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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Jul 23. 2017

압도라는 미학 _ 영화 <덩케르크> 리뷰

일흔두 번째 지난주




호시절이라는 변명, 그리고 한 편의 영화


 깊은 여름이다. 절정을 막 지난 듯도 싶으나, 그 헉헉함의 골이 너무 깊은 탓으로 빠져나오는 중에도 많은 땀을 흘려야겠다. 더위가 심리의 문제는 아니겠으나, 일종의 방편으로 시원함을 상기하려 해본다. -애쓴다.- 마침 지난겨울, 두 겹의 양말과 털 신발에도 멀어져 가던 발가락, 그 끝의 감각을 되뇐다. 또한 마침, 지난겨울의 이야기가 나왔기에 -혹은 유도하였기에- 달라진 것이 기온만은 아님을 역시, 되뇐다.


 호시절이다. 아! ‘상대적’이라는 수식어가 빠졌다. 상대적이나마, -분명- 호시절이다. 여전한 것들은 여전하여 ‘탁’하니 버티고 있는 지경도 있지만, 비문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시간으로부터는 -또한, 분명- 탈출하고 있다. 그래서 또 영화 얘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기대고 있는 언덕은 둘이다. 하나는 -전술하였듯- 상대적 호시절이라는 배경이고, 다른 하나는 이 영화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대체 무슨 영화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느냐는 당위의 차원이다. 지난주의 일이었다.



※ 일흔두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에서는 영화 <덩케르크 (Dunkirk, 2017)>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영화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전쟁영화가 아닌 재난영화?


 10편째 장편이다. 플롯의 마술사라 불리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내어놓는 꼭 10편째 장편이라 한다. 그간 지구적으로 이름난 이 감독의 시선은 다양하게 펼쳐진 바 있다. 인간 내면, 슈퍼히어로, SF 등으로 활보하던 행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창작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10번째 장편인 <덩케르크>는 2차 세계대전 중의 실화에 기대고 있다. 꿈과 환상의 세계로부터 지면으로 안착하는 방식이 궁금해지는 작동은 자연스럽다.


 실화를 배경으로 하였으니 배경 지식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좋을 일이지만, 없다고 한들 감상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명백하게 하나의 이야기만을 하기 때문이다. 바로 살아서 집에 돌아가는 일이다. 집으로 가려면 살아야 한다. 하지만 배는 한정되어 있고, 하늘에서는 불시에 포탄이 쏟아진다. 줄은 길게 늘어서 있고, 차가운 바다는 쉬지 않고 시체를 모아 온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머리를 써서 행렬을 앞지르건, 다른 나라 병사 행세를 하건, 그저 운이 좋건 간에 어쨌든 저 배에 몸을 실어야 한다. 그런데 또 그 배가 안전하게 바다를 건너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처럼 영화 <덩케르크>는 살아야 한다는 유일한 목적만을 던져둔 채, 이를 가로막는 요소는 부지기수로 배치해둔다. 이로써 관객을 압도할 수 있는 배경을 구축하는 것이다.


  살아야 한다는 목적, 즉 생존의 차원으로 시선을 좁히는 시도는 타당한 감상자의 태도로 여겨진다. 그런데, <덩케르크>는 분명 전쟁으로 인한 잔혹성을 그리고 있지만, 배경을 포탄이나 어뢰가 아닌 괴물이 내뿜는 불이나, 슈퍼히어로물의 악당이 쏘는 총탄이나, 심지어 자연재해의 어떤 현상으로 대체한다 하여도 큰 이격이 발생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곧 이 영화를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을 사실감 있게 담아낸 전쟁영화로 규정하는 일이 당연한 듯하면서도, 다소 어색함을 느꼈다면 그 이유가 이 지점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상의 해석에만 근거하자면, 놀란 감독은 2차 세계대전 중에서도 손꼽히는 처절한 생존 투쟁의 공간과 군사 작전을 손쉽게 빌려와, 긴장감의 도구로 이용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과연 이와 같은 진단의 전개는 타당한가? 그리하여 <덩케르크>를 오롯이 생존만을 그린 '재난영화'로 규정함은 역시, 타당한가?


* 영화 <덩케르크> 스틸컷





재난영화가 아닌 전쟁영화!


 분명 생존과 긴장은 영화의 가장 단단한 중심축을 형성한다. 하지만, 1940년 황량한 프랑스의 해변을 굳이 커다란 카메라에 담아 전하고자 했던 연출에의 의지는, 전쟁의 참혹성과 무관할 수 없다. 특히, 전쟁이라는 상황은 그 어떤 여타의 재난과는 분명히 다른 속성을 지니는 탓이다. 참전한 병사들은 한 인간이면서, 군대라는 조직에 속해있는 군인의 신분이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그들은 줄을 서서 배를 기다려야 하고, 마음껏 고통스럽다고 소리칠 수도 없으며, 상급자가 배에서 내리라면 내려야 한다. 생존했다고는 하여도, 철수한 군인은 패배자라는 걱정에 미리 고개 숙인다. 여기서 충돌이 발생한다. 인간의 생존 욕구와 군인이라는 신변상의 제약이 마찰음을 내는 것이다. 여타 재난영화의 속성과 닮았다 하여 이를 그 하위에 둘 수 없음이다. <덩케르크>가 단순한 생존 활극이 아닌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더 아픈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전투기가 바람을 가른다. 조종사의 긴장한 눈빛과 어디선가 들려오는 적기의 소리, 포탄을 쏘고 또 맞는 소리, 그리고 엔진이 꺼져갈 때의 막연함과 하늘에 있어야 할 것이 바다로 향하는 처절함은 이 영화가 명백히 전쟁영화임을 상기시킨다. 스핏파이어와 ME109기가 벌이는 공중 전투씬 이외에도 당시의 모습을 최대한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던 노력은 전쟁의 당시로 관객을 부단히도 잡아끈다. 영화적 긴장과 맥을 같이 하는 고증이 이 영화를 전쟁영화로의 규정을 넘어, 손색이 없는 지경으로 이끄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을 전쟁영화로 바라봐야 하는 근거는 하나 더 있다.


 그간 놀란 감독은 긴장감을 극대화한 시점에서 영화를 끝내버리는 기묘한 방식을 구사해왔다. 이 매조지음이 한스 짐머의 음악이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시점과 동일하게 이루어지며, 보는 이로 하여금 쿵쾅거리는 심장을 그대로 부여잡은 채 귀가하게 하곤 하였음이다. 그런데 <덩케르크>에서는 전장을 빠져나온 이후의 모습들도 전해진다. 그리고 그 힘겨운 귀가의 끝은 비난이 아닌, 격려였다. 패배하고 살아 돌아온 우리에게 어찌하여 호의를 베푸냐는 병사의 질문에, 담요를 나눠주는 눈먼 노신사는 그저 이렇게 답한다. “Well done.”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히틀러의 진격 중지 명령이 분명 한몫했겠으나, 덩케르크에서의 탈출은 전쟁의 비극을 최소화하고, 훗날 노르망디에서의 승리로 이어지게 되었다. 곧 이 영화는 패자가 물러났다는 실패의 영화가 아닌, 종국의 승리와 연계되는 지점에서 생존하고자 했던 목숨들을 최대한 구해낸 ‘승리의 영화’인 것이다. 전쟁에서의 승리가 적을 무찌르는 것에 있지만은 않다는 교훈에 충실하자면, <덩케르크>는 최후의 결론까지도 영락없는 한편의 ‘전쟁영화’였다.


** 영화 <덩케르크> 스틸컷





관객을 압도하는 영화


 다시 이 다재다능한 감독의 필모그래피로 시선을 돌린다. 명백히 이 감독의 연출에 있어 가장 두드러지는 취미는 플롯을 섞어 배치하는 기술에 있다. 설령 <덩케르크>를 전쟁영화로 보건 그렇지 않건, 이처럼 뻔한 서사로 이토록 숨 막히는 긴장감을 담아냄은 그가 지구적 차원에서 손꼽을 만한 이야기꾼임을 다시금 증명해 보인다.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자.


 세 가지 시선이 있다. 연합군 병사의, 민간인 선박의, 전투기 조종사의 시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각기 일주일, 하루, 그리고 한 시간이라는 다른 시간의 폭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시간들은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점점 더 잘게 쪼개지며 엮인다. 낯선 시도는 아니다. <메멘토>와 <인셉션>에서 보여준 중첩된 시간과 뒤섞인 플롯을 통해 이미 목격한 바 있음이다. 그런데 <덩케르크>에 이르자 이 같은 시도는 훨씬 섬세해졌으며,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방식도 빼어나 졌다. 덕분에 관객은 세 가지 장면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건, 장면 장면마다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이 장면에서는 이 긴장을 했다가, 또 다른 공간에서는 또 그 공간의 긴장을 해야 한다. 보는 이를 세 지점에서 벌처럼 쏘아대니, 현기증이 날만치 압도당할밖에, 달리 도리가 없음이다.


 <덩케르트>가 관객을 압도하는 방식은 단지 플롯의 역전과 배치에만 있지 않다. 마침 필자는 서울 용산에 새롭게 단장한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아이맥스관에서 관람할 수 있었는데, 영화가 시작하자 어두운 화면에서 병사들의 뒷모습이 나오며 스크린에서 빛이라는 것이 뿜어져 나왔다. 그때, 관객석에서는 얕은, 그러나 분명히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얼마 후 총소리가 들려올 때, 마치 함께 덩케르크에 있는 양 느낀 관객들은 일제히 움츠렸다. 그리고 영화는 시종일관 드넓게 펼쳐진 바다와 하늘과 이를 가르는 전투기와 선박들, 그리고 바다를 향한 잔교와 해변에 늘어선 병사들의 행렬을 비추었다. 그리고 병사들의 헐떡임과 전투기의 엔진 소리 그리고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시계 소리가 섞인 배경음악으로 쉽게 관객을 놓아주지 않았다. 상업영화 시장에서 아낌없는 투자를 받는 세계적인 감독의 작품을, 역시 세계적으로 손꼽을 만한 시설의 영화관에서 감상할 수 있음은 -다소 씁쓸한 뒷맛이 없지 않으나- 충분히 매력적인 경험임에는 틀림없음이다.


*** 영화 <덩케르크> 스틸컷







압도라는 미학


 ‘압도당함’은 분명 수동적인 입장에서 겪는 반응이다. 그런데 어떤 체험이 너무 압도적이면, 살기 위한 근육들이 움찔거린다. 좋은 압도건 나쁜 압도건, 이로 인해 삶을 평온하게 유지하던 항상성이 깨지기 때문이다. <덩케르크>의 병사마냥, 생존의 문제가 된다. 곧 능동적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 사실을 영화관 객석에 앉아 되뇌었다면, 이것을 단순한 압도라고만 정의할 수 있을까? 분명 처음 겪는 강도의 압도였으며, 영화관을 나서고도 한참이나 울렁이며 어지러웠다. 그리고 아직도 이 매력적인 압도로부터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쯤 되면 이는 단지 감상자를 내리누르는 압도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어떤 미적인 차원으로 확대한다고 단언하여도 좋지 않을까? 압도당한 자가 미적인 쾌감에 젖었으니, 이 새로운 명명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바로 이 한 편의 영화를 ‘압도라는 미학’으로 규정하는 일 말이다. 그가 언제건 다시 찾아와 나를 마음껏 내리눌러주기를 처연히 기다릴 터이다.


**** 영화 <덩케르크> 촬영 현장에서 Christopher Nolan 감독과 Kenneth Branagh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네이버 영화, <덩케르크>, 포스터

 -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46480


* ~ ****

 - imdb, Dunkirk (2017), Photos

 - http://www.imdb.com/title/tt5013056/mediaviewer/rm3533188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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