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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Oct 21. 2017

오래된 환상 _ 영화 <유리정원> 리뷰

여든다섯 번째 지난주




환상의 두 가지 지경


환상02 (幻想) [환ː-]
「명사」

「1」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
「2」『북한어』어떤 사람이나 사실에 대하여 근거 없이 덮어놓고 좋게만 보는 태도.

¹ 


 “하나면 하나지 둘이겠느냐?”라는 유명한, 아니 깊게 박힌 노랫말을 떠올린다. 일견 맞기는 하다. 하나면 하나이지, 둘일 수 있겠나? 그런데 가끔 있다. 하나만 가져와 본다. ‘환상’이라는 단어 중 언중이 즐겨 사용하는 한자어는 ‘헛보일 환(幻)’자와 ‘생각 상(想)’자로 구성된다. 줄이자면 ‘헛된 생각’쯤 되겠다. 당연히 위에서 보듯 사전적 의미 역시 부정적인 어감 하나만을 담고 있다. 헛된 생각이거나, 좋게만 보는 태도란다. 한데 우리는 ‘환상’을 긍정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나 현상이 너무나도 빼어나, 그 좋은 정도를 구구절절 입에 올리기조차 벅찬 지경일 때, 우리는 그 사태를 환상의 영역에 집어넣어 “환상적이다”라고 표현하고는 함이다. 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해를 돕는답시고 단정 지어본다. 곧 ‘좋은 환상’과 ‘나쁜 환상’이 있음이다. 그런데 ‘좋은 환상’도 ‘나쁜 환상’도 모두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마침 지난주에 만난 한 편의 영화는 현실과 닿아 있으나, 분명 현실과는 거리를 둔 환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과연 이 영화에서의 환상은 ‘좋은 환상’일까 ‘나쁜 환상’일까? 혹은 이처럼 단호하게 말할 수 없을 만치 흐릿하기만 할까? 감상을 나누어 본다.



 - 여든다섯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에서는 영화 <유리정원>을 다루었습니다.

 - 본 리뷰는 영화 <유리정원>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감상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아직 개봉 전인 작품을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줄거리 ²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연구하던 과학도 ‘재연’(문근영)은 후배에게 연구 아이템을 도둑맞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빼앗겨 어릴 적 자랐던 숲 속의 유리정원 안에 스스로를 고립한다. 한편, 첫 소설의 실패로 슬럼프를 겪던 무명작가 ‘지훈’(김태훈)은 우연히 알게 된 재연의 삶을 훔쳐보며 초록의 피가 흐르는 여인에 대한 소설을 연재해 순식간에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른다. 그러던 어느 날, 충격적인 미제 사건의 범인으로 재연이 지목되고, 이 사건이 지훈의 소설 속 이야기와 동일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데... 과연 재연의 유리정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오래된 환상


한국영화 사상 가장 독보적인 소재와 스토리

- 영화 <유리정원> 홍보 문구 중 ²


 영화는 이야기를 담는 여러 그릇 중 하나이다. 그리하여 영화 자체의 잘됨과 그렇지 못함 이전에 한 편의 이야기로서 그 가치를 물음은 타당하다. 특히 영화 <유리정원>은 상영시간을 이끌어 가는 동력이 이야기 자체의 ‘희소함’에 있다는 견해에서 더욱 그러하다. 마침 영화의 홍보 문구 중에서도 단연 그 반복이 잦은 단어는 ‘독보적’이다. 그런데 그 ‘희소함’이나 ‘독보적’이라는 것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른 이야기들과 견줌이 아니라, 동시대의 충무로라는 영화판에서 그러하다는 사실은 엄연한 또한 불편한 진실이다. 어찌 되었건 어느 정도의 자립성은 확보한다. 경찰이 나오지만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고, 피가 나오지만 붉은색은 아니니 말이다. 한데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감상이 머릿속을 쉬 떠나지 않음에 있다. 영화의 역사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주 새로운 그 무언가를 기대함이 적절하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새로움을 무기로 내세우니만큼 <유리정원>에 묻은 오래된 손때가 어지간히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클리셰라는 그럴듯한 용어는 쓰지 않기로 한다.






자연이라는 너무 오래된 환상의 공간


 <반지의 제왕>처럼 모든 배경이 비현실인 영화는 차라리 수월하다. 현실이 도처에 널려있는 가운데, 비현실을 섞어내야 하는 영화가 달아날 공간은 비좁기만 한 때문이다. <유리정원>에서 재연(문근영 분)이 재연만의 영역으로 달아나는 공간은 영화 제목이기도 한 “유리정원”이자 환상의 공간이다. 현실에 기반을 둔 작중 화자들이 초록색의 피나, 부활하는 새, 시냇물에 빠져 죽는 성인 남성 등을 그릴라치면 엄연히 그 공간만은 환상의 공간이어야 하는 탓이다. 영화 <유리정원>은 아주 멋진 숲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었는데, 이는 물론 영화의 영상미를 끌어올리는 일에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전개마다 삽입되는 흐릿한 숲의 전경은 재연의 공간만이 숭고한 자연이라는, 그러니까 “자연은 좋은 것”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에 기대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 영화 속 대사처럼 “순수한 건 오염되기 쉽다”지만, 그리하여 이 순수를 쉽게 오염시켜 놓고 그 파국을 감상하겠다는 영화라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더 고민했어야 하지 않을까? 식물성은 하나의 성격이지 결코 우열의 대상은 아니지 않나….


* 영화 <유리정원> 스틸컷






한국 영화에서 상처 입은 여성을 그릴 것이라는 환상


 앞서 짧게나마 <유리정원>이 동시대 충무로 영화판과의 독립성을 확보한다고 주장했음은 여성 주인공이 전면에 등장한다는 사실로부터 비롯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유리정원>은 재연이 겪은 일과 행한 일 그리고 상상한 일로 전개되며 오롯이 몸과 마음에 상처가 많은 한 여성화자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재연의 맞은편에서 재연을 향해 질주하며 또 하나의 이야기 축을 구성하는 인물인 지훈(김태훈 분)의 본격적인 개입에 이르면, 이 시선은 어김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는 그의 직업이 소설가인 점과 영화의 주된 플롯이 지훈의 소설을 그 뼈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곧 재연에게 일어나는 일은 지훈의 소설과 분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정작 우리가 듣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재연이 아닌 지훈의 욕망에 부합한다는 구조가 발각되는 순간, 관객은 감상의 탄착점을 상실하고 만다.


 최초의 접근부터 기이하다. 보이지 않는 유리막으로 둘러싸인 재연만의 공간에 접근하는 일에 개연성을 부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훈은 너무나도 쉽게 접근하는데, 남겨진 우편물에서 그 단서를 찾음이다. 현실에서는 거의 범죄, 아니 그냥 범죄이다. 영화에서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장면을 일일이 따지고자 함이 아니다. 상처 입은 여성만의 공간에 남성이 잠입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물건을 훔치는 모습 -영화 속 일기장이 현실에서는 속옷으로 대체되고는 한다.- 은 기이함을 넘어, 현실 속 성범죄의 그것과 닮은 터라 섬뜩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생을 함부로 소설로 착복하는 행위는 또 어떠한가! 영화의 주요 뼈대인 지훈의 소설을 위해 재연은 결국 지훈의 뮤즈로서 희생될 뿐이다. 특히 영화의 결말 부, 소설 「유리정원」의 마지막 회에 쓰인 “여자의 유방처럼 새하얀”유의 문장이 나오는 순간, 한국 영화 속 상처 입은 여성을 그릴 것이라는 환상은 여지없이 파괴되고, 또 한 편의 충무로 판 남자 영화와 마주하고 있다는 현실로 내밀려야 했다. 물론 유쾌할 수 없었다.


** 영화 <유리정원> 스틸컷






스크린이 타인의 아픔을 환상처럼 전사(轉寫)할 때


 사람이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거나 다른 존재로부터 발생하였다는 이야기야 부지기수이다. 신수원 감독은 ‘나무에서 태어난 재연’이라는 설정이 알에서 인간이 태어났다는 설화와도 그 발상이 맞닿아 있음을 직접 밝히기도 했다. ³ 이뿐 아니라 결국 재연은 나무가 되고 마는데, 이는 카프카의 『변신』유의 적지 않은 이야기들이 이미 -그 생김이 아주 판이하나- 인간이 다른 존재가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음에 기대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인간이 다른 존재가 되는 작동 또한 별로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문제 될 것도 없다. 그런데 앞서 예로 든 문학작품 속 변신 후의 모습은 하다못해 꿈틀거리기라도 했다지만, 재연은 나무가 되려다 보니 이 지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신체 일부를 나무처럼 동작할 수 없는 상태로 두어야 함이다. 곧 <유리정원>은 장애를 지닌 사람을 다루어야 한다.


 무거워서라도 피했을 주제를 택했을 때는 그만치의 책임 있는 연출을 요구받을지다. 하지만 영화 <유리정원>의 책임감은 아쉽게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재연은 12살부터 왼쪽 다리가 자라지 않는다. 이 불행은 그가 죽은 것을 살려내는 연구에 매진하는 근거가 된다. 이 불행으로 인한 슬픔은 정교수(서태화 분)와 수희(박지수 분)가 밀회를 나누는 동안 장애를 지니지 않은 소위 아가씨들이 신는 뾰족한 구두를, 마치 엄마 구두를 신은 어린 소녀 마냥 재연이 신고서는 마당을 빙글빙글 도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이 아픔은 많은 이에게 그저 타인의 아픔이자 엇비슷한 깊이로도 공감이 어려운 상처임을 상기하자면, 분명 의미 있는 시도로 읽힌다. 하지만 여기까지이다. 영화는 신체 기형으로 인해 삶도 사랑도 모두 피폐해진 사람의 슬픔에 더는 관심이 없다. 다만, 지훈의 소설이 재연과 나무의 관계를 놓지 않는 한, 지훈 역시 그 소설에 몰입할수록 나무처럼 마비되는 연계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저 기형이라는 배경만으로 소비될 뿐이다. 이 활용이 어찌하여 문제가 되느냐는 의문에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실제로 한쪽 다리가 불편한 사람, 혹은 몸의 한 편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는가? 영화는 잠시 ‘4대강’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황우석 사태’가 떠올랐다. 그 근거 없는 환상적인 희망에 좌절했던 사람들의 기억과 이 영화는 무관할 수 있는가? 스크린이 타인의 아픔을 전사(轉寫)할 때, 만에 하나라도 환상처럼 비추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 영화 <유리정원> 스틸컷









문학이라는 환상, 그러나 신수원이라는 시도


 일전에 내재적 비평의 중요성을 언급했던 주장의 하층부에는 영상 이전에 글월문의 중요성을 믿는 태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는 그 어떤 영상도 연출자의 머릿속으로부터 곧바로 카메라로 이식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에 근거함이다. 굳이 시나리오라고 불릴 수 없는 형태일지언정, 그저 끄적인 수준일지언정 글은 영화의 전 단계로서 굳건하다. 마침 영화 <유리정원> 속에도 글이 등장한다. 이는 소설로써 문학의 한 갈래인데, 그 힘이 막대하다.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는가 하면, 일대의 사건과 매개되며 뉴스에도 나온다. 어쩌면 이 지점이 현실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환상이 아닐까 싶다. 장황하게 설명할 것도 없이 이 땅의 문학은 아무런 힘이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쓰고 있고, 그중에는 신수원 감독이 있다.


 신수원 감독은 연출 이전에 직접 각본을 쓰는 몇 안 되는 감독이다. 그의 전작 <순환선 (2012)>, <명왕성 (2012)>, <마돈나 (2014)>가 모두 그의 글로부터 출발하여 영상에 이르렀다. 그리고 한국뿐만이 아닌, 세계에서 적지 않은 호평을 끌어냈다. 이는 무시할 수 없는 성취이다. 비록 범부인 필자가 보기에 익숙한 지점들이 눈에 밟혀 차마 <유리정원>에는 박한 언사를 뱉었으나, 신수원이라는 감독의 시도는 몇 차례의 크고 작은 혹평에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길 바란다. 영상 이전에 쓰는 자의 고뇌를 공감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이름을 보면 언제든 영화관으로 달려가겠다. 





참고

¹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환상02 (幻想)” 항목

 - http://stdweb2.korean.go.kr/search/View.jsp


²

 - 다음 영화, 영화 <유리정원, Glass Garden (2017)>

 -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3071


³

 - 맥스무비, 차지수 기자, 2017년 10월 19일 자, “22회 BIFF | <유리정원> 신수원 감독 “공존의 가치에 공감해주길”” 

 - http://news.maxmovie.com/345364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다음 영화, 영화 <유리정원, Glass Garden (2017)>

 -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3071


*, **, ***

 - 다음 영화, 영화 <유리정원, Glass Garden (2017)> 포토

 - http://movie.daum.net/moviedb/photoviewer?id=103071#1202365/Photo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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