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Oct 15. 2017

무뎌진 칼날 _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리뷰

여든네 번째 지난주




들어가며 _내재적 리뷰와 외재적 리뷰


 단 한 번도 영화 비평(critism)을 쓴 일이 없다.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보았더니 좋았더라” 수준의 ‘인상(印象)을 나열’(review)할 뿐이다. 그러나 꿈을 비웃는 일이 금기시된 세태에 기대어, 당당한 양 소리 내어본다. 언젠가는 제대로 된 비평이라는 것을 써내고만 싶다. 이를 위해 미세하나마 단련하는 시도는 안과 밖을 구분하여 이루어진다. 이른바 문학비평의 영역에서 행해지는 내재적 비평(內在的 批評)과 외재적 비평(外在的 批評)이라는 비평의 방향성을 늘 염두에 둠이다. 하지만 아직은 비평을 쓰지 못하는 탓으로, 감히 ‘내재적 리뷰’와 ‘외재적 리뷰’라는 어색한 조어(造語)를 시도한다. 노래방에서 가사를 바꾸어 부르던 친구를 곰살맞게 대하지 못했던 기억에 멈칫한다.


 이 땅에 영화비평이라는 것이 당도하였을 때, 영화 그 자체에 주목해 내재적 비평에 천착한 영화주의자와 사회적 현상으로써의 영화 읽기에 탐닉한 외재적 비평 지향자의 그룹이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 ¹ 하지만 이 둘을 엄정하게 자를 수 없으며, 당연히 흐릿한 경계를 넘나들었으리라…. 그리고 그 비평 방식의 순서 또한 정밀하게 앞선 것과 뒤따르는 것을 줄지을 수는 없을 터이다. 하지만 감히 공부하는 자로서, 우선하여 나의 선 자리를 작품 자체의 범주 내에 두고, 영화를 면밀하게 읽으며, 작품의 의미와 구조를 이해하고 또 평가함이 옳다고 믿는다. 곧 ‘내재적 리뷰’를 먼저 함이다. ² 그 이후에야 ‘외재적 리뷰’를 행하면, 영화가 지닌 사회·역사적 가치를 나름의 시선으로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주, 어떤 한 편의 영화는 ‘외재적 리뷰’를 선행할 것을 종용하며 다가왔다. 그런데 딱히 영화의 외연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것이, 바로 그 주된 바깥의 출발점이 작품의 전작(前作)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전작을 보지 않고서는, 아니 나름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감상이 여의치 않은 작품인 셈이다. 이렇게 불친절할 수가 없다.



※ 여든네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Blade Runner 2049, 2017)>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이 글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비롯하여 본 영화의 원작인 1982년 작 <블레이드 러너>까지도 포함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두 편의 스포일러를 모두 포함한다는 뜻으로, 위 영화 두 편 -특히 <블레이드 러너 2049>를-을 관람하지 않으신 분은 감상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리뷰의 순서

들어가며 _내재적 리뷰와 외재적 리뷰

1. 원작에 대한 최고의 찬미 _1982년 작 <블레이드 러너>에 관한 리뷰를 우선하는 사유

2. <블레이드 러너>(1982) 리뷰
  2.1 인간 사본의 사본의 사본의 사본의 사본들에게 질문하는 영화
  2.2 생명의 유한성을 물어오는 영화
  2.3 그래서 우리는 누구인가?

3.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리뷰
  3.1 외롭지 않은 황홀한 심사
  3.2 이 시대 가장 특별한 감독의 존재
  3.3 인간다움에 관한 성찰

4. 무뎌진 칼날

나가며 _더없이 예리한 칼날의 영화를 기다리며









1. 원작에 대한 최고의 찬미 _1982년 작 <블레이드 러너>에 관한 리뷰를 우선하는 사유


 또 말해야겠다. 이렇게 불친절할 수가 없다! 무려 35년 전에 개봉한 영화를 보고 와야 한다니…. 물론 1982년 작 <블레이드 러너>를 감상하지 않는다 하여도 2017년 작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는 단지 우리의 망막이 스크린이 내뿜는 빛에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심동(心動)할 수 없는 탓으로, 기꺼이 시간을 거스르기는 하겠다. 다행스럽게도 1993년에는 ‘감독판(Director's Cut)’이, 또 2007년에는 ‘최종판(Final Cut)’이 우리 곁을 찾아온 바 있다. 10년만 돌아가면 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수고스러운 역행을 통해 원작의 위대함을, 그리고 원작을 대하는 속편의 경외 어린 시선을 엿본다.


 영화는 이제 문화의 영역에서만 한정시켜 논할 수 없으리만치 거대한 하나의 시장이 되었다. 수(數)에 약한 나는 입에 올리기도 버거운 숫자의 돈이 오가는 “무려” 할리우드에서 세계시장을 겨냥하는 작품을 내어놓을 때, 전작에 대한 이해를 이토록 당연시하는 경우는 분명 매우 드문 경우이겠다. 물론 전작에의 깊은 이해는 후속작의 감상에 더없는 도움이 되겠으나, 영화를 일시적 유희의 대상으로 응대하는 상당수의 관객-에 대한 어떤 부정적인 인식도 없음을 밝힌다-을 위해, 그리고 그렇게 예상하고 영화관을 찾았을 관객이 지급하는 관람료의 총합을 생각해서라도 이처럼 불친절하기란 쉽지 않다. 이는 온전히 전작에 대한 예우 그 이상의 무언가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음이다. 감히 견해를 밝히기로, 그 전작은 그만치의 찬미를 받아 마땅한 작품이었음이리라!


 돌아간다. 사실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원작과 단단하게 연결된 한 작품을 리뷰한다는 행위는 마땅히 전작에의 감상을 소환하는 탓이다. 그리하여 먼저 옛 영화를 볼 것이다. 또한, 새 영화도 볼 것이다. 이후, 나름의 감상으로 각 작품을 정리한 후 이를 나열하여 견주어 볼 것이다. 영화의 존재 이유라 할 수 있는 대상인 “관객”을 이토록 번거롭게 한 전작에의 예우가 진정으로 내실 있게 이루어졌는지, 혹은 허울뿐이었는지를 말이다.









[그림 2-1] 영화 <블레이드 러너> (1982) 포스터


2. <블레이드 러너>(1982) 리뷰


  2.1 인간 사본의 사본의 사본의 사본의 사본들에게 질문하는 영화


 적절한 비유가 되기를 바란다. 소셜 미디어에서 소위 ‘짤방’이라 불리는 재미난 사진을 본다. 우리는 습관처럼 ‘저장하기’를 누르거나 ‘캡처’를 한다. 그리고 나의 계정에 옮겨 전시한다. 물론 이는 명백히 내 게시물은 아니다. 그리하여 출처를 남기려 한다. 이미지를 발견한 사이트의 주소를 복사한다. 그런데 그것이 그 이미지의 시작이 맞는가? 시절이 좋아져 구글(google.com)에서는 이미지를 검색할 수 있다. 높은 확률로 자신이 발견한 커뮤니티의 게시판은 그 시작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구글의 이미지 검색에서 가장 먼 때로 기록된 이미지는 그 시작이 맞는가? 확신할 수 없다. 이렇게 원본을 찾아 헤매는 와중에도 수많은 사본과 사본의 사본이 전해지고 있다. 이윽고 최초의 원본 따위는 의미를 잃는다. 도리어 인기 있는 사이트나 소셜 미디어 계정의 주인공이 원본의 출처로 둔갑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두고 선대의 철학자들은 “시뮬라크르(simulacre)”라 이름하였다.


 “시뮬라크르(simulacre)”에 대해 학습할라치면 어김없이 플라톤의 이름이 전면에 등장하고는 하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부처님으로 일컬어지는 석가(釋迦)가 가장 우선한다고 여긴다. 이 문답을 보자. 육신이 죽어도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설은 어찌할 도리가 없이 ‘자기 동일적 자아’의 존재라는 질문에 부딪힌다. 이 질문에 대해 석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고 전한다.


어떤 사람이 한 등에서 다른 등으로 불을 붙인다고 할 경우, 한 등이 다른 등으로 옮겨간다고 할 수 있겠는가? ³


 심오한 선문답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을 터이다. 심지어 붓다조차도 죽음을 경계로 자아가 존속하는가 아닌가를 묻는 일에 관하여, '예'나 '아니요.'로 간단히 답할 수 없다고 답하고 있음이다. ³ 차라리 등불을 끌어들인 이 답변에서 주지할 바는, 등불의 불이 그 자체로 동일한 등불인가라는 의문에 있겠다. 죽음 이전의 자신조차 자기 동일적 자아의 존재 유무 앞에 분명할 수 없음이다. 이 이후에 등장하는 플라톤이니, 니체니, 장 보드리야르며, 질 들뢰즈니 하는 이름들은 모두 위의 석가와 같은 문제를 논하고 있다. 물론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마다 ‘시뮬라크르’에 대한 입장은 조금씩 변모하지만 -또한, 그 변모가 무척이나 의미 있음에도(특히 플라톤의 그것은 질 들뢰즈에 이르면 정반대의 이해로써 정의되나 여전히 ‘시뮬라크르’는 옹호받는다 ⁴)-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이해에 필요한 만치만 들어가기로 한다. 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최대한 간추려 설명하자면, 이 ‘시뮬라크르’라는 것은 사본의 사본의 사본, 모사의 모사의 모사가 일어나며 결국 원본과 사본의 구분이 의미 없어지는 개념을 이른다 하겠다.


[그림 2-2] Warhol Andy,  Campbell's Soup Can,  1962.


 영화 리뷰가 맞다고 항변해본다. 이제야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본다 할 수 있지만, ‘이제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위에서 줄곧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논하였다. 우리가 손쉽게 담아온 사진들은 타이렐 사가 찍어내듯 제조하는 리플리컨트(replicant)의 다름 아니다. 리플리컨트를 쫓던 데커드(해리슨 포드 분)가 종국에는 리플리컨트에게서 구원받으며 도무지 누가 더 진정한 인간인지를 알 수 없는 지경에서 마주하는 의문은 석가에게 질문한 자의 심경에 또한 다를 바 아니다. 질 들뢰즈의 주장은 또 어떤가! 들뢰즈는 시뮬라크르는 시뮬라크르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시뮬라크르는 어떤 절대적 기준에 의해 그 가치가 평가될 수 없다고 주창한 바 있는데, 이는 더는 모사물로서의 의미를 논할 필요가 없을 만치 발달한 레이첼(숀 영 분)이라는 존재와 이런 레이첼과 사랑에 빠지며 도피를 하기에 이르는 데커드의 모습으로 현현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에 이르자면 영화의 시간과 공간을 설명할 수 있다. 그는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할 수 없는 지경까지 대체하여 더는 모사할 실재가 없어지면 모사된 이미지가 더 실재 같은 하이퍼리얼리티(초과실재)가 생산된다고 주장하였는데, 바로 이 사태가 그대로 전시된 시간과 공간이 2019년 로스앤젤레스였던 것이다. ⁴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이토록 깊었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2.2 생명의 유한성을 물어오는 영화


 ‘시뮬라크르’라는 거창하게 들리는 철학적 개념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얼마나 심도 깊은 영화였는지는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빌려오는 것이다. 누군가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우리는 대체로 죽은 이의 나이를 정확하지는 않으나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다. 세상에 흩뿌려진 비극을 눈물을 삼키며 제외하고 나면, 요즘은 대체로 80, 90이라는 햇수만치 사람이 산다 한다. 우리는 응당 그런 줄로 알고 있다. 그 숫자 앞의 우리는 어련무던하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난다. 자신은 4년밖에 살지 못한다고 한다. 이상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이가 부지기수로 등장한다. 자신들은 4년밖에 살지 못하노라며 자신들의 생을 고작 4년으로 설계한 자를 좀 만나봤으면 한다며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4년짜리 인생은 자신의 창조주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대면하였다가 그 짧디 짧은 유한함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파괴한다. 이제 이 처절한 사태를 스크린 밖에서 목격한 우리를 본다. 우리는 이윽고, 그 4년짜리 인생을 마주하고서야 고개를 돌린다. 우리의 입은 질문 한다. 우리는 왜 80년짜리 인생입니까?


[그림 2-3] 영화 <블레이드 러너> 스틸컷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익숙해질 만치 익숙해져서 이제는 문제로도 자각할 수 없는 문제로 우리를 안내한다. 바로 인간의 유한성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정확히는 우리가 유한성이라는 화두를 외면한 것만은 아니었다. 인류는 늘 노화와 질병과 끊임없는 투쟁을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차라리 이 유한성이라는 뻔한 문제에 무감각해졌다고 표현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일침을 가해온다. ‘그저 웃지요’라는 태도로 살아가던 이가 별생각 없이 영화관에 앉았는데, 불과 4년짜리 인생이 자신 창조주의 눈을 후벼 파며 파괴해 버리는 순간을 볼라치면, 불현듯 주어진 생에의 자각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 자각은 역설적이다. 창조주를 제거하며 예정된 최후를 더 늘일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마저 스스로 제거한 로이(룻거 하우어 분)는 이전까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블레이드 러너에게 쫓겨 다녔던 것과는 달리, 자신을 추적하던 데커드를 뒤쫓게 된다. 이는 생물학적인 죽음에 쫓기던 로이가 타이렐 회장을 죽임으로써 필연적인 죽음을 스스로 인계한 상황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곧 역설적이게도 더없이 자유롭고도 능동적인 로이의 모습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⁵ 이처럼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태어나며 동시에 늙기 시작하는 우리의 슬픈 필연에 절망할 줄 알았던 인간 본연의 고뇌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2.3 그래서 우리는 누구인가?


 <블레이드 러너>는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만을 응시하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들여다보며, 곧 인간의 근원과 본질 또한 탐구하였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기억’은 매우 중요한 실마리로 작용한다. 영화 속 인간과 리플리컨트를 구별하는 결정적 근거는 다름 아닌 ‘기억’이다. 리플리컨트들은 그들에게 주입된 ‘파편화된 기억’만을 지니고 있어 그들이 리플리컨트인지 여부는 기억에의 질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처럼 ‘기억’이 리플리컨트와 인간을 분별하는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음은 역설적으로 인간성의 중심에 ‘기억’이 자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경험이고 따라서 개인의 정체성은 경험에 의한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라는 경험론자 존 로크(John Locke)의 주장을 빌릴 수 있는 대목인 셈이다. ⁵


 또한, 영화에서 ‘기억’은 사진과 같이 이미지화되어 주입된다. 곧 그 어떤 경험보다도 ‘눈으로 봤다’라는 행위는 ‘믿음’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영화에서 ‘눈’은 ‘기억’ 못지않게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영화는 그 시작부터 인간의 ‘눈’을 클로즈업하여 도시 전경과 교차 편집하며 관객과 조우하더니, 리플리컨트를 구별할 적에도 ‘눈’을 통한다. 리플리컨트를 구별하는 근원은 ‘기억’이나, 그 창은 ‘눈’이기 때문이다. 곧 ‘눈’의 변화를 추적하는 것이다. 다시 타이렐 회장의 죽음을 떠올린다. 그를 죽음으로 인도한 이와 죽음의 모습은 모두 ‘눈’과 연관된다. 이처럼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일관되고 엄숙하게 그리고 준엄하게 ‘보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곧 이만치 중차대한 행위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곧 그래서 지금의 우리는 누구인가?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묻고 있다.


[그림 2-4] 영화 <블레이드 러너> 스틸컷









[그림 3-1]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포스터



3. <블레이드 러너 2049> 리뷰


  3.1 외롭지 않은 황홀한 심사


 영화관에서는 누구나 고독하다. 누구도 혼자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연인과 나란히 착석하였다 하여도 불이 꺼지고 스크린으로부터 최초의 빛과 소리가 감각으로 전해지는 순간부터 오로지 영화와 일대일로 맞선다. 그리하여 감상한다는 행위의 외연은 외로운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와중에 영화는 이야기를 구성한답시고 쉼 없이 정보를 전달한다. 깜빡 졸다가 중요한 대목을 놓쳐버리면 이해하고 말고를 떠나, 티켓값이 아련해진다. 고독하다고 태연하게 맞설 수도 없다. 긴장을 한 채다.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이 고독과 외로움을 얼마든지 덜어낼 든든한 장치를 갖추었다.


 영화가 오지 않은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 중에서도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는 단연코 암울하다. 공해가 심해 스모그는 짙고, 산성비는 그칠 줄 모른다. 거대한 빌딩으로 가득하지만, 인간성은 상실된 도시이다. 그런 지구를 그릴라치면 그저 우울하게만 채색하면 될 것 같은데,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이 임무를 능히 완수하면서도 미적 가치에의 달성까지 이룩한다. 이는 주로 건축물과 색상으로 구현된다.


 <블레이드 러너 2049>가 미래의 로스앤젤레스를 담아내며 가장 공들였을 시각적 요소는 단연 건축물로 사료된다. 이는 2049년의 로스앤젤레스를 부감하는 첫 장면부터 관객을 압도하며 다가온다. 건축물군 뿐만이 아니다. 거리에서 마주하는 개별 건물들 또한 로스앤젤레스라는 도시의 기억을 지닌 채로 그 처절한 황량함을 누락 없이 응축한다. 이 같은 감상은 K(라이언 고슬링)가 찾아간 월레스 사의 내부에 이르면 충만할 대로 충만해진 미적 쾌감을 선사한다. 군더더기가 없어 일견 미니멀리즘으로만 표상되기 쉬우나, 스케일의 조작을 통한 신성성의 구현은 단지 ‘멋들어진’ 공간을 표현하는 것만이 이 영화의 목표가 아니었음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그림 3-2]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스틸컷


 물론 1982년의 원작에서도 이 같은 성취는 드러난다. 최효식 교수는 논문 「시뮬라크럼에 의한 블레이드 러너의 포스트 모더니즘 특성분석」을 통해, <블레이드 러너>가 메가스트럭쳐(megastructure)로 상정될 수 있는 로스앤젤레스의 거대 건물로 레이트 모더니즘(Late Modernism) 성격을 실현함과 동시에, 브레드버리와 같이 로스앤젤레스의 지역성까지도 구현시키며 포스트 모더니즘의 공간을 창출해내었다고 진단한다. ⁶ 논문을 있는 그대로 가져오며 증폭된 난해함을 한 문장으로 갈음하며 정리한다. 이는 곧 건축물을 활용하여 새로운 영상미학을 이룩하였음이다. 그런데 단연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이 영상미학에 있어 1982년의 원작에 비해 진일보한 족적을 내딛음은 물론, 동시대의 SF영화, 아니 거의 모든 영화라고 하는 것이 지닌 장면들이 가랑이가 찢어지는 뱁새가 될까 두려워 쉬 쫓을 수조차 없는 수준으로 저만치 달아나 버린다.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시각적으로 얼마나 섬세한 계획을 지닌 작품인지는 색상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푸른색이 주요 배경이 되는 K의 세상과 붉은색으로 뒤덮인 헤커드의 세상은 명확한 대비를 이룬다. 하지만 이는 쉽게 관객에게 발견당하지 않으면서도, 이 두 인물의 관련성이 -K의 바람과는 달리- 멀어져 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둘로 나누어진 색의 구성에서 유독 데커드의 딸(카를라 유리 분)이 있는 공간만은 일시적이나마 생명력을 상기시키는 초록색으로 선보여지며 영화의 결말과 조응한다. 플롯과 색상계획이 별개가 아닌 치밀한 계획에 의하여 구성되고 설계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 3-3]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스틸컷, 세 가지 다른 색상 구성


 전설적인 촬영감독인 로저 디킨스라는 이름만으로도 부연은 구차한 일이 되겠으나, 화면 자체의 미적 완성도를 극대화하겠노라는 작심이 섬뜩하게 느껴지리만치,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장면과 장면들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정말이지 스틸컷을 출력하여 벽에 걸어두고 싶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런데 <블레이드 러너 2049>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황홀한 심사는 단지 화면뿐이 아니다. 그 소리 역시 관객의 외롭고도 처절한 감상에의 사투를 달래고도 남는다. 이는 단지 듣기 좋은 사운드 트랙이 배경으로 깔리는 차원을 넘어서며 이룩된다. 이는 곧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사운드가 관객이 영화를 체험하며 느끼는 감상의 주요 순간마다 적절히 개입하였음을 의미한다. K의 감정선으로부터 영화 전체의 긴장감에 이르기까지 색상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설계된 채로 개입하는 것이다. 1982년의 원작에서 반젤리스의 음악이 영화의 분위기와 탁월하게 맞아떨어진 성취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대목이라 할만하다. 이로써 관객은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보며, 아니 접하며 전혀 외롭지도 고독하지도 않은 황홀한 심사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2 이 시대 가장 특별한 감독의 존재


 자신 없다. 만일 드니 빌뇌브라는 감독의 존재를 모른 상태에서 그의 장편을 일제히 나에게 보여준 후, 각 작품의 감독 이름을 대라고 하면 적어도 그 작품들이 한 사람의 연출이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그는 짧은 경력에도 빛나는 성과를 이룩하였는데, 그 걸음들이 보이는 화려한 변주는 이 감독이 도대체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는지를 궁금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지다. 그리하여 그는 이내 '가능성'으로 인식되어 영화관으로 향하는 관객이 감독의 이름을 바라보며 기대치를 품는 몇 안 되는 이름들에 일찌감치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그런 그가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메가폰을 잡는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그림 3-4] 드니 빌뇌브 감독과 라이언 고슬링


 빌뇌브 감독의 전작을 살핀다. 우선 <컨택트>가 떠오른다. 미지의 세계와 조우하는 가장 세련된 영화적 방식을 그려낸 바 있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의 황량하며 건조한 먼지들이 옳고 그름을 희미하게 한 작은 전장에서 고통받던 개인을 기억한다. <에너미>의 분열된 자아와 <프리즈너스>의 느린 긴박감, 처절한 진실을 담아낸 <그을린 사랑>에 이르기까지 그는 돌아서서 한참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확장하는 영화를 떡 찍어내듯 뚝딱뚝딱 만들어내고는 했다. 그런데 이처럼 그의 필모그래피가 변주하는 와중에도 그만의 언어와 방식은 확고해져 갔다. 몰랐던 정보를 알아가며 점층적으로 몰입감을 높여가고, 느린 호흡은 종국에 이르러 치달리는 결말을 형성하며, 그 일련의 과정에서 단출하리만치 그 어떠한 수식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특징은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K는 비록 잘못된 정보로 혼란을 겪으나 데커드를 찾아가며 스스로 변모해 나가고, 결국 절정의 문 앞에서 긴장감은 극대화되며, 이 모든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도 삭막하리만치 불필요한 꾸밈은 배제된 채 오롯이 칼날 위를 달려 나갈 뿐이었다. 분명 드니 빌뇌브의 작품이었다.





  3.3 인간다움에 관한 성찰


당신이 아들인 줄 알았는가?


 K는 주저앉는다. 그간 확신을 품은 채로 데커드를 찾아 나섰던, 아니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믿고 또 받아들였던 시간과 순간들이 허망했을 지다. 그는 혼란스럽다. 그러던 중 죽은, 아니 사라진 조이(아나 드 아르마스 분)와 재회한다. 물론 다시 만난 조이는 K만의 조이는 아니다. 광고 속 조이는 K를 위로하지만, 예전의 그 위안이 될 수 없다. K는 그런 조이를 바라보다가 이내 총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총은 데커드가 아닌 러브(실비아 혹스 분)를 향한다.


 아마도 K는 조이를 다시 만난 이후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에 관하여 숙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전에 데커드와 만났을 때, “사랑하는 이를 떠날 수 있음도 사랑”이라는 데커드의 말은 광고 속 조이를 만난 장면에 이르자 K로 하여금 ‘떠남’이 아닌 ‘사랑’에 방점을 찍게 한 것이다. 그는 결국 데커드를 구하고 그를 딸에게로 안내하며 생을 마감한다. 더는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인지한 K가 데커드의 딸에 대한 사랑을 인식하고, 또한 스스로 선택하며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랑의 가치를 구현하는 이 결말이야말로 “인간보다 더 인간다움”아니, 그저 "인간다움"에 관한 성찰을 영상으로 담아내며 칼날 위를 달리는 자(Blade Runner)를 더없이 적절하게 적시하고 있음이다.


[그림 3-5]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스틸컷









4. 무뎌진 칼날


 <블레이드 러너 2049>라는 작품만을 떼어놓고 보자면 전혀 손색없이 훌륭한 SF 작품이다. 다소 아쉬운 감이 있으나, 드니 빌뇌브 감독의 필모그래피에도 흠결이 갈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전술하였듯, 이 작품은 오롯이 1982년의 전작으로부터 기인하며 또 기대고 있다. 비교가 아닌 관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외재적 비평이 되었건 리뷰가 되었건 불가피하다. 따져보도록 한다.


 원작 <블레이드 러너>에서 가장 주지할만한 사항은 ‘심오하나 선명했던 철학적 질문들’이었다. 여기서 ‘철학적’이라는 표현으로 굳이 거창하게 묶을 필요도 없다. 이를 ‘심오하나 선명했던, 영화가 다룰 수 있는 가장 깊은 수준의 인간에 관한 질문들’로 풀어 적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어떠한가? 아름다운 영상과 사운드, 가장 촉망받는 감독의 무난한 필모그래피 계승, 그리고 전작에서 이미 천착한 인간에 대한 질문 하나 정도를 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온전한 복기라고 할 수 없다. 원작에서 칼날 위를 달리는 자의 그 칼날은 영화가 할 수 있는 질문의 깊이를 더없이 깊고도 선명하게 새길만치 날카로웠다. 하지만 무려 35년이 지난 후속편은 그저 그 세계관을 손쉽게 이어받고, 발달한 CG 기술을 선보였으며, 대중에게 호평받는 감독을 초대하였을 뿐, 원작이 던진 묵직한 질문에는 조금도 미치지 못한 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런 무딘 칼로는 전작의 깊이에 도달할 수 없다. 원작이 새긴 깊은 질문의 골짜기에 흐르는 심연에 닿을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고는 훌륭한 후속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격찬을 받고 있다고도 한다. 그 찬미의 문장이 어떠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반드시 다음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 <블레이드 러너 2049>라는 제목에서 '2049'라는 숫자를 가리더라도 전작에 대한 평가가 아닌 속편의 그것임이 명백히 드러나야 할 것, 둘째, 이 같은 성취를 달성하는 가운데에서도 전작의 깊이를 준수할 것. 이 두 가지 조건에 부합하였을 때만이 그 찬사는 오롯이 승인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작의 영향력에 안존하면서도 그 깊이는 탐닉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2049년을 목전에 두고 또 한 번의 속편을 구상한다면, 이 깊디깊은 원작에의 심연을 반드시 측정해야 할 것이다.









나가며 _더없이 예리한 칼날의 영화를 기다리며


 드니 빌뇌브가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 연출을 한참이나 고사하고 또 망설였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랬음 직도 하다. 앞서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칼날이 무디어졌다고 성토하였으나, 누가 메가폰을 잡았던들 그 날카로움에 비견될 수 있었을까? 그저 이처럼 새롭게 다가와 주어 희미해진 옛 감동의 그림자를 되새길 수 있었음에 기뻤다.


 한 편의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명작이 너무 자주 나오는 일도 가능세계에서는 요원한 일일 터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 더없이 예리한 칼날의 영화를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드니 빌뇌브 감독이 될 수 있으리라 역시 믿는다.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이라는 굴레 속에 놓임으로써 차라리 그의 운신의 폭은 좁아졌을 것이다. 그가 그만의 시선과 방식으로 더 깊은 심연에 영화의 흔적을 새겨주기를 바란다.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만 신났다.








참고

¹

 - ‘나는 좌파다’ 님의 티스토리, ‘映像의 울림’ 게시판 중, 2008년 7월 25일 자, “영화평론 전문과정 1차 강의 영화비평의 정의” 중

 - http://kamadeva.tistory.com/23


²

 - 굳이 사족을 달자면, 비평을 학습하는 자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섬세한 내재적 비평이 우선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³

 - 한자경, 『불교의 무아론』,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 위키백과, “시뮬라크르” 항목

 - 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B%AE%AC%EB%9D%BC%ED%81%AC%EB%A5%B4


 - 강순규, 「비인간적인 인간과 인간적인 복제인간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아시아영화연구 4권 2호, 2011, pp.133-153 (21 pages)


 - 최효식, 「시뮬라크럼에 의한 블레이드 러너의 포스트 모더니즘 특성분석」, 한국실내디자인학회 논문집 제24권 제1호, 2015.02, pp.93-103 (11 pages)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및 [그림 3-1]

 - 다음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7541


<블레이드 러너> 이미지

[그림 2-1]

 - 다음 영화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1982)> 포스터

 -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962


[그림 2-2]

 - 다음 카페, “아트디렉터 정” 중 ‘아트정의 Choice’ 게시판, “2008년 10월 2일 자 게시물, 모방(mimessice)과 재현(representation)의 변증법, 시뮬라크르(simulacre)”

 -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7Xug&fldid=EuaK&datanum=193


[그림 2-3], [그림 2-4]

 - iMDb, Blade Runner (1982), Photo Gallery

 - http://www.imdb.com/title/tt0083658/mediaindex?ref_=tt_mv_sm


<블레이드 러너 2049> 이미지

[그림 3-2], [그림 3-3], [그림 3-5]

 - iMDb, Blade Runner 2049 (2017), Photo Gallery

 - http://www.imdb.com/title/tt1856101/mediaindex?ref_=tt_mv_sm


[그림 3-4]

 - 다음 영화, 드니 빌뇌브, 포토

 - http://movie.daum.net/person/photoviewer?id=146048#460970


이전 08화 스크린 밖의 미겔들을 위하여 _ 영화 <코코> 리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