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Jul 02. 2017

사랑한다면 미자처럼 _ 영화 <옥자> 리뷰

예순아홉 번째 지난주




감독의 이름


 세상은 고르지 않다. 높다가도 낮으며, 뜨겁다가도 차갑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자리는 좁고 한정되어 있다. 그 좁은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은 소위 ‘대중’으로부터 사랑, 부러움, 시기 등의 다채로운 시선을 받는다. 유독 빼어난 사람은 더 큰 무대로 옮겨 가기도 하는데, 그러자면 그 대상을 향한 다양한 시선과 말들은 증폭된다. 대체로 이와 같은 사람은 시각적으로 높은 노출 빈도를 지닌 일을 하는 이들이다. 배우, 가수, 운동선수 등 대중의 눈에 잘 띄는 직업적 특성이 그 기반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영화감독이라면…? 분명 영화감독이라는 직업군에게 명성을 크게 얻을 자리는 더욱 한정되어 있을 터인데, 분명히 그와 같은 이가 있다. 대중적이지만, 적절히 논쟁적인 바로 그가 돌아왔다.


 생각해보자. 감독의 이름을 보고 영화관을 찾는 관객은 얼마나 될까? 반대로 그런 감독은 얼마나 될까? 한국 영화 시장으로 한정시켜보자면, 극히 한 손에 꼽을 정도인 감독 중 한 사람의 영화가 지난주 관객과 넷플릭스 회원을 찾아왔다. 서둘러 예매를 하고 일찌감치 영화관에 도착했다.


※ 예순아홉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에서는 영화 <옥자>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영화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은 읽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공장식 도축과 공장식 상영은 무엇이 다른가?


 좋은 영화 비평이란 영화 그 자체에 오롯이 한정하는 것이고, 명분이 있거나 조금 여력이 닿는다면 감상자의 시선까지 포괄하여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영화에서의 일들에 빗대어 스크린 밖의 사태를 늘여놓는 영화 비평은 그저 영화를 빌려온 것으로 여겨져 꺼려지고는 한다. 그런데 <옥자> 비평의 시작은 옥자와 미자(안서현 분)의 행복한 산골에서의 나날들일 수 없게 되었다. 영화를 영화관에서 볼 수 없는, 더 정확히 말하면 한정된 스크린과 한정할 수 없는 기기들로 동시에 플레이되는 새로운 논쟁의 지점으로부터 영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옥자>는 적어도 감독 스스로는 강력하게 믿고 있듯, ¹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그러면서도 공장식 도축이나, 희생을 전제로 태어난 동물의 존재라는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대형 자본이 시장을 독점하여 한 마리의 동물을 부위별로 내어놓는 방식과, 대형 멀티플렉스가 영화 시장을 독점한 채 소위 돈이 되는 영화만을 골라서 틀어주는 모습이 너무 닮아서이었을까? 홀드백*이 없는 <옥자>는 대형 스크린을 통해 관객을 만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공장식 도축을 꼬집는 영화를 공장식 상영을 하는 영화관이 틀어주지 않자, 추억 속 영화관이나 각기 나름의 개성을 지닌 소규모의 영화관들은 오랜만에 대목을 맞이했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로 누리는 독립 영화관의 호황이 오랫동안 지속될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행위마저 개인의 시대에 맞게끔 축소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면,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성격이나, TV 구매를 위해 투자하는 비용 등이 더욱 지속 가능한 변화 양상으로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건 <옥자>는 시작되었다. 영화관과 넷플릭스에서! 왁자지껄하게! 혹은 옥자지껄하게!


* 한 편의 영화가 다른 수익 과정으로 중심을 이동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 또는 공중파의 본 방송 이후 다른 케이블 방송에서 재방송되기까지 걸리는 기간 ²







사랑한다면 미자처럼!


대중적으로! 하지만 적절히 논쟁적으로!


 <옥자>는 사랑 이야기다. 감독이 반복적으로 밝히고 있는 ¹ 진단에 충실히 하고자 함이 아닌, 실제 감상을 통해 느낀 바이다. 사랑이 한 편의 영화가 될라치면 이를 서사 구조에 얹어두어야 할 터인데, 뻔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장치로 방해꾼의 존재가 있다. <옥자>는 주된 전개의 뼈대를 미자와 옥자의 사랑으로 구축한 후에, 이를 방해하는 세력을 논쟁적인 대상으로 설정하며 영화 자체가 ‘육식이 좋은가? 나쁜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확보한다. 그러면서도 옥자라는 생명체의 태생적 운명과 방해자의 존재를 연결하며 또 전혀 무관한 사태는 아니라는 특유의 거리감을 과시한다. 그야말로 대중적이면서도 적절히 논쟁적인 지점에 맞춰진 무게추는 좀처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로 <옥자>는 전개되는 것이다.


 논의해볼 만한 주제이다. 당장 육식을 끊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생각해볼 만한 지점의 문제이며, 나름의 방책을 논의해볼 수도 있다. 이미 고기에서 제공하는 영양과 맛을 살린 식품에 관한 연구나 실험에 관한 기사를 접한 바 있다. <옥자>도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한 수준으로는 다루지는 않는다. 도살장 장면만 해도 감독이 밝혔듯, ³ 실제 도살장과 가공공장의 모습은 영화에서 보다 훨씬 더 참혹하다고 한다. 감상자에 따라 고기를 다시 찾게 되는데 걸리는 시간에는 차이가 있겠으나, 어쨌건 이것이 문젯거리가 될 수 있겠다는 지각이나 인지의 차원에서 발휘되는 성과는 쉽게 무시할 수 없겠다. 특히 비교적 공장식 도축의 잔혹성 등이 뉴스거리가 된 서구사회와는 달리, 이 같은 문제의식을 최초로 접했을 한국의 관객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더 큰 시사점으로 제공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영화의 사명 중 하나라고 믿는다. 무엇보다 문제를 다루는 감각의 적절성이 이처럼 탁월하다면 또한 더 말할 나위는 없겠다.


*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통역은 신성하다. 그리고 잔인하다.


 소통은 이제 화두조차 아니다. 차라리 통역이 화두가 되는 세상이 올법하다. 그러니까 사람을 거치지 않는 통역의 세상은 얼마가 걸릴지 모르지만 분명 도래할 것이고, 관련된 이슈들이 소통의 대상이 될 것이다. 마침 영화 <옥자>에서는 사람이 하는 통역에 의도성이 개입하는 장면이 나온다. 의도적으로 거짓되게 전달된 통역은 영화의 무대를 서울에서 뉴욕으로 옮겨 놓는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통역이 있다. 바로 옥자와 대화를 나누는 미자이다. 미자는 거의 옥자의 귓속에 들어가다시피 하며 옥자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옥자는 미자쯤은 입안 가득 넣을 수 있을 법한 거대한 입으로 미자의 귀에 대고는 소곤거린다. 그런데 그렇게 소통한 둘의 대화가 직접적으로 세상에 통역되어 전달되지는 않는다. 관객은 궁금할 법도 하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옥자가 미자에게 건넨 말은 그저 미자의 표정을 통해 미미하게 인지할 뿐이다. 정작 주목할 바는 영화 속 인물들은 그 누구도 둘이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묻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통역은커녕, 아버지나 언니 같은 가족 간에도, 동물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폭력이 간에도, 쫓기 바쁜 인기와 자신의 욕망 간에도 소통이 안 되는 어른들은 미자와 옥자의 대화가 궁금할 리가 없다. 그렇게 가장 통역되어야 할 둘의 대화가 둘의 세계를 넘지 못하는 지점의 갈등은 <옥자>의 사랑과 방해의 두 축을 매개하며 영화 내내 이어진다.


 통역은 창의를 허락하지 않기에, 오롯이 못 하는 길만이 열려있는 참으로 잔인한 일이다. 오직 사실 그대로를 옮겨야만 하는 터라, 어떤 좋은 미사여구를 첨언하여도 그것은 잘못한 통역이 된다. 그렇기에 통역은 잔인하면서도 신성하다. 마침 영화는 엔딩크레딧에서 확인할 수 있듯 거의 한미 합작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치 배우와 스태프진의 구성은 한국과 미국의 영화인들이 합세하여 제작되었다. 현장에 함께하지는 않았으나, 공용어는 영어였을 것이고, ‘캄솨함믜다’ 정도가 인사말로 오갔으리라 짐작한다. 따라서 메가폰을 잡은 한국 감독과 외국 배우 간의 100% 전해지지 않았을 소통의 간극은 유명 배우의 개인기가 메워야 했음이 엿보이기는 한다. 마침 워낙 수준급의 배우들이라 영화 전개에 이질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지만, 각 배우가 지닌 연기 내공과 봉준호 월드가 융화되었다고 말하기는 아무래도 어렵겠다. 도축장의 등장 이전까지 마치 한 편의 동화와 같은 파스텔톤이 이를 보정해주기도 하지만, 봉준호 월드가 다시금 월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면 조금은 더 진지하게 고려되었으면 하는 대목이었다. 통역은 신성하고도 잔인하기에…….


**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사랑과 성장이라는 통증


 사랑하는 옥자를 위해 질주하는 미자는 영화 <옥자>를 지탱하는 가장 견고한 뼈대이자, 에너지로 작동한다. 산골 소녀 미자는 서울에 가서도, 심지어 뉴욕에 가서도 고층건물을 보고 “우와”하며 탄성 한번 내지르지 않는다. 그야말로 미자에겐 오직 옥자뿐이다. 마침 미자와 옥자 이외의 사람들, 그러니까 어른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사람들이다. 마치 미자가 옥자만을 바라보는 것처럼, 돈이나 인기나 신념만을 위하여 질주한다. 이는 미자를 제외한 캐릭터가 영화적으로 소비되고 있다기보다는, 사실상 세계의 눈높이인 어른들의 시선과 미자의 그것을 대비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비교적 낮은 카메라 앵글은 영화 <옥자>가 바라보는 시선은 어른들의 그것이 아닌, 옥자와 미자의 눈높이임을 나타낸다.


 기실 <옥자>는 사랑 이야기이자, 미자의 성장기이다. 사랑하는 존재를 지키는 용기로 서울에도 번쩍 뉴욕서도 번쩍하는 미자는 난데없는 투쟁의 장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질주하고 또 질주한다. 그리고는 결국 어른들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이 슬픈 성장기를 성장기라고 불러야 할지 머뭇거려지는 것이 사실이나, 세상이 온전히 사랑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님을 알아버린 한 소녀의 처연한 눈동자는 분명 그저 행복하기만 하던 그때의 눈과는 다름이다. 마침 미자가 금돼지를 건넨 이후, 영화도 동화에서 현실로 한 걸음 내려온다. 그리고 끊임없이 아름다움과 잔혹함을 변주하며 관객의 머릿속 근육을 놓지 않던 <옥자>의 질주도 멈춘다. 그리고 사랑만으로는 사랑하는 존재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아버린 성장한 미자는 산속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럴 계획이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옥자>의 속편은 제작할 수도 없겠다. 혹시 새끼 돼지에게 옥자가 겪은 일이 똑같이 생길지라도 미자는 더는 달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이렇게 질문할지 모르겠다.


할아버지 금돼지 한 마리 더 있어요?


***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거장이라면 무릇


 <옥자>에 관한 기사와 자료를 접한 초기, 도무지 어떤 내용인지 감도 잡지 못했을 때도 반드시 관람하리라 한 동인은 오직 감독의 이름이었다. 봉준호라는 이름은 이미 그의 신작을 세계가 주목하는 자리에까지 올라있다. 물론 <옥자>가 아쉽다는 평도 들린다. 부정적인 소감은 대체로 국내파로 구성되었을 때에 비해 대사를 통해 전달되던 봉 감독 특유의 장기가 실종되었으며, 몇 안 되는 아시안 영화감독을 추종하는 유명 배우들이 단체로 카메오로 출연한 양 소비되고는 사라지더라는 정도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지점들은 봉준호라는 영화감독이 세계무대로 지평을 넓히며 어느 정도는 타협했어야 했던 지점들에서 발생했으리라고 여겨지는 것들이다. 마침 첫 월드 프로젝트였던 <설국열차>가 다소 난해한 주제로 많은 영화팬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사실을 상기하자면, <옥자>에서의 타협은 분명 이해해줄 만한 명분은 되겠다.


 그가 세계시장에 영화를 내어놓으며 어느 정도 타협했어야 하는 지점들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옥자>가 거장의 칭호를 새겨나가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훼손할 정도의 작품이 아님에는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판단은 아름답고도 잔혹한 우리네 세상의 모습을 균형감각 있게 담아내었음에 근거한다. <옥자>는 아름답지만 잔혹하고, 우울하다가도 희망적이다. 이것은 육식을 하거나 하지 않음의 문제가 아니다. 사랑 그대로의 사랑을 위하여는 돼지가 필요함을 알아버린 미자의 슬픔이자,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새끼 돼지의 등장과 존재에 관함이다. 왜냐하면, 이 모두는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도리어 주목해야 할 지점은 새끼 돼지이다. 그토록 참혹한 도살장의 대기열에서도 몰래 새끼를 탈출시키는 돼지들과, 이제는 조용히 우리 안을 서성거리는 옥자의 옛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그저 마냥 신이 난 새끼 돼지의 모습은 거장이라면 무릇 영화를 통해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회에 부응하며, 감상자를 무던히도 만족시켰다. 그래서 감상자에 따라 해피엔딩일 수도, 새드엔딩일 수도 있는 <옥자>의 결말에 있어, 유독 마지막 신에 비친 새끼 돼지의 엉덩이가 난 그렇게도 귀여웠나 보다.


**** 영화 <옥자> 촬영 현장 사진




참고

¹

 - 중앙일보, 김호정 기자, 2017년 5월 15일 자, “'옥자'로 칸 가는 봉준호 감독 "나의 첫 사랑 이야기"”

 - news.joins.com/article/21574152


²

 -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홀드백>

 - terms.naver.com/entry.nhn?docId=1943461&cid=43667&categoryId=43667  


³

 - 조선비즈, 김지수 문화부장,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내 영화의 장르는 '봉준호'... 관객에게 아름다운 상처 안기고 싶다"”

 - 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30/2017063000815.html



이미지출처

커버 이미지

 - 네이버 영화, <옥자> (Okja, 2017)

 - 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43435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및 현장 사진

*, ****

 - 네이버 영화, <옥자> (Okja, 2017)

 - 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143435


**, ***

 - imbd, Okja (2017), Photo Gallery

 - mdb.com/title/tt3967856/mediaindex?ref_=tt_ql_pv_1

매거진의 이전글 감독의 일과 영화의 일 _ 영화 <박열> 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