30 일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 의해 법률로 서명되었고 1994 년 2 월 28 일 시행되었다. 제임스 브래디는 2014년 8월 4일에 사망하였다.


³

 - 한겨레, 2016년 1월 8일 자, “작년 미국서 1만 3천 명 총 맞아 사망… 어린이 756명”

 - 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725319.html


 - 국민일보, 김미나 기자, 2016년 4월 21일 자, “총기난사범은 왜 모두 남자일까”

 - 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506451&code=11141400&sid1=int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네이버 영화 중 <미스 슬로운>

 - 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42632


*

 - bradycampaign.org/our-impact/campaigns/background-checks


**, ***

  - 영화 스틸컷

  -  imdb.com/title/tt4540710/?ref_=nv_sr_2


****

 - 중앙일보, 노창현 특파원, 2016년 1월 6일 자, “'오바마의 눈물' 말없이 지켜본 총기난사 희생자와 가족들”

 - news.joins.com/article/1936493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