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한 번째 지난주
오늘은 어찌하여 오늘일까? 대체로 오늘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다가오거나, 이미 와 있다. 또 금세 지나간다. 그런데 좀 ‘특별한 오늘’이 있다. 그저 오는 날이 아니라 손꼽아 기다린다든가, 쉽게 흘려보낼 수 없어 조금이나마 마음을 더한다든가 하는 그런 오늘이 있다. 다음 주 중의 어느 하루는 그런 ‘특별한 오늘’이 될 것이고, 지난주는 그 오늘을 위한 오늘들로 채워진 마지막 한 주였다.
정말이지 오래 전의 일만 같다. 하지만 분명히 2017년 5월 9일을 ‘특별한 오늘’이 되게끔 한 시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작동의 근거가 된 중차대한 날이 그 물리적 거리보다 멀게 느껴진다면, 기억을 끄집어낼 필요가 있다. 상기할 필요가 있다. 2017년 5월 9일은 특별하디 특별한 오늘이기 때문이다.
하늘을 바라보던 고대 이집트인들은 한 해가 365.25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들은 일 년을 365일로 하고 이를 다시 30일씩 12개월로 나눈 후, 따로 5일을 덧붙였다.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좀 더 정교한 달력이 만들어졌으나, 대체로 그 일수는 30일가량이었다. ¹ 그렇게 한 달이 정해졌다. 한 달은 긴 시간일까? 짧은 시간일까? 사람에 따라 그리고 처한 상황에 따라, 길게 혹은 짧게도 느껴질 수 있는 시간 일지다. 그런데 2017년 5월 9일은 국정농단의 주범이 구속된 지 한 달하고도 9일 만이며, 탄핵으로 궐위가 된 지는 정확히 두 달이 된 때이다. 먼 과거일까?
사실, 사건 간의 물리적 거리가 얼마나 멀거나 가까운지가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무게를 두어야 할 대목은 이들이 명백한 인과관계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한 달이나 두 달이 길건 짧건, 2017년 5월 9일에 잡힌 갑작스러우나 중요한 약속이 무엇에 근거했는지를 따져볼 필요는 명징하기 때문이다. 굳이 상기하자면 처음으로 촛불이 타올랐던 2016년의 10월 29일로부터의 192일을 언급하고 싶다. 그러니까 달로 환산하면 6달이 조금 지난 때이다. 역시 그 기간이 짧거나 길다는 인상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주지할 바는 그 날부터 타오른 촛불이 주요한 숙제들을 이행한 이후에, 새로운 시작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계속해서 주시해야 할 숫자를 꼽으라면 ‘30’이다. 그런데 이것은 일수(日數)나 개월(個月)의 단위가 아니다.
세월호가 떠오르고 미수습자 수색이 한창인 지금까지도 명확하지 않은 어떤 오늘이 있다. 그 오늘은 참사가 발생한 오늘과 같은 오늘이나, 다른 공간이었으며, 사고에 대한 의문점 못지않게 가려져 있다. 당당하게 말하지 않으니 오히려 의혹은 커져만 갔고, 겨우 밝혀진 건이 미용사의 출입에 관한 정도였음에 허탈함을 넘어선 분노가 아직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당일 “세월호 7시간” 관련 문서를 대통령 지정기록물로 지정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대통령기록물로 지정되면 최장 30년 동안 공개되지 않는다. ²
사건은 하나였으나 이해관계는 그 사건에 얽힌 인간의 수만큼 펼쳐진다. 우두머리가 구속되었음에도, 아직도 그날을 감추는 것이 제 일신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자들에 의해 그날의 비극은 계속해서 날조되고 덮어지며, 이윽고 30년이라는 시간 속에 못 박혔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30년만큼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아릴지언정, 이 악랄함을 새겨둔 채 살아가야 한다. 누가 행정부의 수반이 되고 어떤 정부가 꾸려지건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저 봉인된 진실을 향한 시선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진실을 밝혀 희생자를 위로하여야 함은 물론, 이 땅의 올바름을 역사에 눌러 새겨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위해 그 기나긴 시간을 조금이나마 앞당길 수 있는 정치세력이 정권을 창출한다면 더없이 좋을 일이다. 앞장서서 진실을 향해 손을 뻗어줄 사람들의 시간을 바란다. 이제 이틀 남았다.
정작 이번 대선이 위에 열거한 숫자들로 기인했거나 앞으로도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함에도, 정작 주목받는 숫자들은 다른 것이다. 뉴스에는 연일 지지율이 쏟아진다. 누군가의 수치가 높았다가는 낮아지고 또 누군가의 수치는 박스권과 확장성과 같은 용어로 규정된다. 그마저도 공표 기간이 지난 이후에는 새로울 것도 없다. 그렇다 하여, '39%라는 지지율'보다 '39일 전의 회상'을 더 강요하고자 함은 아니다. 지지율은 통계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출발하여, 여론의 풍향계를 감지한다는 차원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정작 주목할 대목은 쏟아지는 지지율 속의 수치들이 2017년 5월 9일이 특별한 오늘이 되게 한 숫자들과 연관이 있는가에 있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으나, 연관성의 강요라는 지점에서는 물러서고 싶지 않다. 잠시 지난겨울의 광장으로 돌아간다. 광장의 목소리는 비단 정부 수장의 하야나 탄핵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간 누적된 사회적 병폐들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져왔다. 따라서 전 대통령의 구속으로 광장의 요구가 모두 수렴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지난 잘못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하여 촛불과 광장을 망각한 '미래'라는 외침은 공허하다. 그 어떤 내일의 희망도 오늘의 폐허 속에서 자라날 수는 없으며, 우리의 미래는 그냥 미래가 아닌 지난 시간의 과오를 극복하는 미래여야 하기 때문이다. 지지율은 광장을 기억하는가? 최종 득표율은 촛불을 기억할 것인가?
지켜볼 일이다. 광장이 투표장으로 이어지고, 촛불이 새날까지 밝힐 수 있을지를 지켜볼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련의 사태에 대한 관찰자인 동시에 주체이다.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도, 직접 움직여야 한다. 이 동력의 근간이 가깝게는 지난 시간의 기억과 향후에의 응시에 있다고 믿는다. 이에 근거하자면 기억할 시간이 며칠이 지났거나, 응시할 시간이 몇 년이 남았건 당신은 이를 온전히 극복한 채 새로운 내일을 이룰 수 있는 선택을 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발걸음을 옮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지하는 후보의 지지율 정도와 관계없이, 그것을 실현하거나 뒤엎을 수 있는 유일한 실천은 당신의 투표이기 때문이다. 통계라는 학문 혹은 기술의 발전이 실제로, 혹은 반대로 일어나게 할 수 있는 힘은 오롯이 당신의 근육에 있다.
모두 투표하려는데 괜히 이런다 싶다. 졸문 따위 사문 됨이 뭐 어떤가! 그저,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희망 대일 내일이 있었더면! 우리에게 우리의 희망 대일 내일이 있었더면!
참고
¹
- 천재학습백과, 백과 항목 중 “태양력”,
- koc.chunjae.co.kr/Dic/dicDetail.do?idx=8845
²
- 한겨레, 박수지 기자, 2017년 5월 3일 자, “황교안, 세월호 7시간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봉인’”
관련 기사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93361.html#csidx81004914c9b5afbb2be699410835247
³
- 김소월, <진달래꽃> (1925) 중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에서 표현을 빌림
(아래 시 전문 수록)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연합뉴스, 김주성 기자, 2017년 5월 5일 자, “'여행 가기 전 한 표 행사'”
- yonhapnews.co.kr/photos/1990000000.html?cid=PYH20170505298400013&from=search
*
- 뉴스 1, 박정호 기자, 2017년 3월 31일 자, “첫 여성 대통령, 첫 파면 대통령, 역대 세 번째 구속 대통령”
- news1.kr/photos/details/?2458011
**
- JTBC 뉴스룸, 윤설영 기자, 2017년 5월 3일 자, “[단독]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 7시간' 기록 30년 봉인”
- 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463646&pDate=20170503
***
- 뉴스 1, 사진공동취재단, 2016년 12월 3일 자, “광화문 일대를 밝히는 '촛불 파도'”
- news1.kr/photos/details/?2267919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김소월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 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 손에
새라 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 가나니, 볼 지어다.
희망의 반짝임은, 별빛의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느란 길이 이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 저 혼자…… 산경을 김매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