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여덟 번째 지난주
스크린을 마주한다. 긴장 없는 시신경은 쏟아지는 빛을 수용한다. 정보는 일방적으로 전해진다. 보는 이는 울고 웃는다. 잘못되었나? 좀 더 나가보자. 더 울고, 더 웃을 수 있다는 영화가 입소문을 탄다. 이들만을 골라서 관람한다. 역시나, 잘못되었나? 절대 그렇지 않다. 정확히는 잘못되었다거나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영화는 본래 그렇게 보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영화는 그 자체로 머물지 않고, 감상자의 감상에서 자신을 증폭시킨다. 옳은가? 좀 더 따져보자. 그러자 감상자가 움직인다. 감상의 결을 방관하지 않고 되뇐다. 몇 번이고 되새기며 한 번 더 보기도 한다. 역시나, 옳은가?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정확히는 옳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음이다. 영화는 본래 그렇게 따라오는 것이다.
위 대구는 각기 주체가 다르다. 앞선 것은 감상자이고. 뒤엣것은 영화이다. 감상자는 감상자의 일을 하고, 영화는 영화의 일을 했을 뿐이다. 한데 이토록 명징해 보이는 비교 사이에 애매한 자가 개입한다. 누구나 울고 웃은 영화를, 영화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상영이 끝난 이후에도 관객의 마음에 포근하게 자리한 영화를 두고, 어떤 감상자가 굳이 나서서 더 쫓고 더 고민할 것이 있다며 나아간다. 감상자와 영화 모두 각자의 과업을 능히 이행한 작품을 두고, 그는 사회적 효용을 운운하며 이 시도가 명백히 파생 가능한 감상이라며 홀로 난리 치는 것이다. 그러나 원작의 만듦새가 워낙 빼어나다. 의아한 사람들은 묻는다.
"영화를 그렇게까지 봐야 합니까?" ¹
- 아흔여덟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에서는 영화 <코코, Coco (2017)>를 다루었습니다.
- 본 리뷰는 영화 <코코>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감상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너지(synergy)는 “분산 상태에 있는 집단이나 개인이 서로 적응하여 통합되어 가는 과정” ² 으로 정의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용례로 “시너지 효과”를 떠올리면 저 뜻이 맞겠거니 싶다. 본고에서는 디즈니와 픽사를 이름이다. 그런데 이제 누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좀처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시너지 효과’를 운운할 정도마저 지나쳤음이다. 언젠가 둘을 잇는 접속조사 ‘와’나 문자표 ‘·’이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시작 지점에는 반드시 <코코>가 있겠다. 그만치 <코코>는 완성도가 빼어난 작품이다.
<코코>의 높은 완성도가 비단 ‘원래 잘 하던 애 옆에 원래 잘 하던 애’가 만나 ‘더 잘하는 애’가 되었음에 있지는 않다. 비단 이것이 높은 완성도의 원인이었을지언정, 결과로써 우리의 시야에 포착된 사실은 단연 ‘빈틈없는 이야기 구조’에 있다. 꿈꾸는 소년 미겔이 가족의 반대라는 고난에 직면하고, 나름의 투쟁을 전개하는 가운데 동화 특유의 모험이 펼쳐진다. 그 와중에도 가족 간의 연대와 반전(反轉), 거기에다 역시 동화 특유의 권선징악이라는 총천연색 이야기 요소가 아무 무리 없이 흘러간다. 자칫 상투적일 수 있는 이야기 흐름은 무거울 수도 있었던 사후세계를 위트 있게 조명해내는 새로움으로 극복해낸다. 이쯤 되면 이들이 다음 작품은 또 어찌하려고 이러는가 싶을 정도이다.
탄탄한 이야기 구조를 떠받드는 부가적인 요소들마저 빈틈이 없다. 눈부시도록 화려한 색감, 관람 후에도 뇌리에 남는 음악, 멕시코 문화에의 깊은 이해와 존중은 한 작품의 높은 완성도를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태도를 짐작하게 함과 동시에, 경의마저 표하게 한다. 덧붙여 한국 관객에게 부가적으로 호의를 얻을 수 있는 지점들도 있다. 바로 ‘정서적 동질감’이다. 멕시코와 한국의 문화가 얼마나 닮았느냐는 근원적 질문까지 거슬러가지 않더라도, <코코> 속 ‘죽은 자들의 날’에서 드러나는 멕시코 사람들의 의식과 행위는 분명 우리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망자의 사진을 걸어두고 이를 기리는 모습이나, 조상을 모실 때면 그들이 찾아와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그에 따른 일련의 행위들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다시 이야기 구조로 돌아간다. 전체와 부분이 빈틈없이 짜인 서사에서 절정은 단연 미겔과 코코가 함께 “Remember Me”를 부르는 장면에 있다. 이는 곧 헥터가 미겔의 목소리를 빌려 산 자들에게 고하는 반성문이자, 코코가 가족들에게 권하는 용서의 노래였다. 이 장면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뭉클해지고 벅차오른다. 몇몇 이들은 눈시울을 붉히고, 연신 눈물을 훔친다. 함께 훌쩍였다.
그러나 다짐했다. 아직 있지도 않으며,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미래의 내 아이와는 <코코>를 함께 감상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왜? <코코>가 전근대적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더 들어가 본다. 구조적 완결성과 디테일의 시의적절함에, 감정적 동질까지 이룬 한 편의 영화가 시대의 조류에 역행한다고 선언하는 이유는 한 개인과 한 개인의 꿈을 가족이라는 폭력적 집단이 아무렇지 않게 말살함에도, 영화는 이를 미화한다는 확증에 기인한다.
소년은 꿈을 꾼다. 소년의 꿈은 대체로 허황하다. 소년은 이미 제 머릿속에서 자신을 스타로 그려놓았다. 못을 박고 나일론 줄을 묶어 튕겨도 본다. 우상의 노래를 따라 불러보기도 한다. 어느덧 소년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가족에게 고백하는 시기가 도래한다. 사회마다 가정마다 각기 다른 반응이 나올 것이나, 영화 <코코> 속 가족은 미겔에게 가장 질이 나쁜 반대를 표한다. 할머니가 기타를 때려 부수는 장면에서 영화관을 박차고 나오고만 싶었다.
단지 기타를 부수었음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 기타 따위야 빌리면 그만이다. 문제는 가족이 음악을 반대한 근거에 있다. 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가족들은 미겔이 음악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로 선친인 -무려 증조도 아닌- 고조할아버지의 일탈을 내세운다. 나는 내 고조할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딱히 관심도 없다. 무엇보다 미겔만이 아닌 그 누구라도 자신의 고조할아버지를 선택하지 않았다. 고조할아버지더러 가족을 떠나 음악을 하라고 부추기지도 않았다. 차라리 ‘향후 음악 산업의 불투명성’이나 ‘동시대 또래 아이들보다 미겔의 가창력이 탁월하지 않음’ 따위를 구실로 내세웠으면 이해라도 하겠다. 그러나 가족이 내세운 것은 -무려- 고조할아버지의 과오뿐이었다. 이것이 미겔의 기타가 부서졌어야 할 이유가 되는가? 어째서 미겔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어야 했던가 말이다!
스크린 밖에도 수많은 미겔들이 있다. 힙합을, 춤을, 영화를, 문학을, 노래를, 부모가 바라지 않는 일과 학문을 꿈꾸는 수많은 미겔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미겔들을 탄압하는 미겔들이 선택하지 않은 수많은 이유들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미겔들은 스스로 따뜻한 밥과 은신처를 확보할 수 없고, 가족은 이를 무기로 겁박하여 온다. 마침 영화 <코코>에서도 집을 나간 미겔을 찾는 미겔의 부모는 이렇게 외친다.
“미겔 어딨니? 밥 먹어야지!”
자신의 이해 밖에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의 이해 밖에도 세상이 있음을 인정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어른이라면, 더욱이 부모라면 응당 그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코코> 속 가족들은 망자의 일탈과 맞서 싸울 뿐, 이해 밖의 세상이 한 소절 흥얼거릴라치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표한다. 영화는 영화적으로 흥미롭게 이 비극을 어물쩍 넘어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코코>는 개인의 꿈을 가족 간의 유대로 속박하며, 이를 감동으로 구렁이 담 넘듯 치환한다. 더구나 <코코>는 영화이고 그중에서도 상상이라는 운신의 폭이 훨씬 넓은 애니메이션이다. 미겔은 ‘죽은 자들의 공간’으로 간다. 모험을 하게 되고, 극적인 사건을 경험한다. 그제야 가족들 앞에서 노래 부를 수 있었다.
자, 이제 스크린 밖의 진짜 미겔들을 보자. 그들에게 이처럼 꿈같은 일이 생기기는 할까? 정작 현실의 미겔들은 기타가 부서지는 순간, 세상이 무너진다. 어쩔 수 없이 따뜻한 삶을 위해 몸을 가족에 의탁하더라도 그 이루지 못한 상처는 생명이 지속하는 한 따라온다. 못 먹고 못 입던 시절에만 한(恨)이 서리는 것이 아니다.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는 근대적일 수 없다. 전체에 의해 개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당하는 사회는 거꾸로 가지는 않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이다. 전근대의 '백성'이 근대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자발적이고도 이성적인 판단을 이행하는 '주체로서의 개인'이 우뚝 서야 하기 때문이다. 기타가 아닌 신발을 든 미겔이 '주체로서의 개인'으로 성장하리라 믿지 않는다.
그리하여 <코코>를 감히 전근대적 영화로 규정한다. 나는 주인공이 선택한 적도 없는 가족이 주인공의 정체성을 그 어떤 해괴한 논리로 파괴하려 들 때, 이를 당당히 부수고 나아가는 동화를 보고 싶다. 그리하여 아직 있지도 않으며,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미래의 내 아이가 논리적으로는 불충분하나 자기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움직임을 비추어오며 이것이 '나의 꿈'이라고 했을 때, 망자의 사진 따위를 들어 올리며 막아서는 부모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코코>를 함께 보는 일도 없을 것이다.
영화를 두고 사회적 효용을 따져 묻는 일은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한다. 하나는 작품 자체를 깊게 바라볼 안목이 부재함에 따름이다. 겸손이 아님에도 말이 길어질수록 그리 읽힐까 두려워 부연은 하지 않기로 한다. 둘은 영화의 힘이 너무 세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는 좀 더 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코코>는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사의 작품이다. 무수히 많은 어린이가 이 작품을 볼 것이다. 아이들은 델라 크루즈가 나쁜 사람이고 헥터와 미겔 그리고 그 가족들이 착한 사람이며, 결국 가족들이 화해하고 나쁜 사람을 물리친 이야기로 <코코>를 기억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이다. - 직접 조사한 바가 없어 송구스러우나 - 높은 확률로 미겔의 꿈에 관하여는 기억하지 못하거나, 덜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가고, 그중 몇몇은 미겔의 나이가 되어 미겔의 문제에 부딪힐 것이다. 또 그중 몇몇은 자신의 이해 밖 세상에는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는 존재들과 맞서며, 마치 벽을 대하는 심경을 느껴야 할 것이다. 또한, 그중 몇몇은 아픔을 애써 잊은 채, 가족이라는 반대해서는 안 될 가치에 순응하며 살아갈 것이다. 나는 이 비극에 기여할 수 있는 영화에 좋은 평가를 할 수 없었다. 영화는 너무 힘이 세기 때문이다.
다시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영화를 그렇게까지 봐야 합니까? 그랬으면 좋겠다. 잘 만들어진 감동에 그저 끌려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영화 보기’가 그저 스크린을 향해 눈과 귀를 열어두는 행위여도 좋다고 앞서 말하였으나, 영화만 있고 자신이 없는 감상에는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라는 매체로 사람들을 감동하게 함은 영화의 일이나, 그 어떤 감동이건 취사선택한 후 예리하게 잘라내어 받아들임은 오롯이 감상자의 일이기 때문이다. 곧 감상자의 일을 행하는 방법 중 하나로 ‘그렇게까지 보기’가 더해질 수 있음이다. <코코>를 사례로 한다면 이런 식이다. 영화가 기억하라고 한 메시지가 아닌, 다른 메시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가족의 사랑이 아닌, 미겔의 꿈을 기억하는 감상자로 남겠다. 계속 그렇게 볼 것이다. 그렇게까지 볼 것이다.
세상의 모든 미겔들에게 꿈꾸는 내일이 있기를!
참고
¹
- 사실 그 누구도 필자에게 그렇게 물어온 바 없음.
²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 대사전, "시너지(synergy)" 항목 중
- http://stdweb2.korean.go.kr/search/List_dic.jsp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다음 영화, <코코> 포토 중 포스터
- http://movie.daum.net/moviedb/photoviewer?id=110929#1220313
* ~ *****
- IMDb, <COCO>, Photo Gallery
- http://www.imdb.com/title/tt2380307/mediaindex?ref_=tt_mv_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