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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Sep 10. 2017

사랑과 사랑의 이면 _ 영화 <시인의 사랑> 리뷰

일흔아홉 번째 지난주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르윈_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 첫째는 세상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는 사람과…

진_ 그리고 루저?


 코엔 형제의 영화 <인사이드 르윈(Inside Llewyn Davis)> 속 대사이다. 이분법이라는 편리한 진단에 한 번쯤 따끔한 철퇴를 가하고 싶었던 주인공의 비꼬기는 이내, 자신의 비루한 상황을 등에 업은 반격에 휘청인다. 그런데 그의 문제 제기 자체는 다시 들여다 볼만하다. ‘모순 관계’로 중간 항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단둘만으로 나누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니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수조차 없다. 이 같은 시선은 자칫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만으로 나누면 간편하기는 한데, 무언가를 놓칠 수도 있다. 오랜 시간 단둘만으로 구성된다고 여겼던 ‘남과 여’, ‘입자와 파동’이 사회의식의 변천과 과학 기술의 발달로 “단둘”이라는 세계관을 내려놓아야 했음은 적절한 예이다.     


 한데 근래에는 영화 감상을 단 두 가지 시선으로 정의하는 방식이 유행이다. 에둘러 말할 것도 없이 그 주인공은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로, 이곳에서는 비록 전문 평론가가 메긴다고는 하나 ‘Fresh'와 'Rotten'으로 구성된 감상만으로 영화를 평가한다. 이를 빌려 “로튼 토마토 지수 00%”라는 홍보문구는 이제 익숙한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단 두 가지 감상만이 허락된 평가의 세계에서, ‘좋았으나 아쉬웠던’, ‘나빴으나 빛났던’ 감상들은 갈 곳을 잃는다. 당장 지난주에 시사회로 찾아온 어떤 영화만 해도, 좋기도 하였으나 분명 나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감상의 차이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인식의 다름에서 기인하였음에 흥미롭기도 하였다. 그대는 좋은가, 나쁜가? 혹은 어떠한가?




 - 일흔아홉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에서는 영화 <시인의 사랑>을 다루었습니다.

 - 본 리뷰는 영화 <시인의 사랑>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므로, 영화 내용에 대한 사전 정보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영화 감상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아직 개봉 전인 좋은 작품을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설레이는 소년처럼


 데뷔작은 두렵다. 그리하여 인간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모든 예술 활동은 그 두렵다는 첫걸음에 잘 안 보이는 남의 심사가 아닌, 자신을 투영한다. 영화 <시인의 사랑>은 김양희 감독의 장편영화 연출 데뷔작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감독 자신의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다만, 6년 전부터 제주로 거처를 옮겨 살아가고 있는 감독이 그곳에서 만나고 체험한 사람과 사연을 배경으로 삼아, ¹ 관광지로서의 제주도가 아닌 삶의 터전으로서의 제주를 담아내었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스크린이 비좁으리만치 아름다운 모습은 세트장이 아닌, 진짜 그때의 그 공간, 그 풍경 그리고 그 애절함과 조금의 이격 없이 전해질 수 있었다.


 어느 날 시인 현택기(양익준 분)에게 꿈처럼 소년(세윤, 정가람 분)이 찾아온다. 그 존재는 마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다는 예술의 여신 “뮤즈”와 같다. 합평회에서 혹평을 들어야만 했던 시인은 어느새 사랑의 언어를 얻는다. 당장은 자신도 혼란스럽다. 대체 이 감정이 무엇인지 자신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도와주고 싶고, 같이 있고 싶다. 언젠가 소년이 나를 동정하여 이러는 것이냐고 따져 묻던 밤에 시인은 머뭇거린다. 신해철의 <설레이는 소년처럼>이라는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온다.


사랑한다고 말해 버리면 넌 웃으며 떠나 버릴 것 같아


* 영화 <시인의 사랑> 스틸컷


 이렇게 영화 <시인의 사랑>은 감정의 가장 깊숙한 지점의 언어를 길어다 오는 시인조차, 자신의 감정을 정의할 수 없는 혼란을 그다. 그러다 소년마저 그 마음의 길을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애틋함이 비단 시인의 것만이 아님을 고백해온다. 그리고는 뜨겁지는 않으나, 곁에 있어 주고 편이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사랑이 충만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전히 멀기만 한 어머니와 다툰 날, 둘만이 함께하던 외딴집에서의 하룻밤, 어찌할 수 없는 마음만을 공유한 두 사람이 아무런 말 없이 서로에게 마음으로 기대어 있던 짧은 장면은 이를 대변한다. 바로 이 씬이 안 어울린다는 판단조차 허락하지 않는 조합임에도 관객으로부터 공감을 획득하는 지점이 되었으리라 여긴다.


 이렇듯 영화 <시인의 사랑>은 사랑이지만 사랑이 아닌, 아니 사랑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낯선 사랑의 순간들을 예민한 시선으로 포착해낸다. 그리고 이제 더는 쓸 수 없는 희망을 기록하며 막을 내린다.


희망     
                                         기형도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

²


** 영화 <시인의 사랑> 스틸컷





사랑의 이면


 시인과 소년만 바라보자면 그저 애틋하기만 한 이 사랑의 기록은 사랑의 이면과 부딪히며 마찰음을 낸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사랑의 방해꾼으로만 보이는 이 이면의 풍경이 더 친숙하게 보인다. 그것이 일생에 한 번 마주하기도 어려운 애틋함이 아닌 일상적 풍경에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사랑 그 자체의 신선함을 다소 진부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영화 <시인의 사랑>은 이 땅의 영화가 거의 일관되게 저지르는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이른바 “사랑하다 보니 동성”이라는 시선이다. SF 작가이자 칼럼니스트인 듀나의 견해를 빌리자면, ³ 이 “사랑하다 보니 동성”이라는 시선은 실제로 동성애에 대한 선의에서 출발하지만, 이해에의 노력이 억지스러운 지경에 이른 종국에는 동성애를 특별한 것으로 인지하려 했음을 들키고 만다는 것이다. 영화 <시인의 사랑>이 시인과 소년의 사랑을 잔잔하게 담아내는 동안 관객은 이 시선을 알아채기 어렵다. 하지만 사랑의 이면에 아내(강순, 전혜진 분)가 등장하는 순간 이 시선을 숨기기란, 역시 어렵다.     


*** 영화 <시인의 사랑> 스틸컷


 아내는 절절하다. 시인은 아내와의 사랑이 결혼 전 잠깐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내는 아직도 남편을 사랑한다. 그런 남편이 바람났다. 아내는 달래도 보고 역정도 내어 본다. 하지만 남편은 요지부동이다. 그런데 좀처럼 관객들이 동요하지 않는다. 무려 결혼씩이나 해놓고, 아내를 엄마 대하듯 하며 칭얼거리기만 하는 미성숙한 인간이 심지어 바람씩이나 피고 있는데도 관객은 쉽게 아내 편을 들지 못한다.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소년이 아닌 소녀였다면, 관객들은 어떠하였을까? 그것도 영화에서의 소년이 그러하였듯 예쁘장한 외모까지 지니고 있었더라면 어떠했을까? 분명 아내를 불쌍하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사랑>은 아내가 불쌍해지면 안 되는 영화다. 아니, 아내가 영화의 중심으로 들어오면 안 되는 영화이다. 관객의 감상에 있어 아내가 지분을 확보하면 할수록 시인과 소년의 사랑이 지닌 순백의 아름다움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전혜진을 기이하리만치 긍정적인 캐릭터로 그린다. 전혜진은 울면 안 된다. 남편이 한 달에 30만 원 밖에 못 벌어오고, 게임이나 하며, 심지어 바람을 펴도 울면 안 된다. 하지만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바람난 대상을 대할 때면 마주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능히 견뎌야 한다. 아내의 사랑은 사랑이 아닌가? 어째서 아내라는 캐릭터는 이처럼 왜곡되었을까? 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래야 이 영화가 시인의 사랑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사랑하다 보니 동성”이라는 시선을 들키고 만다. 연출자는 금지된 사랑임에도 이 사랑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해 동성애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스크린의 안팎에서 이 사랑을 수호하고자 아내를 방패막이로 삼다 보니, 전혜진의 캐릭터는 심히 왜곡되고 말았다. 시인의 사랑을 가장 시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시도로 방해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동성 간의 사랑을 집어넣고, 관객들에게는 아내 정도만큼만 분투하라며 선을 그어주는 것이다. 관객은 영화를 연출자가 보라는 대로 감상할 의무가 없다. 나는 전혜진이 가여워서 그 사랑을 조금도 응원할 수 없었다. 아내를 위해서는 단 한 줄의 시도 쓰지 않던 시인이 마지막 장면에서 기어이 벌어들인 그 거금을 소년에게 쥐여줄 때, 나는 작은 탄식을 뱉었더랬다. 시인의 사랑이라 해서, 설령 그것이 더 애틋하고 절절하다 해서 손뼉 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왜 네 사랑만 그렇게 애달픈데? 따지자면 기실 사랑은 아내와의 사랑이고, 그 이면에 감히 끼어든 것이 소년과의 사랑이 아니었던가?


**** 영화 <시인의 사랑> 스틸컷









타인의 사랑


 어떤 유명한 남성 영화감독이 결혼생활을 유지한 상태에서 어떤 유명한 여성 배우와 사랑에 빠졌음을 고백한 이후로 나는 그 감독의 영화를 보지 못한다. 그 어떤 대사가 새 사랑에 대한 변명이 아닐 것인가? 그 어떤 몸짓이 새 사랑에의 미화가 아닐 수 있을까? 나는 보이지도 않는 스크린 너머의 아내가 눈에 밟혀서라도 그 감독의 영화는 못 보겠더라. 이와 같은 심보를 지닌 자이다 보니, 영화 <시인의 사랑>에 대한 감상도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었음을 고백해야겠다. 그러니 혹시 이 미천한 리뷰와 감상이 달랐다 하여 자신의 사랑관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나는 차라리 둘만의 우주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사랑에 늘 부러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


 영화는 타인의 사랑을 들춘다. 그런데 90여 분은 족히 이어지는 영화라는 매체에서 사랑만을 그렸다가는 망하기에 십상이겠다. 그리하여 사랑과 그 이면은 나란히 전개되며 함께 보인다. 그러자면 관객 사랑 이외에, 사랑의 이면에도 눈이 간다. 특별히 심보가 고약한 나 같은 감상자를 배려해달라는 뜻이 아니라, 꿈과 환상일 수만은 없는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 영화가 타인의 사랑을 바라볼 때 조금만 더 사랑의 이면에 대해 진지해주기를 바란다. 시집을 보면, 시의 뒷면에도 시가 있지 않던가?


***** 배우 양익준 씨가 친필로 쓴, 영화의 롤모델인 현택훈 시인의 시 '내 마음의 순력도'






참고

¹

 - 씨네21, 장영엽 기자, 2017년 5월 15일 자, “[스페셜] ② “보호한다는 감정이, 내게는 특별해서” - <시인의 사랑> 김양희 감독”

 -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7178     


²

 - 기형도, 『기형도 전집』, 문학과 지성사, 1999          


³

 - 이영수(듀나), 『가능한 꿈의 공간들』, 씨네21북스, 2015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및 * ~ ****

 - 다음 영화, <시인의 사랑> 항목 중 포토

 - http://movie.daum.net/moviedb/photoviewer?id=108946#1194099     


*****

 - 현택훈 시 <내 마음의 순력도>, 양익준 배우 손글씨, CGV 아트하우스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p/BYev24IjlTv/?taken-by=cgv_art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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