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네 번째 지난주
‘쉬움’ 앞에선 머뭇거린다. ‘쉬운 일들’ 앞에 서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는 비단, 쉽게 이루어지는 모든 사태가 잘못되었으리라는 확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차라리 ‘무언가 빠뜨린 것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으로부터 비롯하는 증상이라 여겨왔다. 하지만 이런 나 역시도 ‘쉬움’을 경계할 뿐, ‘더 쉬움’의 유혹 앞에서는 언제나 작았다. 오늘의 나는 더 쉽게 가려다가 이도 저도 되지 못한 서른여섯 해의 결과로써 덩어리져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의식적으로 가장 경계하는 ‘쉬움’의 대상은 존재한다. 바로 ‘사람’이다.
쉽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관계 이전에 이미 나만큼의 존엄을 지닌 존재가 바로 타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낮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설정해두고 쉽게 대하는 자들의 행태 앞에서는 언제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난주, -사실은 훨씬 이전부터- 우리 사회 구성원 몇몇의 소위 “갑질”이 구설에 오르내렸다. 이에 대해 한마디를 하려니, “나는 잘하는데 당신들은 아니군”의 방식으로 논지가 전개될 수밖에 없고, 갑질하는 자들을 질타하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쉬운 일’이라는 사실 앞에 한참을 머뭇거렸다. 내가 완벽하게 잘하고 있기에 내뱉는 언설이 아니다. 그저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에 여지없이 쉽게 빠져버리는 경우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내가 잘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갑질”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뉴스가 아닌데, 어째서 자꾸만 들려오는 것일까? 첫 번째 이유로 갑질하기에 최적화된 구조를 엿본다.
자원을 더 가진 자가 계약관계에서 갑에 놓이는 자체는 문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어쩌면 일종의 역할 규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이름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문제는 ‘갑’ 그 자체가 아닌 ‘갑질’에 있겠다. 그런데 ‘갑질’을 하려면 ‘갑의 자리’에 앉아야 한다. 갑의 자리는 많지 않다. 공급이 적은 갑의 자리에 많은 사람이 앉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압축적인 성장과 한정된 자원이라는 우리의 지난 시간 속에서, 갑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건 치열했을 삶들을 생각한다. 좁디좁은 문을 통과했다는 자기만족은 이를 자리 이름 이상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을 부추겼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그 허영의 빈 마음속으로 갑질의 포자가 흩날리다 안착했을 확률을 넉넉하게 잡아본다. 소위 논쟁 중에 들려오는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언사는 이 같은 마음들에 자라난 버섯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갑질하기 쉬운 구조는 이것만으로 완성될 수 없다. 갑질도 관계의 문제여서, 당하는 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 의문이 든다. 달아나면 될 일 아닌가? 모든 갑의 자리에 앉은 자의 마음에 갑질의 포자가 번진 것은 아닐지니, 갑질하는 자를 버리고 다른 자리로 옮기면 그만이지 않을까? 그런데 사실 이렇게 물어오는 이는 잘 없다. 이 질문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얼추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 고도성장은 끝나고 경쟁은 더 극심해져 지금 세대가 더 심한 갑질의 세대가 되리라는 염려 따위는 할 필요도 없이, 당장 일자리를 구하기도 난망할뿐더러, 구했다고 해서 마음대로 옮기는 일은 정말이지 꿈만 같다. 이 같은 구조는 사회 초년생에게만 국한되지도 않는다. 이 땅의 수많은 관계, 큰 기업과 작은 기업, 또 그 작은 기업과 더 작은 기업, 하청에 하청, 돌려지는 사람들 모두가 이 구조 속에 있다. 이 관계에서 아래에 놓인 그 누구도 갑질이 싫다고 쉽게 떠날 수가 없다. 어떻게 잡은 밥줄이냔 말이다. 갑질하는 자들은 이 같은 생리를 어렵지 않게 알아채고는 쉽게 옭아맨다. 소위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다.”라는 말들은 이 같은 구조를 방증한다. 문제는 이 구조가 끊임없이 이 같은 관계를 생산하고 있다는 데 있으며, 쉽게 멈출 뾰족한 방도 또한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올여름은 유난히 덥다.
모든 노력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덕망 있는 자리에 오른다 하여 갑질을 자행하지는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 사회에는 훌륭한 이들이 훨씬 더 많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갑질하기 쉬운 구조라는 외연으로부터 한 발 더 들어가 본다. 그 속에 있는 울타리는 우리가 사는 모양을 하고 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 말이다. 한때 이 같은 모습은 친지와 이웃 간에 돈독한 정을 나누는 것으로 여겨지며 권장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내부로 들어가 보면 이들을 잇고 있는 뚜렷한 선들이 보인다. 학연, 지연, 성별 등으로 일컬어지는 것들 말이다. 이 선을 잘 부여잡고 있으면, 쉽다. 유달리 노력하지 않아도 큰 이득을 취할 수 있다. 어느샌가 집단은 매우 중요한 존재가 된다. 쉽게, 아주 쉽게 말이다. 이 쉽고도 고귀한 관계망에서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방식은 충성이다. 넓게는 국가나 민족, 좁게는 회사나 부서에 대한 충성을 들 수 있다. 이 충성심의 발휘는 별달리 고민할 필요도 없으며, 도리어 이에 대한 이의 제기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누가 애국자를 탓하는가? 누가 애사심이 빼어난 자를 나무라는가 말이다.
속한 집단에 대한 충성이 갑질로 이어지는 전개는 그 집단을 사랑하는 방식과 닮아있다. 가장 쉬운 길을 찾는 것이다. 들이는 노력 대비 가시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시도는 단연 아래의 존재를 쥐어짜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교묘하게만 활용하면 별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집단과 집단주의는 이 같은 작은 갑질들에 최적의 은둔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작은 갑질의 주인공들은 손쉽게 쌓아온 관계망 뒤로 슬쩍 숨는다. 숨기가 어렵지도 않다. 누구나 집단을 사랑해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갑질을 고발하는 이는 집단에 분란을 일으킨 죄목으로 내몰린다. 앞서 논한 바처럼, 떠난다고 하여 그곳이 마냥 천국이리라는 보장도 없다. 전장도 퇴로도 없다.
그런데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개인들이 일어나고 있음이다. 이를 집단의 시대와 개인의 시대가 충돌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오늘의 우리에게 갑질 관련 뉴스가 들려옴은 개인들의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다. 그리고 마침 소셜 미디어가 대나무 숲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나마 작은 균열이 보이고 있다. 선선한 바람도 건듯 불어오고 있다.
우리 사회 특유의 구조적 특성과 집단주의라는 문화는 갑질의 탄생에 분명한 기저로 작동한다. 하지만 최근 전해지는 일련의 갑질은 사회 구조나 집단주의의 틀과는 또 다른 측면을 보인다. 단지 노력에 대한 보상심리나, 신분상의 이득을 취할 요량으로 무려 4성 장군이 병사를 쥐어짜지는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이 근거는 차라리 미성숙으로부터 찾고자 한다. 자신들을 위해 근무하는 공관병을 한 인간도 아닌, 한 명의 군인도 아닌 아예 일하는 낮은 계급의 존재로만 인식하였음이다. 굳이 언급하자면 노예의 수준으로 대했다고 전해 들었다. 인류 역사에 이 같은 일이 있었다 하여도 그 시간이 지난 지는 이미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어떤 미성숙은 인류 문명사의 진도에도 한참이나 쫓아갈 수 없음을 엿본다.
이 같은 미성숙이 사회구조나 문화와 아예 동떨어진 것도 아니다. 이처럼 인간의 문제에 대해 인류 평균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 자들이 살아가기에도, 이 사회의 발전상과 집단주의라는 문화는 아주 쉬운 배경이 되었을 터이니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사회적으로 단련시키지 않아도 얼마든지 높은 지위에 올라 타인을 아무렇게나 부릴 수 있는 사회에서 온전한 미래를 기대하기란 아무래도 어렵겠다. 해당 장군의 건은 크게 이슈가 된 덕분에 처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갑질이 잘못을 저지른 이를 벌주고, 공관병이라는 보직을 없애는 것만으로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런 이는 그런 이대로, 또 그렇지 않은 이는 그렇지 않은 이대로 갑질하기 쉬운 공기를 나누어 마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바람은 또한 얼마나 쉬운가!
지난주 또 한 건의 “갑질”과 관련한 뉴스가 있었다. 어느 대학 교수가 자신이 계산하는 동안 학생들이 신발을 돌려놓고 나가지 아니함에 대해, 몰염치하고 예의 없다는 내용으로 자신의 소셜미디어상에 글을 올린 사항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서 학생들이 교수가 계산하는 동안 신발을 돌려놓지 않는 행동에 대해 “예의 없다”라고 단언한다. 당장 그의 언짢은 기분이 전해진다. 물론 신발을 신고 식당을 나섰겠지만, 영 기분이 찝찝하였던 모양이다. 저렇게 글까지 올린 것을 보면 말이다. 낮은 자존감은 쉽게 상처받는다. 늘 “내가 무려 교수인데”라고 되뇌는 마음에는 그만치의 대접을 받지 못한 모든 순간이 상처일 것이다. 몸만 커져 버린 텅 빈 마음을 본다. 그리고 예의를 생각한다.
예의를 생각하자니 우선 그가 학생들을 같은 학문을 하는 동반자로 여기고 있는지를 묻고 싶다. 아마 아닌듯하다. 좀 양보하여 같은 학문을 하는 동반자 의식이나 예의까지는 아니더라도, 학생들이 자신의 신발까지 신기 편한 상태로 해두지 않았음에 화를 내는 태도에 대해, 인간에 대한 예의를 묻고 싶다. 이는 조금만 확장하면 인간에 대한 예의로 그치지도 않는다. 그렇게 교수의 신발을 기꺼이 돌려놓은 학생들이 과 후배에게나 사회에 진출한 뒤에 아랫사람을 대할 때, 자신이 해온 그 “예의”라는 것을 받고자 함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라는 데에 반 이상의 예측치를 부여한다. 갑질이 갑질을 낳고 갑질이 갑질을 닮는 무한 갑질 사회에 기여한 바, 그는 사회에도 예의가 없었음이다. 지금 도대체 누가 예의가 없는가?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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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일보, 한준규 기자, 2016년 4월 8일 자, “‘갑질 매뉴얼’ 정일선 현대 비앤지스틸 사장 "머리 숙여 사과"”
- http://www.hankookilbo.com/v/2be8848eb9ac4a72b77b0463d5bbe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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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경제, 이영재 기자, 2017년 8월 6일 자, “'공관병 갑질' 의혹 박찬주 대장 전역 임박… 군 수사 속도”
-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708060181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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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디지털이슈팀, 2017년 7월 28일 자, “교수 신발 정리 안했다고 "몰염치" 소리 들은 학생들”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28/20170728020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