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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Jun 25. 2017

감독의 일과 영화의 일 _ 영화 <박열> 리뷰

예순여덟 번째 지난주




감당이라는 관계


 ‘관계’는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바로 ‘맺음’과 ‘지속’이다. ‘맺음’ 단계의 관계는 그야말로 시작을 뜻한다. 짧은 순간일지언정, 그 어렵다는 인연(因緣)을 이루는 단계이다. 어떤 종교적 확률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만남이 얼마나 지난한지를 잘 알고 있다. 다음은 ‘지속’으로, ‘맺음’ 이후에 관계를 이어나가는 단계이다. ‘지속’하기의 어려움 역시 무수히 많은 지면과 영상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지속’의 가능함을 따짐에 있어 결정적인 개념이 하나 있다. 바로 ‘감당(堪當)’이다.


 또한, 관계는 상호작용한다. 반드시 너와 내가 있는 탓이다. 그 너와 나 중 보편적인 대상들은 또렷하게 정의되었다. 우리는 흔히 이들을 “답게”라는 접미사 속에 가두고는 한다. “너는 학생이면 학생답게 행동해라!”가 가장 유효한 실례이다. 즉 내가 인지하기에, 너는 학생 “답지 않음”이다. 바로 이 “답지 않다”라는 표현에 ‘감당’이라는 개념이 있다. 즉 어떤 대상이 “답지 않다”라는 선언은, 나는 네가 더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라는 고백을 함의하는 탓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혹은 흐릿하게 아는 독립운동가의 상(象)으로부터 먼, 그러니까 독립운동가 ‘답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담은 영화가 관객을 찾아왔다. 마침 그는 이렇게 묻고 있다.


“니들이 감당할 수 있겠어?”



※ 예순여덟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에서는 영화 <박열>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영화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를 최대한 배제하였으나, 감상 전 영화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원치 않는 분들은 읽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아직 개봉 전인 좋은 작품을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답지 않은" 영화 <박열>


 박열(이제훈 분)은 감당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시대 또한 마찬가지이며, 오늘날 박열과 동시대를 살아간다고 하여도 이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박열이 반대하는 것은 온전히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에 머무르지 않는 탓이다. 그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모든 권력에 반감을 지닌, 이른바 아나키스트로서의 신념을 지닌 채 살아간다. 어떠한 통제도 그에게는 척결의 대상인 셈이다. 극 중 황태자의 암살을 모의하는 등의 항일투쟁 이외에도, 독립운동 자금을 빼돌린 조선인에 엄벌을 가함은 이 같은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는 행위이다. 그러니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라는 선언은 세상이 자신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임을 본인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는 하나의 고백이기도 하다. 이처럼 뜨거운 자유를 지닌 박열 앞에, 허울뿐인 문명국 일제의 초국가적 만행이 자행되고 있었으니, 그는 그답게 ‘더 개새끼’가 될 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을 터이다.


 그렇게 영화 <박열>은 역사 속 인물 박열과 그를 쉽게 감당하지 못해 당혹해하는 일본 내각 대신 및 주요 인물의 얼굴을 차례로 번갈아 비추며 기본적인 영화적 틀을 갖춘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정도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였다고는 하나, 우리가 흔히 보던 일본강점기를 그린 작품과는 달라도 아주 다르다. 그야말로 "답지 않은" 영화인 셈이다. 이 "답지 않은" 영화 <박열>을 관객이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지 따져보자.


* 영화 <박열> 스틸 이미지





감독의 사명과 영화의 사명


이준익들


 위인의 이름자를 외워 객관식으로 찍어내는 역사교육에서 주로 답이 아니었던 이름들, 혹은 아예 시험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던 이름들이 있음을 확신한다. 적어도 영화 <박열>을 통해 한 명은 확인된 셈이니 말이다.


 언제나 해야 할 일의 전체 양은 얼추 정해져 있어서, 공적인 시스템에서 해내지 못하면 누군가는 미이행분을 떠맡게 된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듯, 갈증을 느끼는 어떤 이가 홀연히 나타나고는 하는 것이다. 이준익이 그러하다. 유독 어떤 사람이 어 이유로 목마른 자가 되는지에 관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역사 속의 ‘박열들’을 사람들에게 비추어야 한다는 뜻을 지닌 ‘이준익들'의 사명감이 소중함만큼은 자명할지다.


** 영화 <박열> 촬영 현장




감독의 사명


"실제 역사적 사건과 90% 이상 일치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¹


 이제 ‘이준익들’에서 감독 이준익의 관점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본다. 역사적으로 소외되어서는 안 됨에도 소외된 인물을 후대에 전하겠노라는 사명을 오롯이 실천하는 이의 직업이 영화감독인 경우에 관함이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혔듯, <박열>은 철저한 고증에 근거하여 제작된 작품이다. 마침 후미코가 남긴 자서전 등 문헌 자료의 존재는 ‘이준익들’에 속한 영화감독 이준익이 자신의 사명을 능히 구현하기에 좋은 여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책이 많아도 읽지 않으면 소용이 없듯, 일본 내각 대신의 이름자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은 섬세한 고증에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그러고 보니 전작인 <동주> 역시 섬세한 고증으로 많은 박수를 받았음을 떠올려본다. 그런데 <박열>에서는 더 하다. 더욱더 고증에 신경을 쓴다. <동주> 개봉 당시 "70% 정도의 고증과 30% 정도의 픽션으로 <동주>를 만들었다" ² 는 감독의 발언에 근거하자면 20% 더 ‘사실’에 신경을 쓴 셈이다. 이 같은 수치가 정량적으로 의미를 지닐 수 없음을 잘 알기에, 그 수치를 물고 늘어짐은 타당하지 않겠다. 다만, 전작과 같은 시대를, 그것도 인물 중심으로 그려낸다는 방식도 동일하게 유지하는 가운데, 어째서 더욱더 역사적 사실에 방점을 찍는 방향으로 연출하게 된 것일까?


 첫째, 앞서 주지하였듯 박열은 감당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박열이 무척이나 영화적인 인물임을 시사한다. 세상의 모든 억압에 항거하는 존재가 가장 부조리한 시대와 만나 발생시키는 마찰음만으로도 영화관을 모두 채울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따라서 감독으로 하여금 영화적 수법은 불필요한 시도로 측정되었으리라는 추측은 타당하다. 둘째, <동주>에서의 송몽규처럼 기억해야 할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시도로써 박열이라는 이름자를 상정하였다면, 영화적인 꾸밈이 인물 박열을 읽어내는 일에 장애가 된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감독이 직접 밝혔듯, ³ 인물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넘어 시대를 읽는 시도로써 고증에 천착한 것이라면, 인물과 사건 그리고 배경이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헤쳐 모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시도로써 철저한 고증으로 채워진 연출은 불가피했을 성싶다. 감독의 일에 공감한 채, 다시 영화를 본다.


* 영화 <박열> 스틸 이미지




영화의 사명


 역사적 사명감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의 존재와 그 존재가 마침 영화감독이어서 연출에 임하는 태도는 분명 <박열>과 같은 영화에 영향을 미칠법하다. 그런데 그것이 영화라고 하는 매체의 성격과는 어떻게 조응할 수 있을까? 실제로 영화 <박열>이 주목한 시대의 박열은 무기력하다. 물론 그 비극의 시간을 살아간 이 땅의 모든 시도가 무기력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유독 영화 <박열>이 주목한 박열의 시간은 대부분 감옥으로 한정되며, 이에 ‘개새끼’다운 면모를 보여줄 영역은 한정된다. 이것이 비록 인물 박열의 무기력한 모습을 통해 그 시대의 비극을 조명하려는 시도였다고는 하더라도, 독립운동가 “답지 않은” 독립운동가로서 항거하는 에너지는 스크린을 좀처럼 넘어서지 못한다. 이는 한 번쯤 곱씹을 만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감독의 사명이 아닌 영화의 사명에는 바로 곁에 관객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동주>를 떠올린다. 식민지 치하에서 자신의 무기력함을 알아버린 슬픈 지식인이 시대의 벽에 그 뜻이 가로막힐 때마다 시가 흘러나왔다. 관객은 그 절절한 시구를 들을 적마다 그의 슬픔을 온전히 공감할 수 있다. 시대의 비극과 인물의 아픔과 관객의 기대치가 이격 없이 들어맞때문이다. 그런데 관객은 박열에게는 다소 다른 기대를 품는다. 일제뿐 아닌 모든 강요하는 존재에 항거했다는 인물이 불의에 저항하는 시도는 윤동주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리라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는 식민지 치하에서 아나키스트로 살아가는 모습이나, 일본인 여성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든가, 실패하였음에도 황태자 암살을 모의하는 등의 장면들을 상세히 전하지 않는다. 옥살이 중 후미코와의 사진 촬영이나 핑크색 ‘사모관대(과거 벼슬아치의 예복)’를 입는 모습만으로는 무언가 관객의 성에 차지 않을 법하다는 기우가 드는 지점이다. 더욱이 영화는 ‘감금하여 잊히게 하겠노라’는 일본 내무 대신의 계략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지점에서 끝이 난다. 어째서 박열의 시간 중 이 시기에 주목하였는가에 관한 의문이 계속해서 부유했다. 혹여 고증이 가장 확실한 시간대만으로 영화의 시간을 한정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픽션이 가미된 오락적인 영화였다면 스펙터클 한 볼거리에 집중하는 것이 맞지만, '박열'은 다르다. ‘박열’과 ‘후미코’의 삶을 진정성 있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의 삶과 가치관에 충실한 영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⁴


 이준익 감독은 독립운동가를 다룬 여타의 작품과 <박열>이 구분되는 지점으로, 있는 그대로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언급한다. 따라서 이 시선이 다치지 않도록 여타의 영화적 장치와 시도들은 배격된다. 물론 이는 앞서 언급하였듯, 인물과 시대 모두를 관객에게 변질의 위험 없이 전달하면서, 동시에 인물과 처절했던 시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감독의 머릿속이 아닌 영화와 직접 대면하는 관객은 인물 박열 이전에 영화를 만나기 위해 영화관에 간다. 영화라고 하는 매체가 자신에게 부여하던 즐거움의 방식이 학습된 채로 가는 셈이다. 그런데 이제껏 보아온 영화와의 간극이 멀어 인물에의 감흥을 미처 가슴에 담기 힘들어진다면, 혹시라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박열이라는 이름자가 최초의 의도보다 흐릿하게 남지는 않을까? 특히나 이토록 입체적인 인물을 사실 정보에만 주목하여 전달하면, 또한 지금처럼 세세한 기록이 가능하지도 않았을 시절임을 감안하면, 도리어 우리가 놓친 박열의 모습은 없을까? 오롯이 기록으로만 영화를 만든다면, 대체 기록의 일이 아닌 영화의 일은 무엇인가? 이런 걱정이 들었다.








영화의 일


 영화 감상자는 관객 수에 집계되는 군집의 일부이기 이전에, 문화 수용자로서의 개인으로 존재한다. 영화를 감상하고자 하는 개인이 예매하고, 영화관에 가며, 좌석에 앉아 영화라는 매체를 만나는 행위는 만만치 않은 자발성을 요구하는 탓이다. 특히 이는 서론에 언급한 관계의 과정 중 “맺음”에 해당한다 하겠다. 각자의 긴급한 사정이 아닌 한,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이 둘의 관계는 유지된다. 문제는 그 이후이다. 영화관을 나서자마자 관계가 단절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흔히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감상자 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남는 게 없다.”


 영화 감상 이후에 남는 게 있다고 발언함은 즉 생각할 거리나, 각인된 장면이 마음속에 남아있음을 의미하겠다. 곧, 이 같은 관계의 '지속'은 한 편의 영화가 그 자체 온전히 ‘감당’할만하다는 감상을 동시에 내포한다. 어느 지점에서 납득하지 못한 전개가 계속 생각의 목에 걸려있다거나, 크고 작은 ‘왜’라는 질문에의 이해가 용이하지 않다면, 당장 영화적으로 감당이 어려운 차원을 넘어, 소위 ‘남는 게 있는’ 영화가 되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열>은 좋은 영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적 인물을 스크린으로 불러내었으며, 인물과 시대에 대한 예의를 지켜내며 손상 없이 관객에게 전려는 노력에서 특히 그러다. 명백한 성과에 기댄 채, 약간의 욕심을 부려본다. 박열과 후미코의 사랑이 조금만 덜 쉽게 주어졌더라면, 반복된 투쟁과 좌절이 병렬적으로 이어지기보다는 고저가 있어 감상자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더라면, 영화 자체로서의 주제의식도 부각되어 인물이 아닌 영화가 이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더라면 하는 정도이다. 그러니까 감독 개인의 사명으로부터 반걸음 정도만이라도 영화적으로 친절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인 것이다. 시대를 기억하고 인물을 회상함은 사실 그대로를 비출 때도 가능하겠으나, 관객에게 한 편의 영화로서 감당하기 수월하여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면, 도리어 더 오랫동안 마음에 남지는 않을까?


 반복해서 주지하지만 영화에는 영화의 일이 있어서, 관객은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호기심 이전에 오롯이 그 영화가 하는 영화의 일을 보기 위해 영화관에 간다. 영화는 영화의 일을 보러 온 관객에게 성실히 그 직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작품만의 의도를 슬쩍 손에 쥐어주면 좋을 일이다. 영화를 보러 갔는데, 박열을 데리고 나올 수 있어야 함이다. 퇴장하는 관객들의 곁에 박열과 후미코가 자리할 수 있기를, 적어도 그들의 정신만큼은 전해지기를 바라본다.


** 영화 <박열> 촬영 현장



참고

¹

 - 조선닷컴, 지민경 기자, 2017년 6월 1일 자, “'박열' 이준익 감독 “실제 사건과 90% 이상 일치하는 작품"”

 - 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01/2017060102562.html


²

 - 뉴스엔, 이소담 기자, 2016년 1월 28일 자, “‘동주’ 이준익 감독 “영화 70%가 팩트, 허구는 30%뿐””

 - newsen.com/news_view.php?uid=201601281645119610


³

 - 2017년 6월 13일 <박열> 언론 시사회, 서울 동대문 메가박스

 - https://www.youtube.com/watch?v=_ONGmiF8x48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네이버 영화, <박열> (Anarchist from Colony, 2017) 포스터

- 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55716


*, **

 - 네이버 영화, <박열> (Anarchist from Colony, 2017) 포토

 - http://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155716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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