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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Oct 09. 2016

늙어서 미안해 _ 영화 <죽여주는 여자> 리뷰

서른한 번째 지난주




찬바람의 시간     


 더 추워질 것이다. 이른 감이 있지만, 대체로 자연의 위대함으로 분류되지 않는 계절의 뻔한 전개를 놀리듯 예단한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 군상의 퍼덕거림과 마주하면 사태를 좀 진지하게 바라봐야 할 필요가 생긴다. 온도라는 수치가 인간군을 섬세하게 구분하는 탓이다. 담소의 소재가 되는 ‘추위를 잘 타는 사람’ 따위의 차원이 아니라, 실지 1℃의 증감에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단지 36.5℃에서 멀어지는 정도의 차이가 아닌, 마음의 쓸쓸함으로 그 누구보다 추워질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 시간이 더 추울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어 굳이 스크린에까지 옮겼다 한다. 세상 따위 마냥 아름답지마는 않다는 것쯤이야, 밥 먹을 만큼 먹은 당신도 나도 아는데, 굳이 그것을 영화관까지 가서 내 돈 주고 봐야 하느냐라는 가능한 견해에 일견 동의한다. 그럼에도 이 한 편의 영화는 나름의 당위성을 부르짖는다. 낮게, 낯설게, 낯 뜨겁게.     



※ 서른한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에서는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이 글은 영화 <죽여주는 여자> 리뷰 글로서, 영화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영화 내용을 알고 싶지 않은 분은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낮게 _ 사회에 말을 거는 영화     


 드론이 인기라 한다. 사람들은 그간 보지 못했던 시선을 확보하는 기쁨으로 드론에 빠져드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른바 부감(俯瞰)이 제공하는 특별한 풍광에는 쉬 간과되는 것이 있다. 바로 가려진 것들이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이처럼 가려져 잘 안 보이는 것들에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노인, 박카스 할머니, 코피노 소년, 트랜스젠더, 장애인, 이주노동자, 노동운동가, 농민……. 꼭 영화 때문이 아니더라도 평소에 마음먹고 몸을 낮추지 않았더라면 인지하기 힘들었을 대상들이다. 이들은 곧, 연출을 맡은 이재용 감독이 평소에 세상을 바라보았던 시선의 높이를 짐작게 하는 대상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은 어째서 스크린을 통해 한 편의 영화가 될 수 있었을까? 혹은 되어야만 했을까?     


 잠깐 멀리 가 본다. 이나라 박사는 자신의 저서 『유럽 영화 운동』의 서문에서, 영화는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때부터 집단지성의 소산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영화는 언제나 여러 사람들의 협업의 결과로 탄생하여, 영화관에 모여든 사회 속 복수의 관객들과 만났다는 것이다. ¹ 이는 영화라는 매체가 언어를 공유하는 사회집단의 공동 창작물이라는 확대해석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와의 관계와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는 추측만큼은 가능하게 한다. 가까운 곳의 동시대를 살아가는 연출자도 이와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최근 ‘JTBC 뉴스룸’에 출연한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사회 문제의 책임이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인 우리에게 있다는 발언과 함께, “그 원인이 된 사회적 요인을 파악해가는 것이 영화감독으로서 필요한 태도가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영화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발언이다.     


 다시 <죽여주는 여자>로 돌아온다. 한국사회라는 하나의 구조가 작동하던 흐름으로부터, 공동으로 외면당한 존재들이 보인다. 물론 이들은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등에서 소재로 기능한 바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영화의 사회에 대한 책임이라는 의미에 더하여, 영화라는 매체가 보는 이에게 전달하는 감정의 힘은 여타의 매체가 흉내 낼 수 없는 위력이 있음을 상기한다. 영화는 여전히 2016년 한국사회가 가장 바깥으로 내몬 사람들을 비추고 있다.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이 영화가 걸어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어두운 곳에 조명을 비추고, 카메라를 설치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작용이다. 그 말들은 사회, 곧 우리를 향한다. 물론, 답변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


* 영화 <죽여주는 여자> 촬영 중 연기에 대해 논의하는 이재용 감독과 윤여정 배우





낯설게 _ 차갑도록 담담한


 뱉은 문장 하나를 도로 집어온다. “영화라는 매체가 보는 이에게 전달하는 감정의 힘은 여타의 매체가 흉내 낼 수 없는 위력이 있음을 상기한다.” 이 문장은 <죽여주는 여자>가 소재로 택한 존재를 스크린에 옮길만한 당위가 된다는 설득의 과정에서 펼쳐졌다. 하지만, 지극히 아슬아슬한 줄타기 역시 바로 이 당위에 기댈 때 이루어진다. 영화가 주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그 자체로 과용하게 되면, 감정의 난무 정도가 문제가 아닌, 소재의 매몰과 메시지의 희석에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치 영화라는 매체가 지니는 감정의 힘이라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도 무섭다.     


 계절만큼이나 뻔한 전개로 <죽여주는 여자>는 이를 이겨내었음을 전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담담하게 대상을 바라본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다소 지루하다고도 느낄법하다. 하지만 이는 소재와 배경 자체의 낯섦으로 인한 탓이 크다. 주연을 맡은 배우 윤여정 씨조차 “이런 세상이 또 있구나!” ² 했을 정도의 낯선 세계, 그 낯섦에는 굳이 어떤 치장이 필요하지 않았다. 담담하기만 하여도, 충분히 슬프고, 더할 나위 없이 아프다.     


 이왕 ‘보는 이’를 소환하였으니, 다른 입장에 선 ‘보는 이’의 가능한 관점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주인공인 소영의 모성애가 그 자체로 과잉된 영화적 감정이 아니냐는 반론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이 여자를 모성애에 가둬놓을 생각은 없다. 그저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적극적으로 베푸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³ 는 감독의 인터뷰에 굳이 기대지 않더라도, 모성애 자체가 극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주지하였듯, 소영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은 지극히 한국적인 사회 구조에서 외면당한 이들이지만, 여전히 한국사회 안에 있다. 소영이 민호에게 계란말이를 권할 때, 어쩔 수 없이 또 비치는 그놈의 김치는 - 징글징글하지만 - 여전히 이들이 한국이라는 터전에 발을 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그들은 또한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로 서로의 어깨를 빌려주기도 하는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모두 한국의 것이다.          


**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한 장면





낯 뜨겁게 _ 그 삶이 되는 연기


 영화를 평할 때, 배우의 자질을 논하는 것의 무의미함에 대해 늘 생각해왔다.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는 그저 순전히 능력의 문제이기에, 혹시 연기가 아쉬웠던 배우를 만나게 되면 4타수 무안타를 기록한 야구선수에 비견하고는 하였다. 하지만 아주 연기가 좋았다고 말해야 할 경우에 그것은 4타수 4안타를 친 야구선수에 비유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부족하다는 뜻이다. <죽여주는 여자>의 윤여정의 연기가 그러하였다. 이는 그저 연기가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가 3가지쯤 있다면 그중 하나이며, 굳이 하나의 이유만을 꼽으라 한다 해도 필자는 소리 높여 윤여정의 연기를 꼽을 것이다.     


 장면들을 복기해본다. 야동을 처음 본 중학생 같은 나이 든 수컷을 응대하며 도구가 되던 손짓에서, 마지못해 인터뷰에 응해주다 새어 나온 새침함에서, 농약을 들이붓는 제 손을 바라보지조차 못하는 눈빛에서, 미군을 바라보며 사진 속의 그 존재를 상기하는 떨림에서, “저 사람도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라며 울음을 삼키던 목소리에서……. 이 장면들은 윤여정이 아니었으면 안 되는 이유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전혀 몰랐던 세계로 들어가면서도 기어이 소영이 되고야 만, 낯 뜨거우리만치 완벽하게 죽여주는 여자가 된 배우 윤여정 님께 찬사를 보낸다.          


***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윤여정









늙어서 미안해


 버린다. 안 버리고 어떻게 사나? 사회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불필요한 것들은 버려진다. 그런데 우리는 노인을 버린다. 늙으면 버리는 사회에서, 남아있는 목숨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노인들이 유령처럼 공원을 배회한다. 눈빛도 아닌 박카스와 몇 장의 만 원짜리로 이루어지는 대화는 욕망에 더불어 생명을 확인하는 절차로 기능하지만, 낡디낡은 배경과 행위는 슬픔을 더할 뿐이다. 그나마 박카스를 받아 드는 노인들은 기력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 기력조차 소진된 노인들을 비춘다. 최승자 시인의 시 <오 모든 것이 끝났으면> ⁴에서처럼 ‘그러나 그보다는 차라리 / 빨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하는 마지막 울부짖음만을 겨우 내뱉는 시간과 감정이라는 것은 도대체가 가늠조차 되질 않는다. 이제 겨우, 영화 <죽여주는 여자>가 낮게 응시해준 덕분으로 겉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한다. 그렇게 영화는 시종일관 늙어서 미안한, 그리고 늙어서 미안하다는 위로조차 주름진 얼굴끼리만 나눌 수 있는 이 기이한 사회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비춘다. 보면 아픈데, 안 본다고 피할 수도 없다. 당신도 나도 다 늙는다.


**** 젊은인구(18세~25세) 대비 노인 빈곤(65세 이상)을 보여주는 OECD 통계치





참고


¹

 - 이나라, 『유럽 영화 운동』, 커뮤니케이션북스, 2015


²

 - 연합뉴스, 구정모 기자, 2016년 9월 28일 자, “'죽여주는 여자' 윤여정 "칠순에 몰라도 되는 세상 알게 돼"”

 - yonhapnews.co.kr/bulletin/2016/09/28/0200000000AKR20160928192600005.HTML     


³

 - 한겨레, 남은주 기자, 2016년 10월 5일 자, “‘박카스 할머니’에 꽂힌 감독 “불경한 얘기 꺼내 행복하다””

 - hani.co.kr/arti/culture/movie/764154.html     


 - 최승자, 『기억의 집』, 문학과 지성사, 1989 中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아시아 글로브, 노이슬 기자, 2016년 8월 26일 자, “윤여정, '죽여주는 여자' 포스터서 독보적 아우라 발산”

 - theasiaglobe.com/news/articleView.html?idxno=292933     


*

 - 한겨레, 남은주 기자, 2016년 10월 5일 자, “‘박카스 할머니’에 꽂힌 감독 “불경한 얘기 꺼내 행복하다””

 - hani.co.kr/arti/culture/movie/764154.html     


** 및 ***

 - 뉴스엔, 이이슬 기자, 2016년 9월 1일 자, “‘죽여주는 여자’ 윤여정 “파격 캐릭터,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 newsen.com/news_view.php?uid=201609010808045810&search=title&searchstring
   =%C1%D7%BF%A9%C1%D6%B4%C2%20%BF%A9%C0%DA     


****

 - 페이스북 OECD 페이지 중

 - facebook.com/theOECD/?fref=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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