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과 반시선

쉰일곱 번째 지난주




시선과 반(反)시선


지구는 둥글다.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다. 하지만 이는 지구가 평평해도 가능한 만남이다. 정작 지구가 둥글기에 발현되는 가장 유의미한 사태는 태양조차도 지구의 지경을 한 번에, 그 전체를 바라보지 못함에 있겠다. 밤과 낮은 그 방증이다. 하물며 땅에 발붙인 채 화식하는 인간이 어찌 세상사 모두를 바라볼 수 있겠는가! 그렇게 시선은 반드시 반(反)시선을 수반한다. 그런데 시선과 반시선의 영역이 사람마다 제각기 달라, 누군가가 보는 것을 다른 이는 보지 못한다든가, 그 정반대의 경우라든가, 심지어는 그 둘 사이를 무수히 많은 시선과 반시선들이 뒤섞인 채 공존하는 양상이 전개된다. <지난주>, 엄중한 선택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오자, 어떤 시선으로의 집중이 목격되었다. 반시선은 무시당했다. 나는 그것을 위태롭게 보았다.









패배의 경험


시선은 곧 우주다. 어쩔 수 없다. 그렇게 각자의 우주가 형성된다. 우주가 닮은 사람들은 한자리에 모인다. 본 것이 비슷하니 이야기가 다 재미있다. 내일을 논할 때도 맞장구가 수월하다. 그것이 어떤 대리인을 공동으로 선임하는 시절에 이르면, 시선은 한 인간 혹은 한 집단으로 수렴한다. 그런데 그렇게 공동의 우주가 분명해질수록, 보이지 않는 반시선의 우주는 의도적으로 외면당한다. 심지어는 나쁘게 말한다. 지금은 서로가 열심히 나쁘게 말하는 시절인 모양이다. 한데 필자를 중심으로 그 말들은 모두 하나의 시선, 하나의 우주에서 나온다. 공교롭게도 반시선은 랜선의 이편과 저편에서도 모두 만나기가 힘들다. 다소 중립적인 사람들이 몇 있는 정도이다. 그런데 이 작동은 어떤 아팠던 옛 기억을 소환한다. 나는 다시 겪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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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er_com_20121220_194903.jpg * 2012년 18대 대선 세대별 투표율 및 출구조사 결과


멀지 않은 과거로 돌아가 보자.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땅에서 일어나는 정치지형을 최대한 단순하게 볼작시면, 단연 '지역주의'를 그 선두에 내세울 수 있었다. 이념이 곧 지역이 되는 남과 북의 불행이 다시 동서로 재현되어 위정자의 연금으로 기능해온 터였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이르자, 지역 이외의 다른 구분이 떠올랐다. ‘세대’가 바로 그것이다. 지역으로부터 세대로 주된 구분이 옮겨가던 선거가 바로 2012년의 18대 대선이었음을 뒤늦게 복기한다. 결국, 그 선거는 두 양상의 교차점이 되어, 모든 경향을 드러냈다. 한데 지역주의는 원체 오래전부터 보아 예상의 범주에 있었으나, 세대 간의 대립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이는 주된 활용 매체와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SNS 등으로 세상사를 바라보던 필자에게는 그해 대선 결과를 받아들이기가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나의 시선이 닿지 않던 세계에서 그들은 일사불란하고도 적극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세상에 표를 던졌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들이 바란 세상은 허상임이 드러났지만, 중요한 바는 당시 나의 시선, 나의 우주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의 허망함을 배운 것이었다. 그런데 다시, 같은 우주가 나를 감싸고 있다.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겁이 너무 많은가? 적어도 대비의 필요는 있지 않을까?





가려진 시선


대결이다. 링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두 선수를 열렬히 응원하는 사람들이 그 정도의 순서대로 링 주변을 채워나간다. 그런데 그 숫자가 적지 않고, 워낙 지지의 마음이 강하다 보니, 링에서 멀어질수록 뒤에서는 대결이 잘 안 보인다. 경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봐도, 이미 ‘더 사랑하는 사람들’에 가려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경기 실황을 전하는 역할을 맡은 자들은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반칙 이야기’에 지면을 할애한다. 판단이 어려워진 사람들은 앞에 선 열성 응원단이 밉다. 대선이 꼭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번 패배를 돌아보며 전략을 재정비하는 차원에서, 지금과 같은 구도는 과연 특정 후보에게 유리할까? 따져보자. SNS와 같은 공간을 빌어 지지 후보를 천명하고 의견을 내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더 나아가 외부에서도 모임을 가지며, 조직화하는 활동도 동조하고 응원한다. 그런데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가 너무 견고한 터라, 그 자체가 힘을 지니게 되었다는 인상을 부여한다면? 자신의 시선을 지니는 일의 무의미함을 논하자는 바가 아니다. 시선들이 모여들어 그 자체가 힘을 지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음과는 관계없다. 그렇게 보이면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위임하지 않은 힘, 곧 근거가 없는 힘에 반감을 느낀다. 촛불은 먼 기억이 아니다. ‘너희들만 좋아하는 그 후보’라는 프레임 밖에서는 “그런가보다”를 넘어선 "반감"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든다. 결국, 반감을 느낀 사람들은 그 후보를 선택하지 않는 것으로 의사를 표명한다. 문제는 정치에 관심이 많고, 열렬히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똑같이 1표씩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이다. 억울할 법도 하지만, 이미 합의된 바다.


이상의 지형에 편승하고자 하는 듯한 일련의 프레이밍은 더 절망적이다. 사례를 거론하게 된 터라 후보들을 적시하도록 한다. 이른바 문재인 후보 측의 “적폐연대” 프레임이 그것이다. 촛불의 시간에서 선악의 구분은 분명했다. 우리의 구호는 일관될 수 있었고, 목표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촛불 이후, 우리는 이전에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선거 정국을 맞이하고 있다. 절대적 세력이라 여겨진 보수층이 괴멸하며, 이전 선거에서 단일화를 이루었던 - 그 과정의 아름다움 따위는 논외로 하고 - 두 후보가 가장 유력한 주자가 되어 다투고 있다. 이 와중에 한 편이 다른 한 편을 적폐라고 말한다.


Screenshot_2017-04-06-20-04-23.png ** 안철수 후보 관련 입장을 표명하는 문재인 후보


물론 그 뜻이 아님은 잘 알고 있다. 이전의 범죄 집단과 함께 놀아나던 자가 안철수 후보에게 힘을 보탬이 이른바 적폐의 연대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사태가 개인에게 인식될 제, 그 복잡성은 무참히 거세당한다. 사람들은 문재인 후보가 “안철수가 적폐라고 규정했다"고 인지하게 된다. 그편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잘잘못을 따질 사안이 아니다.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런데 동의하겠는가? 왜 뜬금없이 안철수 후보가 적폐인가? 심지어 문재인 후보의 열성 지지층 사이에서는 안철수 후보와 이명박 전 대통령이 DNA를 공유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처럼 같은 시선 안에서, 닮은 우주를 공유한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세레나데를 외쳐 부를 때, 똑같이 1인 1표를 지닌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만의 사랑에 굳이 함께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떠나간다. 노래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거대한 장벽을 쌓는 일인 줄도 모르고……. 오늘도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마음의 준비


5년 전 그 패배로 받은 충격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반시선의 존재를 인정하고 마음을 열어두는 일은 만에 하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또 한 번의 패배 앞에서도 내 생명 유지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의 준비를 한다. 지지하는 후보가 패배하더라도 나는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촛불도 들고, 글도 쓴다. 도리어 시선은 더 넓어질지 모른다. 잠시 열정을 내려놓는다.









반시선을 위하여


단연코 가장 무거운 단어는 생활(生活)이다. 생활보다 무거운 단어는 있을 수 없다. 인생은 개인의 것이고, 문화는 인류의 것이지만, 생활은 지금 우리 모두의 명줄을 틀어쥔 탓이다. 생활은 그림자보다 가깝고, 시간보다 우선한다. 그리하여 생활을 능가하는 이념과 지지와 열정은 쉽게 폄훼되고는 한다. 유독 연설을 잘하던 어떤 이와 그의 지향을 사랑했던 한 사람으로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 작용임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세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 누구에게도 우리의 사랑을 강요할 수 없다. 나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도 생활이 있고, 사람이 있고, 삶이 있다. 존중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간단하다. 반시선의 영역이 존재할 수 있음에 대해 열린 마음을 지니면 그만이다. 마침 나는 하나의 미술 작품을 보고 있다.


the-false-mirror-1928 (2).jpg *** 르네 마그리트 _ 잘못된 거울 (The False Mirror, 1928)


Everything we see hides another thing,
we always want to see what is hidden by what we see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를 보고 싶어 한다”

- René Magritte (르네 마그리트) ¹


마그리트의 시선에 대한 태도는 현시점에서 반시선이 세상을 바라보는 입장을 명확히 대변한다. 이를 존중하면 좋을 일이다.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지지자들처럼 맹목적인 눈빛이 아니다. 의심하고, 경계한다. 그들이 마음껏 볼 수 있도록 잠시 시선을 터주자. 자신있지 않나? 반시선을 위하여, 결국, 시선을 위하여…….






참고

¹

- 우지현, 『나를 위로하는 그림』, 책이 있는 풍경, 2015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및 ***

- René Magritte _ The False Mirror (1928), MediumOil on canvas,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54cm x 81cm

- totallyhistory.com/the-false-mirror/


* (위)

- 2012년 18대 대선 세대별 투표율

- 타임트리, 우리나라 역대 선거 투표율 중 "18대 대통령선거 연령별 투표율"

- timetree.zum.com/16558/16881

* (아래)

- 2012년 18대 대선 세대별 투표 출구조사 결과

- ‘각씨’님의 블로그, <기쁨의 샘> 중 “18대 대선 세대별 득표율, 투표율”

- blog.daum.net/ikhwang71/114


**

- jtbc 뉴스룸, 서복현 기자, 2017년 4월 6일 자, “'정책'은 실종…'표심 자극' 프레임만 이어지는 대선”

- 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450526&pDate=2017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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