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나의 힘

예순두 번째 지난주




복수라는 동력


세계에 맞선 우리의 모습이 태도라면, 그 태도로부터 행동에 이르기에는 어떤 '동력'이 필요하겠다. 그것이 재산을 늘리고자 함이건, 명성을 쌓고자 함이건 어떤 지향은 좋은 동력이 된다. 그런데 동력이 반드시 미래로부터 힘을 얻으라는 법은 없다. 살아온 날로부터 근거하는 동력이 때로는 더 강하다. 이를테면 복수 같은 것 말이다.


복수라 치면 나 같은 장삼이사들은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틀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역시나 그 틀 속에서만 만세 부르기를 즐기는 나는 지인 몇몇에만 술자리에서 고백하듯 말한 바 있었다. 이번 대선에서 기호 1번 후보를 지지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날, 즉 2009년 5월 23일에 대한 복수를 위함이라 하였다. 선거가 끝났으니 하는 말이다. 대놓고 떠벌리고 다니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지지의 변이 논리적인가의 여부를 떠나, 이 같은 주장은 공감의 정도가 미진할 경우 더 큰 반감으로 돌아오곤 하였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지난주 드디어 그가 대통령이 되었고 나는 나의 세계에만 갇혀, 그 역시 복수라는 동력으로 이곳까지 왔으리라 짐작하였다. 돌이켜보니 그 짐작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렸더랬다.









그의 시간


2009년 5월 23일, 오전 9시 30분이었다. 그분을 떠나보냈다. 국민들에게 사실을 알려야 했다. 의료진들과 협의해, 내가 대통령의 서거 사실과 원인을 발표하기로 했다. 이어서 의료진이 의학적 설명을 하기로 했다. 짧은 문안을 만들어 기자들 앞에 섰다. 수백 개의 플래시가 터지는 듯 번쩍번쩍했지만, 아무 느낌이 없었다. 회견장에 가득 찬 기자들의 웅성거림조차 무서운 정적처럼 느껴졌다. 마치 정지화면 같았다.

- 문재인, <운명>, '그날 아침' 중 (p.21, 22) ¹


*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노 전 대통령 서거 발표하는 모습 ⓒ KBS


토요일이었다. 으레 술에 취해 여전히 금요일 밤을 잠꼬대하던 나를 깨운 것은 친구의 문자 한 통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셨다는 내용이었다. 언뜻 전날 배우 여운계 선생께서 돌아가신 일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위독하다던 소식이 떠올랐다. 그 친구가 두 가지 사실을 혼동하였겠거니 했다. 그래도 노트북을 열었고, 이내 사태를 파악한 나는 곧장 서울역으로 향했다. 서울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주 대통령에 당선된 바로 그의 목소리였다. 침착하고도 차분했다. 아직도 사태 파악이 완전치 않았던 나는 그 담담한 목소리에 더욱 갸우뚱거렸다. 그로부터 2년 후, 그는 한 권의 책으로 대중 앞에 섰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그가 아무런 느낌조차 없었을 만치 무서웠음을 말이다. 당시 나의 흥분과 분노 따위는 비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자가 겪는 가장 큰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그날을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렇게 길고 긴 5월 23일 하루가 넘어갔다. 내 생에 가장 긴 하루였다. 그날만큼 내가 마지막 비서실장을 했던 게 후회된 적이 없다. 시신확인에서부터 운명, 서거 발표, 그를 보내기 위한 회의주재까지, 나 혼자 있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했다.

- 문재인, <운명>, '상주 문재인' 중 (p.413) ¹


그의 뒤늦은 고백이 아니었던들 짐작하지 못할 감정선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감히, 그가 정치를 시작하겠다는 다짐 속에서도 그날의 기억이 자리하리라 믿는다. 어떤 하나의 기억은 평생을 지배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다음의 장면은 그가 그날의 기억을 쉽게 분노로 표출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역설적인 차원에서 그의 분노와 복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 당시 문재인 국민권익위원회 운영위원장이 이명박 전 대통령 내외에게 예의를 표하는 모습


이명박 대통령 헌화순서에서 작은 사달이 생겼다. 분노를 참지 못한 백원우 의원이 벌떡 일어나 이 대통령에게 ‘정치보복 사죄하라’고 고함을 쳤다.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주로서는 사과해야 할 일이었다. 영결식 끝날 때 국민권익위원회 운영위원장으로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과했다. “결례가 됐다. 조문 오신 분한테 예의가 아니게 됐다”고 머리를 숙였다.

- 문재인, <운명>, '눈물의 바다' 중 (p.423, 424) ¹


맞는 말도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어서 노 전 대통령 국민장 당일 백 의원의 태도에 관하여는 옹호가 어렵다. 하지만 그 정도의 분노는 표출할 수도 있겠거니 한다. 주목하는 바는 머리를 숙였던 당시 그의 태도이다. 이 태도가 고매하고 숭고하다는 바가 아니라, 참았다는 것이다. 참아 내리누른 감정은 어디 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 누그러질 뿐, 여전히 가슴에 남아 있다. 좋을 때를 기다리는가 싶었다. 마침 그가 정치라는 무대에 뛰어들었고 나 같은 이의 기대가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였다.





복수는 그의 힘


내가 차마 믿을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인들 믿기겠는가. 대통령이 스스로 몸을 던지셨다는 게 믿기지 않는 건 국민들이나 기자들도 모두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유서 전문을 공개하고 기자들에게 배포하라고 김경수 비서관에게 시켰다. 출력해서 가지고 온 최초 원본은 여사님께 보여드린 후 품에 넣어뒀다. 나는 지금도 그분의 유서를 내 수첩에 넣고 다닌다. 별 이유는 없다. 그냥 버릴 수가 없어서 그럴 뿐이다.

- 문재인, <운명>, '상주 문재인' 중 (p.412) ¹


*** 당시 문재인 후보가 18대 대선 기간 출연한 한 방송에서 노 전 대통령의 유서를 꺼내 보이는 모습


그가 아직도 유서를 지니고 다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로부터 그날을 지운다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음이다. 그런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나 같은 필부들은 신이 났다. 이제 피의 복수가 시작되겠거니 한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복수할 생각이 없음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복수를 하려는 참인가 보다. 그리 추정하는 바는 당장 범인의 경우와 같은 '날이 선 마음'이 안 보인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유시민 작가의 발언을 빌려온다.


이어 "문재인 대통령을 후보 시절 만나면 놀라는 게 있다. 그분 마음속에는 부정적 감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분 마음속에는 그런 게 감지가 되지 않는다"며 "아예 없거나, 있지만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그럴 때만 남들한테 못 느끼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유 작가는 "저는 아직 뾰족한 감정의 조각이 튀어나온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한테는 그런 것을 느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은 좋아하는 게 노무현 대통령과 다르다. 노 대통령은 사랑스러운 분이고 내가 무엇인가 해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며 "그러나 문 대통령은 사랑스럽다고 하기는 어렵고, 무엇을 해드리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고, 좀 기대도 괜찮겠다고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 유시민 작가 2017년 5월 13일 봉하마을 방문 현지 발언 중 ²


최근 진보 어용 지식인을 선언(?)한 유시민 작가의 위 발언에 주목한다. 어찌 보면 가족 못지않게 서슬 퍼런 분노의 눈동자를 이글거려야 할 사람으로부터 그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을 때의 당혹감과 기대감이 동시에 전해온다. 유 작가의 생각처럼 그가 애써 감정을 내리누르거나, 잘 다스린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그가 복수라는 대상을 아예 외면한 것만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만의 언어로 복수를 정의하고 굳게 새겨 놓았음을 엿본다. 이는 전국적으로 촛불이 타오르던 지난겨울, 전주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복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 바에 근거한다. 대통령 문재인이 생각하는 가장 최근의 복수에 관한 전언이다.


다시는 그런 세상이 되지 않도록 우리 확실하게 복수해야겠습니다. (청중들 환호)
복수라고 하니까 와~ 하시는데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청중들 다시 환호)
그런 것이 복수가 아닙니다. (일동 웃음)

복수는 로마 시대의 황제이면서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분이 있죠.
그분 명상록이 유명한데, 그 명상록 가운데 유명한 구절 중의 하나가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가장 최선의 복수는 적들과 다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르게, 정말 문화예술 표현의 자유 확실하게 보장하고,
정부가 문화예술에 대해서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는
그런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 만드는 것. 그게 우리가 해야 할 확실한 복수 맞죠?

제가 앞장서서 그런 진정한 민주공화국 만들어 가겠습니다.
전주시민들 함께해주시기 부탁드리겠습니다.

- 전주 촛불 집회 중 2016.12.31 ³

**** 당시 문재인 전 대표가 전주에서 열린 촛불 집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이와 같은 생각이 급하게 만들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정치에 도전한 2012년에도 비슷한 맥락의 발언을 전해온 바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과 관련해 그는 “현 정권처럼 치졸한 모습의 복수는 하지 않겠다”며 ‘상생과 통합’을 강조하기도 했다. 문 후보는 “다시는 (현 정부와 같은) 대결과 갈등의 리더십으로 정권을 잡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복수, 진정한 복수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 두 번째 저서 <사람이 먼저다> 관련 기사 ⁴


초월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가 무엇을 하건 이 땅 위에서 벌어지는 사태이기에 다소 먼 대상일지언정 상대를 압도적으로 초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가 단 한 번도 ‘초월’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이안환안 이아환아(以眼還眼 以牙還牙_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수준의 복수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결국, 민주주의의 정치라는 것이 다수의 시민에 대한 지지를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가운데 존재의 의미를 찾는 제도라면, 되풀이되는 동일한 복수의 향연이 아닌 상대가 다음의 복수조차 꿈꿀 수 없도록 유권자의 이름으로 철퇴를 내림은 교과서적이나마 가장 멋진 복수가 될 것이다. 적어도 그는 이를 목표로 삼고 있다. 실현 가능성을 떠나 지켜볼 만한 것임은 틀림없다.








복수는 나의 힘


-정계에 입문하면서 만났던 김대중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김근태 의원에 대한 남모르는 기억이 많을 것 같은데요.

(중략)

노무현 대통령은 변호사 시절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긴 시간의 모습들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 문재인, <대한민국이 묻는다>,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동행' 중 (P. 110,112) ⁵


전부였다. 2012년의 도전에서 고배를 마신 그가 재도전을 하며, 다른 질문의 대상에 할애한 긴 답변에 비해 친구이자 전 대통령이었던 사람에 관해 언급한 부분은 이것이 전부였다. 선거 전략상 노 전 대통령에 관한 언급을 줄이기로 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분명한 바는 운명의 괘를 노무현의 그것으로부터 문재인의 그것으로 옮겨오려는 의지로는 읽혔음이다. 마침 오래된 그의 고백이 떠오른다.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
그의 서거조차 그러했다. 나를 다시 그의 길로 끌어냈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 하게 됐다.

- 문재인, <운명>, '운명이다' 중 (p.467) ¹


친구가 남긴 큰 숙제를 받아 든 이는 그것이 복수만으로 완성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복수'가 목적이 아닌, 과정 중에 수반되는 것임을 또한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그의 복수를 명명하자면, 그가 선거 기간 중 사용한 표현을 빌려 ‘압도적으로 성공하는 정부’가 되는 일이겠다. 이를 위해서는 미래상을 반듯하게 제시하기 이전에, 이전의 그릇됨을 바로 잡아야 할 터이니 부조리를 청산하는 시도는 불가피하다. 법의 테두리 내에서도 얼마든지 복수가 가능하니 어려울 일도 없겠다. 그리고 이전 또 그 이전의 정부에 비해 압도적으로 품격 있게 성공하는 정부의 탄생은 복수의 대상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시민의 힘에 의해 궁지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그의 의지처럼, 그만의 복수를 할 것이다. 물론 응원하련다. 이렇게 멋진 복수라면 응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복수는 그의 힘이자, 곧 나의 힘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 취임식 후 청와대로 향하며 시민들에게 손을 흔드는 문재인 대통령







참고


¹

- 문재인, <운명>, 가교출판, 2011


²

-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 2017년 5월 13일 자, “봉하마을 간 유시민 "새정부에선 공무원 안할 것"”

- 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25321


³

- 전주 촛불 집회, 2016년 12월 31일 자, 유튜브 Hani Kang님의 채널 중
“문재인 - 가장 최선의 복수는 in 전주 촛불집회 2016.12.31”

- https://youtu.be/ptalXelJY1w


- 한겨레, 석진환 기자, 2012년 8월 5일 자, “문재인 “현정권처럼 치졸한 복수 않겠다””

- 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45797.html
#csidx095c4a19df09ce0a8568a2dfd56cdfb


- 문재인, <대한민국이 묻는다>, 21세기 북스, 2017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및 *

- 스타서울TV, 이진 기자, 2009년 5월 23일 자,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외신 긴급 타전 나서”

- 2009년 5월 23일 KBS 뉴스속보 화면 캡처

- starseoultv.com/news/articleView.html?idxno=51391


**

- 네이버 블로그, jsyqa님의 블로그 중 Social Insight, “[책] 문재인의 운명”

- blog.naver.com/jsyqa/6014540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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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힐링캠프, 화면 캡처

- 김인건 성형외과의 네이버 블로그 중 세상 사는 이야기, “문재인 힐링캠프(힐링캠프 문재인), 자유인 문재인”

- 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otadvil&logNo=70128731294&
parentCategoryNo=&categoryNo=13&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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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촛불 집회, 2016년 12월 31일 자, 유튜브 Hani Kang님의 채널 중
“문재인 - 가장 최선의 복수는 in 전주 촛불집회 2016.12.31”

- youtu.be/ptalXelJY1w


******

- 연합뉴스, 홍해인 기자, 2017년 5월 10일 자, "취임식 마치고 청와대로"

- yonhapnews.co.kr/photos/1990000000.html?cid=PYH20170510174200013&from=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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