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일곱 번째 지난주
‘불교에서는’으로 시작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 깊고 고요한 성찰의 언어들을 빌려오는 일은 문장에 신뢰를 더하여, 실제로 그러함보다 더 읽을만한 글로 의식(意識)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침 불교에서는 의식(意識)을 “색 · 성 · 향 · 미 · 촉의 5경을 확정적으로 요별할 뿐만 아니라, 모든 법(法, 즉 법경, 즉 정신적 대상)도 요별한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의식을 단지 사물의 특성을 ‘인지’하는 차원을 넘어, 세상과 제정신이 만나 판별이 가능한 차원으로 정의함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정신적 대상에 대한 의식을 위해서는 심려(審慮) 즉, '살피고 생각하다'라는 심사숙고(深思熟考: 깊이 생각하고 깊이 고찰하다)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¹ 즉 세상을 섬세하게 바라보는 일에 관함이다.
섬세(纖細)에서의 ‘섬(纖)’ 자는 ‘가늘다, 부드럽다, 자세하다, 가는 베, 고운 비단’이라는 뜻이다. ‘세(細)’ 자도 '가는 실, 가는 실로 씨줄과 날줄을 엮어 만든 가는 베, 고운 비단'을 이른다. 즉, ‘섬세’는 “아주 가느다란 씨줄과 날줄로 연결된 결”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이 ‘섬세’야말로 미시사 단위로 세상이 작아지고, 그 미시사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서로 연결되어 거대한 힘과 권력을 바꾼 오늘을 설명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하겠다. ² 때마침 지난주, 어떤 의식들이 조금만 더 섬세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부추겨왔다.
지난겨울로 돌아간다. 자꾸만 그 추웠던 겨울은 왜 들추나 싶겠다. 더워서가 아니라, 그 겨울의 광장이 고스란히 지금의 봄과 또 여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유난히 춥고 고단했던 투쟁의 시간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또렷했던 우리의 목소리 또한 기억한다. 주장의 방식은 다양했지만, 당장의 바람은 하나였다. 물러내야 할 자들의 이름자 정도는 그야말로 삼척동자도 다 욀 정도였으니 말이다. 곧 선악의 구분이 명료하였음이다. 이편과 저편이 분명히 갈렸던 시간이었다.
투쟁과 승리가 부여하는 아름다움과는 무관하게 단일대오를 쉽게 형성할 수 있었다는 그 낮은 난이도를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를 둘러싼 문제는 절대 간단하지 않다. 세상사도 일상사도 모두 난해한 문제들로 얽히고설켜 있다. 응당 현대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에 의함이다. 그런 와중에 우리 앞에 너무나도 분명한 선택지가 주어졌고, 부당함을 외치는 항변은 크고 일관되었다. 하지만 뚜렷한 목소리의 시간은 막을 내렸고, 우리 손에는 다시 얽혀있는 세상사가 들려있다. 문제들은 첨예하고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전술하였듯, 본디 현대사회라는 것이 그렇게 생긴 탓이다. 우리는 이제야 ‘질문 같은 질문’, ‘문제 제기 같은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토대를 회복한 것이다. 진도가 나가면, 좀 더 어려운 숙제를 풀어야 하는 법이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참 어렵다. 하물며 새롭게 팀을 꾸려 아예 새로운 얼굴들을 뽑아야 한다면, 이는 일반 회사에서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지다. 그러니 높은 도덕성과 탁월한 전문성이 요구되는 고위 공직자의 인사가 쉬울 리 만무하겠다. 새로운 인물들이 호명되면 하루가 멀다고 흠결들의 정도를 따져 묻는 성토가 들려온다. 그런데 그 와중에는 소위, 같이 촛불을 들었던 사람 중에서의 이견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이제 영역을 구분하여 한쪽은 문제 제기를, 다른 한쪽은 좀 더 믿음을 갖고 지켜보자는 쪽으로 나뉘었다. 전혀 슬퍼할 일이 아니다. 단순했던 지난겨울의 광장으로부터 우리는 저만치 달려 나와 있다. 그리하여 이 같은 이견들의 존재가 나는 정말이지 반가웁다.
반가움을 뒤로하고 조금 더 들어가 따져본다. 호명된 인물의 적절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우선 새로운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이니 믿음을 보내자는 주장을 이해하면서도, 그 편에 서기란 쉽지 않음을 밝힌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의식한 바를 천명할 수 있고, 또한 그리해야 할 것이다. 문제가 단순했던 지난겨울의 양상과는 무척이나 달라서, 어떤 인물의 흠결 정도에 대해 자신의 각기 다른 견해는 총천연색 스펙트럼으로 나타날 수 있음이다. 중요한 바는 이 다양한 견해 중 어떤 논의가 힘을 얻느냐이다. 그 무게 중심이 곧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성도 갖추었으며, 나름의 명예도 쌓아온 사람들의 굳이 알아야 하나 싶은 과거사가 들춰지는 모습들을 본다. 물론 그 문제 중 상당수는 문제 제기를 위한 문제 제기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바라는 정부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적절한가라는 더 섬세한 물음이 ‘감히 우리 **에게 반(反)하는 것이냐’라는 외침 앞에 주눅 들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새로 뽑힌 대통령이나 인물 개개인에 반대함이 아닌, 이 땅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용인될 수 있는 ‘작은 반칙들’의 정도를 0으로 수렴시키려는 시도이자, 시대를 역행하는 여성관이나 콤플렉스에 근거한 역사관 따위를 이제는 벗어나자는 항거인 것이다.
우리는 문재인이라는 자연인을 최고위 공무원으로 만들기 위해 촛불을 든 것이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규칙을 위반하는 자들을 몰아내고, 나의 일상을 파고드는 부조리에 항거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그런 뜻에서 함께하였다.
어느 날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남의 잘못을 들춰내야 할 때 어떻게 하면 마음을 평온한 상태로 머물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남의 잘못을 들춰낼 때는 다음 다섯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중 첫 번째는 들추려는 잘못이 사실인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³
섬세는 계속된 질문과 답변, 그리고 반론이라는 논의의 양태로 드러날 수 있다. 복잡한 문제들 앞에서는 논의, 필요에 따라서는 논쟁도 요구된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질문하는 시민은 필요하고 또 소중하다. 그런데 섬세한 질문을 위하여 필요한 제1의 조건은 '사실'의 공유이다. 시민이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지하기 위함의 문제에서 우리의 시선은 높은 언론사 건물로 향한다. 물론 사옥의 높이와는 무관하겠다. 그저, 사실과 다른 문제들로 쓸데없이 우리의 섬세를 낭비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지난주까지 이 땅의 언론은 우리가 사실에 기반하여 오롯이 섬세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에 들게 하였다. 그럼에도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말하여야 한다. ⁴ 그리하도록 강요해야 한다. 그리하여야 섬세가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한 세력을 몰아내었다고 곧장 아름다운 세상이 열릴 수는 없다. 차라리 이 사회를 만만하게 보고 아무렇게나 전횡을 일삼던 어떤 자와 그 세력에 비해, 일상의 적폐들은 무척이나 촘촘하며 쉽게 지울 수도 없을지 모른다. 이것이 섬세에의 강요를 멈출 수 없는 이유이다.
참고
¹
- 위키피디아 중 “팔식(八識)” 항목
- ko.wikipedia.org/wiki/팔식
²
- 김범진, <섬세-세상이 당신에게 은밀히 요구하는 것>, 갤리온, 2008
- hani.co.kr/arti/culture/book/312626.html#csidx1b067883a1c3235b90b8fe7a4da7ece
³
- 매일 종교신문, 이화서 기자, 2012년 12월 13일, “미산 스님(상도선원 원장)의 명법문”
- dailywrn.com/sub_read.html?uid=3886
⁴
- 위베르 뵈브메리(Hubert Beuve-Méry), 르 몽드(Le Monde) 창업자 발언 인용
- namu.wiki/w/르몽드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Magnifying Glass”, Roy Lichtenstein.
- joehigginsmonotypes.com/2017/04/30/when-they-go-hi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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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차 촛불집회, 본인 촬영
**
- 한국일보 강윤주 기자, 2017년 6월 14일 자, “‘음주운전’ 조대엽, ‘여성비하’ 안경환 논란에 민주당 속앓이”
- hankookilbo.com/v/88e9efe461c54534b3fb41df68427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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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 JTBC 뉴스룸, 박병현 기자, 2017년 5월 31일 자, “JTBC 단독 <'기획 부동산' 매입 의혹> 보도” 화면 캡처
- 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476210&pDate=20170531
우)
- 한겨레, 2017년 6월 11일 자, “[단독] 김부겸, 부인 재산 거짓기재·6년간 신고 누락” (현재 기사 삭제)
- 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9836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