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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Nov 19. 2017

영화의 빛으로 인간을 비추다. _ 영화 <빛나는> 리뷰

여든아홉 번째 지난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만든 영화


 언젠가 <라라랜드>를 감상하고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만든 영화”라는 단평을 남긴 일이 있다. 전문 비평가가 흔히 하는 ‘20자 평’, 혹은 ‘한 줄 평’을 흉내 냈음이다. 좋은 습관은 아니다. 영화는 -특히 좋은 영화일수록- 짧은 언설만으로 그 전체를 형용할 수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그럴듯함”만을 전시할 뿐이겠다. 그리하여 저 단평에는 실질적인 의미가 뭉개져 버렸다. 그리하여 첨언이 필요하다. 앞선 단평에 “20세기 할리우드 영화 산업에의 향수와 예찬을 담은 영화”라고 덧붙이거나, 아예 대체해야 의도한 바에 더 부합한다. 그러나 후자가 덜 그럴듯하고, 덜 멋있다. 그런 이유로 버려졌으니,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만든 영화”에 더 들어맞는 작품을 만나고 말았다. 이러면 <라라랜드>에서의 단평이 잘못된 이유가 하나 더 느는 셈이다. 정작 필요할 적에 딱 맞는 평을 못 쓰니 말이다. -물론 쓰건 말건 아무도 모르니까 겉으로 보기에 문제 될 것은 없으나, 나의 마음속에서는 문제가 된다. 그러면 못 쓴다.- 그리하여 <라라랜드>와는 다른 이유지만 마찬가지 방식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만든 영화”의 근거를 조금 더 길게 언급하고자 한다. 일단은 사랑 이야기이다.





 - 여든아홉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에서는 영화 <빛나는, Radiance, 光 (2017)>을 다루었습니다.

 - 본 리뷰는 영화 <빛나는>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감상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아직 개봉 전인 작품을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리뷰 중 “뻔한 사랑의 구도, 뻔하지 않은 사랑의 여정” 부분의 해설은 2017년 11월 18일 명동 CGV 라이브러리에서 진행된 “CGV 아트하우스, 영화 <빛나는> 라이브러리톡”에서 정성일 평론가님의 <빛나는> 해설 일부를 참고하였음을 밝힙니다.



줄거리 ¹

당신의 눈에 담고 싶은 라스트 씬

시력을 잃어가는 포토그래퍼 나카모리는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영화 음성 해설을 만드는
모임에 참여하고 해설을 쓰는 초보 작가 미사코를 만난다.
사사건건 의견이 부딪치던 두 사람은
점점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고
함께 아름다운 라스트 씬을 써 내려가는데…







뻔한 사랑의 구도, 뻔하지 않은 사랑의 여정


 <빛나는>은 외견상 사랑 이야기다. 영화 포스터가 그렇고, 홍보 문구 또한 그렇다. 영화를 봐도 대강은 그러하다. 대강만 보면,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이들을 위해 영화 지문(地文: <문학> 희곡에서, 해설과 대사를 뺀 나머지 부분의 글. 인물의 동작, 표정, 심리, 말투 따위를 지시하거나 서술한다. ²)을 쓰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다. 그리하여 ‘스크린에 전시할 만치의 사랑’이라는 ‘정도’에 부합할 만치의 구도는 형성된다. 곧 영화 <빛나는> 속 사랑의 구도는 영화관에 가서 값을 지불할 정도는 됨이다. 늘 보던 시선대로라면 이 영화는 비판의 대상이어야 한다. 빛을 질료로 예술을 하는 사진작가에게 빛을 빼앗고, 역시나 아픔을 간직한 여성이 그 상처를 보듬는 방식은 외견상 너무나도 오래되고 진부하고 지겨운 사태인 탓이다. 그러나 자세를 조금만 고쳐 앉으면, 이 영화에서의 사랑이 오래된 그것과는 완전히 다름을 목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 이외에 또 다른 사랑도 함께 볼 수 있다.


 ‘액자식 구성’이라는 말을 중학교 내신시험 주관식 답안으로 작성한 이후에 실제로 써 본 기억은 없다. 그래서 이 표현을 적어두고 우선 반가움을 전한다. 짧은 인사 뒤로, 영화 <빛나는>의 액자를 본다. 분명하다. <빛나는>이라는 큰 영화가 액자의 틀이라면, 영화 속 기타바야시 감독(후지 타츠야, Tatsuya Fuji 扮)의 영화는 액자 속 사진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어디에나 어울리는 훌륭한 액자처럼, 큰 틀과 내부는 긴밀하게 조응하며 하나의 전체로서 기능한다.


 사랑 이후에 액자 이야기를 했으니, 둘의 관계를 밝혀야 한다. 우선 ‘영화 속 영화’를 본다. 영화 속 주조(후지 타츠야, Tatsuya Fuji 扮)와 토키에(칸노 미스즈, Kanno Misuzu 扮)는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러나 토키에는 어떤 병증으로 죽음의 문턱에 있다. 그런 토키에를 바라보는 주조의 시선은 슬프기 한량없다. 그러다 스카프를 매어줄 적에 장난스럽게 힘을 준다. 토키에는 웃는다. 그 행위는 물론 온전히 진심은 아니다. 그러나 그저 장난도 아니다. 이렇듯 토키에를 향한 주조의 마음은 복잡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속을 살아갈 때, 그저 그 고통으로부터 그리고 이 거대한 슬픔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욕망은 스카프를 매어주는 일상적인 단면에서도 불쑥불쑥 치밀려 올라온다. 그러다 ‘영화 속 영화’가 결말에 이르면, 주조는 해변에서 스카프를 힘없이 떨어뜨린다. 마치 스카프의 용도가 다 한 듯 보인다. 스카프에 의함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분명 스카프의 주인이 더는 이 세상에 없음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주조는 비틀거리며 빛을 향한다.


 ‘영화 속 영화’의 사랑과 영화 <빛나는>의 사랑을 비교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일단 남녀가 1대 1로 대응하지 않는다. ‘영화 속 영화’의 주조는 나카모리(나가세 마사토시, Nagase Masatoshi 扮)가 아닌, 미사코(미사키 아야메, Ayame Misaki 扮)를 더 닮았다. 미사코를 보자. 미사코에게는 아픔이 있다. 그 아픔은 엄마로 현현한다. 엄마는 남편을 잃었으며, 지금은 치매를 앓고 있다.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미사코의 눈빛은 주조의 그것과 닮아 있다. 마치 주조가 토키에에게 슬쩍 스카프를 옥죄듯, 미사코는 잠든 엄마의 호흡을 측정한다. 엄마는 정신이 온전하지 않을 뿐 육체적으로는 생명과 직결된 병환이 없음에도 토키에는 굳이 점검한다. 이는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의 표상은 아니다. 그저 만에 하나 그렇게 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은연중에 자리 잡은 마음이 미사코의 손을 엄마의 코와 입에 다가가게 하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미사코와 주조의 닮음이 미사코가 영화 지문 작업을 할 때 그대로 이입되었음이다. 그리하여 미사코는 '영화 속 영화'의 마지막 지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주조의 표정은 내일을 살아갈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 영화 <빛나는> 스틸컷



 이의 있다고 한다. 당연히 그럴법하다. 어딜 봐서 주조의 표정에 희망이 있단 말인가…. 나카모리는 의문을 제기한다. 주조의 표정에 희망이 있는지까지는 갈 것도 없이, 감상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한다. 이미 이즈음에 나카모리는 눈치채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작 희망이 필요했던 이는 미사코였음을…. 그러나 미사코의 절망을 나카모리가 감지한 지점이 사랑의 시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참은 더 들어가야 한다. 이제 나카모리를 보자.


** 영화 <빛나는> 스틸컷


 사진작가란 시간을 멈춰 세우는 사냥꾼이다.


 자신의 직업에 철학적 사명을 설정할 정도라면 그 소명의식의 깊이를 감지함에 어려움은 없을 터이다. 또한, 영화 대사로 잠깐 등장하는 ‘그라비아 사진(여성 아이돌 화보)’이 아닌, 나름의 예술을 추구해온 나카모리였다. 그런 그에게서 빛이 사라져 갔다. 그리고 명확한 선후 관계를 알 수는 없으나, 가족이었던 아내도 떠나갔다. 밤과 낮을 구별할 수도 없었던 어느 날, 전처로부터 청첩장을 받는다. 나카모리는 비틀거린다. 더없이 깊은 절망에 빠진 나카모리에게 ‘영화 속 영화’는 어떤 의미였을까? 미사코의 지문에 당장 반박할 만치, 그에게는 다르게 보였던 모양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도키에와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주조의 삶 모두에 공통으로 자리한 ‘죽음’만이 나카모리에게는 뚜렷하게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카메라를 훔친 후배로부터 카메라를 되찾고서 뱉은 한 마디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내 심장이다.


*** 영화 <빛나는> 스틸컷



 나카모리의 눈이 점점 보이질 않으니, 자신의 심장과도 같은 카메라도 겨우 희미한 생명을 이어나갈 뿐이다. 이런 나카모리에게 한 사람이 들이닥친다. 바로 미사코이다. 그러나 이 침투마저도 곧 사랑의 시작은 아니다. 이 지점까지만 해도 미사코는 죽음을 성찰하게 하는 영화를 다른 방식으로 강요하더니, 잠시 소금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도왔을 뿐, 상상력이 부족하다며 공박해온 이상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나카모리는 완전히 빛을 잃는다. 그 순간 곁에 미사코가 있었다. 손을 잡았다. 절망의 끝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조차도 둘의 관계를 사랑이라 말할 수는 없다. 누구라도 그와 같은 절망의 순간에는 옆에 있는 이의 손을 잡을 것이다. 돌아오는 육교에서 나카모리는 미사코의 얼굴을 만져도 되느냐고 묻는다. 이 지점일까? 역시 아니다. 나카모리는 사진을 찍어야 했다. 마지막 사진을….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희미하게나마 보일 적에는 아이들이 있는 방향으로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피사체를 뚜렷하게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의 심장은 완전히 멈췄고, 마지막 사진을 찍기 전 그 생김을 짐작하기 위해 얼굴을 만졌을 뿐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 영화 <빛나는> 스틸컷



 돌아서는 나카모리를 향해 미사코가 부탁을 한다. 석양을 찍은 그곳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달라 한다. 그곳에는 아빠가 있기 때문이다. 미사코는 틈이 날 적마다 그 사진을 본다. 어머니는 너무 아파서 그 슬픔마저 기억할 수 없다. 이제 미사코의 아픔을 아는 이는 어린 기억 속 아빠뿐이다. 나카모리의 사진 속 그 석양의 세계로 가면, 내 슬픔을 알아줄 아빠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하여 나카모리에게 부탁을 한다. 나카모리를 사랑하기 때문일까? 아직도 아니다. 미사코가 외우고 있는 아빠의 흔적,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존재하는 같이 찍은 사진의 흔적으로 데려다 줄 사람으로, 빛을 사냥하던 그리고 석양을 담아내던 나카모리 정도로 적합한 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석양 앞에 선다. 미사코는 영화에 지문을 넣듯 순간들을 해설한다. 그리고는 나카모리가 답변하듯 이야기한다.


“삐걱대는 마음의 소리를 들었어요.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면 화가 나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심장을 던진다. 근거 없는 희망을 찾던 미사코의 아픔을 알아챈 나카모리가 이윽고 그 아픔을 ‘나는 알고 있었어요’라고 고백하고는 자신 그 자체인 카메라를 던져버렸음이다. 사랑한다는 고백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사코의 아픔을 안다고 했고, 자신의 모든 것은 던져 버렸다. 이 지점이었다. 아빠가 아닌 미사코의 아픔을 알아챈 사람, 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사람, 감사함으로 불러도 좋고 동정심으로 불러도 좋을 이 감정을 미사코는 키스로써 표현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어떤 단계가 있어서 조금씩 쌓아나가는 사랑 영화에 익숙했던 관객은 당황스럽다. 오로지 서로의 상처를 내어 보이고, 그 상처를 슬쩍슬쩍 엿보고, 그 아픔을 짐작하는 일이 사랑의 자양분이 될 수 있음인 것이다. 그러자 이제 미사코는 뒤틀린 마음을 바로잡는다. 엄마를 찾아 나선다. 석양 앞에선, 죽음을 기다리는 엄마를 찾아내어 집으로 인도한다. 그렇게 석양처럼 느즈막에야 확인한 사랑이 미사코를 구원하였다.


***** 영화 <빛나는> 스틸컷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이루어지기까지 할애한 리뷰의 분량을 되짚는다. 한참은 걸린다. 물론 이에는 핵심을 추려내는 역량이 부족한 필자의 탓도 있다. 그러나 이 사랑의 여정은 쉽게 드러날 수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함은 전혀 염두에 둘 수조차 없는 이들끼리의 사랑은 일반적인 그것과는 같을 수 없음이다. 뒤쫓아야 했다. 그래야 겨우 보였다. 여유가 된다면, 사랑의 시점까지 흘러온 이 궤적을 한 번만 돌아봐 주시기를 권한다. 바로 이 길고 긴 여정의 끝에서야 비로소 빛나는, 사랑을 위하여….









영화의 빛으로 인간을 비추다.


 영화 <빛나는> 속 사랑은 석양이 지는 시간의 마지막 빛처럼 짧은 시간, 찬란하게 관객을 찾아간다. 그러나 영화 <빛나는>의 사랑이 비단 남녀 주인공의 사랑만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또 하나의 사랑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화에 대한 사랑이다.


 가끔 ‘영화를 체험한다’라고 표현한다. 그 빈번함으로 상투적인 인상까지 주는 서술어의 활용은 영화가 감상자에게 부여하는 다양한 감정의 동요를 떠올려보면 분명 그 활용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이처럼 힘주어 주장하였으니 근거를 대야겠다. 뜯어보자. 영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물론 중요한 요소로 '소리'가 있고, 요즘은 의자가 흔들리고 물이 흩뿌려지기도 하지만, 가장 유의미한 아니 거의 존재 자체의 의미는 “빛”이 쥐고 있다. 영화는 영화의 빛으로 우리를 항시 비춘다. 


 영화 <빛나는>은 세 가지 시도로 '영화의 빛이 인간을 비춤'을 예찬해온다. 하나는 구구절절 설파한 미사코와 나카모리의 사랑이야기에서 드러난다. 이 사랑은 분명 예정되어 있으나, 한참이나 지지부진을 거듭한다. 그렇게 보인다. 돌려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사코와 나카모리의 사랑은 뒤에 감추고 '영화 속 영화'를 통해서만 그 사랑을 볼 수 있게끔 구조를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미사코가 영화를 자신의 처지로 읽어 내려가면 나카모리가 정돈하듯 잡아주고, 두 사람이 ‘영화 속 영화’를 대하는 상상력에 간극이 발생하면 이는 역설적으로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는 근거가 된다. 이 둘은 흔히 선남선녀가 서로 반하듯 불꽃이 피어오르는 사랑이 아닌, ‘영화 속 영화’가 내뿜는 빛으로 서서히 서로를 비추며 사랑을 이루어 간 것이다. 영화의 빛이 인간을, 우리를, 우리들의 사랑을 항시 비추고 있음을 영화 <빛나는>은 주지하고 있음이다.


 두 번째 시도는 시각을 잃은 이들이 영화를 보는 방식을 전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이들에게 영화가 어떤 의미인지를 이야기하는 이는 토모코(칸노 미스즈, Kanno Misuzu 扮)이다. 빛을 볼 수 없는 이들은 영화를 바라보며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함을 미사코에게 전하며, 그리하여 자신이 연기를 할 적에는 마치 영화 속 사람이 된 것처럼 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리하여야 물리적으로는 차단된 빛이 빛을 잃은 이에게 전해지리라 여겼는지 모르겠다. 영화의 빛을 받지 못하는이들에게 깊숙하게 빛을 드리우는 연기 그리고 지문들…. 이는 배리어프리 영화(barrier-free movie: 기존의 영화에 화면을 음성으로 설명해주는 화면해설과 화자 및 대사, 음악, 소리 정보를 알려주는 한글자막을 넣어 모든 사람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만든 영화 ³)를 소개하는 차원 이전에, 영화의 빛을 받아 드는 일이 얼마나 값진 경험인지를 잘 알고 있다는 인지의 표현이었다. 


 마지막이자 세 번째 시도는 영화가 끝나는 시점에야 드러난다. 그런데 끝나는 시점이 하나가 아니다. 영화 <빛나는>은 마치 ‘액자식 구성’을 다시 확인이라도 하듯, 두 번의 엔딩 크레디트를 나누어 내보낸다. 


주조가 바라보는 곳

그곳에 


 ‘영화 속 영화’의 해설 이후 영화는 한 번 끝났다가 다시 영화의 빛을 뿜는다. 이 마지막 영화의 빛은 영화의 빛을 받는 사람들의 얼굴을 담는다. 눈물과 웃음과 아픔이 오롯이 담긴, 스크린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담아낸다. 영화의 빛이 인간에게 선사하는 그 생생한 체험, 그저 말로써만 영화를 체험한다고 표현하던 그 실체를 영화 <빛나는>은 마지막 순간에 드러내 보임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이미 상당수의 관객은 앞서 나온 엔딩 크레디트에서 자리를 떴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괜찮다. 이 장면은 관객이 아닌, 영화에게 보여주기 위해 전사되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빛으로 사람들이 울고 웃는 모습을 영화에게 보여주며, 마치 나카모리가 미사코의 아픔을 알고 있다고 고백하듯, 영화의 빛이 소중함을 알고 있다는 고백을 전하는 것이다. 영화의 빛으로 비춘 인간을 보여주며, 영화에게 사랑과 감사를 전하는 것이다! 그제야 이를 빌어 영화를 사랑하는 한 사람인 나도, 함께 사랑과 감사의 고백을 전해야 함을 알았다. 영화에 감사해보기는 또 처음이라 좀 쑥스럽지만, 한 편의 빛나는 영화 <빛나는>을 빌어 영화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겠다. 


내가 바라보는 스크린

그곳에

빛나는















참고

¹

 - 다음 영화, <빛나는 (2017, Radiance, 光)> 중

 -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11613


²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중 <지문 02 (地文)> 항목 

 - http://stdweb2.korean.go.kr/search/View.jsp


³

 -(사)배리어프리 영화 위원회

 - http://barrierfreefilms.or.kr/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및  * ~ *****

 - 다음 영화, <빛나는 (2017, Radiance, 光)> 중

 -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1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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