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여덟 번째 지난주
산다는 일은 무언가를 좇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각자가 나름으로 지닌 가치는 분주히도 쫓긴다. 하지만 무엇을 좇을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 정확히는 알고 있음에도 제대로 좇기란 쉽지 않다. 성적이 아닌 공부를 좇아야 하고, 돈이 아닌 일을 좇아야 함에도 우리는 쉽게 반대로 간다. 그렇게 좇는 것이 있고, 따라오는 것이 있다. 고로 나와 나의 방향과 이 좇고 따라오는 존재는 일생의 점검 대상일지다.
좇는다고 하니 오롯이 미래의 일로만 들리겠지만, 또 꼭 그렇지만도 않다. 과거를 돌아봄에도 어떤 시선으로 좇을지에 따라, 지난 시간이 다르게 보일 수 있음이다. 이를테면 일방적으로 남성에 의해 쓰인 역사라는 시간을 다른 성이 지닌 시선으로 바라보는 실천을 들 수 있겠다.
그리하여 나는 치열하게 인생의 좇을 대상을 점검하는 사람들, 자신의 길을 의심할 줄 아는 사람들, 나아가 타인과 그 경험을 나눌 줄 아는 사람들 그리고 좇음을 고민하여 탄생한 새로운 시선을 사랑한다. 마침 지난주, 이상으로 열거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났다. 게다가 그 영화가 지난 시간을 쫓는 시선은 신선하리만치 새로웠다. 그러자면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나는 잔칫날 동네에 떡을 돌리는 심정으로, 이 사랑스러운 영화를 들고서 상기된 표정과 들뜬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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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흔여덟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에서는 영화 <우리의 20세기 (20th Century Women)>에 관해 다루었습니다.
- 본 리뷰는 영화 <우리의 20세기 (20th Century Women)>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므로 영화 내용에 대한 사전 정보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영화 감상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아직 개봉 전인 좋은 작품을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영화 <우리의 20세기>를 논하며, 제목에 관해 언급하지 않음은 일종의 직무유기라고 할 수 있다. 원제는 <20th Century Women>이다. 그대로 가져오자면 <20세기 여인들> 정도로 옮겨올 수 있었겠다. 하지만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 ‘여인들’은 편리한 ‘우리’로 대체되었다. 차라리 <Dead Poets Society>를 <죽은 시인의 사회>로, 그리고 <Legend Of The Fall>를 <가을의 전설>로 직역하며 오역했던 사례라도 답습했더라면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럼에도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의 남쪽에 자리하였을 때 굳이 ‘여성’을 지워야 했던 사정이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이 간다. 영화가 상영되는 국가의 젠더 의식은 배급하는 자의 입장에서 숙고의 대상이었을 지다. 그리하여 결론적으로는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면 ‘여성 영화’라는 틀 속에 갇힌다는 우려가 작용했을 듯싶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작동은 이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인식의 거울상에 다름 아니다.
그나마 근래에 이르러 일상적 공포와 무시 그리고 유리천장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고는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사회생활하기 어려운 모난 성격의 여성들이 소리 지르는 수준으로 격하당한다. 그래야 유별난 소수가 내는 듣기 싫은 목소리로 쉽게 가두고, 기존의 안위를 계속해서 누릴 수 있음이다. 이런 방식으로 구동되는 사회에서 여성의 시선과 발언이 담긴 영화가 들어온다. 변장은 불가피했을지 모르겠다. 당당하게 들어오자니 익숙한 거절과 마이너스가 뻔한 손익계산서가 눈에 밟혔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에게 이 영화의 제목이 <20세기 여인들>이 아닌, <우리의 20세기> 임은 분노를 일으키기보다 아픔을 끌어올린다. 화가 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좋은 영화가 잘못된 제목, 아니 잘못될 수밖에 없었던 제목을 달고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외면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밀어낼 것은 우직하게 밀어내면서, 봐야 할 것은 볼 수 있기를 역시 바란다.
왜 20세기인가?
21세기라 하여 절대적 가치가 우점하지는 않으나, 68 혁명의 기운이 남아있던 70년대는 새로운 가치가 충돌하던 시기였다. 큰 전쟁을 두 번이나 치르고도 서로에 대한 총끝을 거두지 않았던 기나긴 냉전의 시간으로 매카시즘과 적색 공포가 유효했으나, 핑퐁외교부터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리 평화의 방향으로 조금 기울어진 채 역사의 시계추가 작동했다고 하더라도, 이와 관련된 언어는 모두 남성의 것이었다. 전쟁, 냉전, 화합, 평화 등 마치 술자리에서 허풍을 늘어놓는 남성의 그것마냥, 거창한 어휘들로만 채워진 시간이었다. 하지만 냉전과 화합 이면에도 주목해야 할 가치들이 있었다. 더 섬세하게 바라봐야만 보이는 삶과 이야기들이 있었다. 영화 <우리의 20세기 (20th Century Women)>는 바로 이 시절, 그러니까 197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서부에 자리한 산타바바라의 한 가족, 아니 하숙집으로 카메라를 비춘다.
그 하숙집의 구성원은 흥미롭다. 먼저 아네트 베닝이 연기한 도로시아가 보인다. 이혼한 남편이 마련해준 차가 불에 타버린 상황에서도 소방관을 저녁 파티에 초대하는 천성이 건강한 이 주인공은 영화와 하숙집 모두를 지탱하는 중심축으로 역할을 한다. 아들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만 扮)는 여느 남자아이처럼 위험한 놀이를 탐닉하는 사춘기에 막 접어든 소년이다. 이 둘은 사사건건 대립한다. 하지만 엄마와 사춘기 아들 간의 익숙한 갈등이라 이질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차라리 이 둘을 파고들며 나름의 지분을 획득하는 줄리(엘르 패닝 扮)가 인상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제이미의 방을 위태롭게 방문하면서도 ‘남자 사람 친구’라는 관계만큼은 견고하게 유지해나간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는 자유로운 영혼 둘이 있다. 바로 애비(그레타 거윅 扮)와 윌리엄(빌리 크루덥 扮)이 그들이다. 이 둘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 그리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우리는 역사의 전환점에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정부에 대한 경멸감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감의 위기입니다.
우리는 이 위기를 우리 삶의 의미에 대해 의심이 커지는 것에서
우리 조국의 목적의 단일성이 손실되는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를 자유의 추구에 관한 인류의 위대한 움직임의 일부라고 여겼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아이들의 시대는 우리 시대보다 나을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을 소비하는 것이 우리의 의미에 대한 갈망을 만족하게 하지 못함을 깨달았습니다.
- 미국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 「자신감의 위기」 연설 중 ¹
평범한 가정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둘러앉아 대통령의 연설을 함께 듣다가도 이내 자신들을 둘러싼 문제 앞에서 진지하다. 실제로 이들에게는 아들과의 소통, 멋진 남자가 되는 법, 건강, 임신, 취미, 지속적인 관계 등이 더 중차대한 문제이다. 그런데 이 미시적인 것처럼 보이는 문제나 사건들이 사실은 70년대를, 더 나아가 20세기를 관통하는 것들임을 이내 알 수 있다. 제이미의 진단이 맞건 틀렸건 도로시아는 대공황 세대이며, 마침 99년까지 그 삶을 이어간다. 소액투자자도 주식으로 재미를 볼 수 있었고, 거대하던 카메라는 20세기 내내 발전을 거듭하다 어느새 소소한 일상을 담아낼 수 있을 만치 작아져서 애비의 손에 들려있다. 원치 않는 임신을 일방적으로 걱정해야만 했던 여성들 앞에 소변으로 간단히 임신 여부를 알 수 있는 테스트기가 등장했으며, 유산방지약으로 사용된 합성 호르몬 약품인 DES(디에티스틸베스트롤)의 부작용이 대두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² 이뿐만이 아니다. 20세기의 주요 변곡점인 대공황 세대와 68 혁명 세대는 끊임없이 대립하거나 이해를 시도하는데, 이 역시 온전히 20세기의 산물인 것이다. 페미니즘이 활자화되어 단행본 서적으로 읽혔으며, 남성인 윌리엄조차 그 주요 내용을 꿰고 있을 정도가 되었다. 즉, 이 영화의 등장인물과 이들이 맞닥뜨리는 문제는 지극히 70년대적이며, 분명히 20세기적이다. 그리하여 이 등장인물들로 이 시절을 돌아보는 시선에는 왜곡이 발생하지 않는다.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여성의 문제’라는 시선
여성이라 하여 더 섬세하다는 규정도 명백히 일종의 폭력이다. 아무리 일반적으로 여성이 더 섬세할지언정 이 같은 규정이 여성으로 하여금 섬세를 강요하는 작동에 사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 영화 <우리의 20세기 (20th Century Women)>는 섬세한 시선으로 당시를 바라보고 있으나, 이것이 ‘여성’ 혹은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발현되지는 않는다. 이는 연출을 맡은 마이크 밀스 감독이 남성이라는 미약한 근거는 언급할 필요도 없이, 영화가 좇는 대상이 ‘여성’ 그 자체가 아닌 ‘여성의 문제’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문제들은 굳이 여성의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말할 수 있는, 말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곧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여성의 문제’인 것이다.
이를테면 -혼자 했을 리가 없는- 임신을 걱정하는 줄리가 임신테스트기를 사용하며 마음의 걱정을 덜 수 있게 된 사실이나, 엄마의 DES(디에티스틸베스트롤) 복용으로 자궁경부암에 걸린 애비의 이야기는 당시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여성의 문제’가 사회의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맞닿았는지를 보여준다. 생리에 대한 논쟁에서 나타나는 윌리엄의 인식과 더 멋진 남자가 되기 위해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제이미 역시 여성이 아님에도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여성의 문제’에 적극적이다. 그리하여 영화 <우리의 20세기 (20th Century Women)>는 20세기를 바라봄에 있어 제외되었던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여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하지만 이 같은 시선은 남성 일반에 의해 기록된 영화 너머의 세상에서는 무관심의 영역에 있었으며, 곧 섬세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화 <우리의 20세기 (20th Century Women)>가 섬세한 시선을 획득할 수 있었음은 ‘여성적 영화’라서가 아닌,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여성의 문제’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획득된 것이라는 진단이 더 적절할 것이다.
시선과 시절의 조화로 더없이 매력적인 영화 <우리의 20세기 (20th Century Women)>에는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매력이 있다. 바로 아네트 베닝이 연기한 도로시아의 존재이다. 아들의 학교에서 왜 아이가 학교를 빠지면 안 되는지를 따져 묻는 이 세련된 엄마는 영화 내내 그 세련미를 잃지 않는다. 제이미에게 실연이 세상을 배우는데 더없이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던가, 예술병자인 제이미가 좋아하는 밴드의 노래를 이해하려 애쓰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로시아의 매력이 발현되는 지점은 바로 아들의 문제를 자신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외부의 에너지를 빌리려는 시도에서 드러난다. (물론 이 시도는 영화 후반부에서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이른바 ‘에너지의 위기’라 불러야 할 것 같다. 독자들이 유머 감각이 있기를 바란다) 꼭 이 땅의 엄마들을 소환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조차 이해하기 힘든 문화에 젖은 세대에게 아들의 문제를 의탁할 수 있는 엄마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제 아들의 문제 앞에서 자신이 잘 해낼 수 없는 지점을 진단해내고, 한발 뒤로 물러날 수 있음은 보통의 강인함이 아니다. 나는 이를 ‘건강하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도로시아의 건강한 태도는 엄마로 역할할 때만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숙집의 주인으로서 구성원을 아우르는 중심자로써도 그는 더없이 적격이다.
이 부분은 진짜 힘들었다가 그러다 나아지고, 그러다 다시 힘들어져.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걸 그랬구나…….
애써 꾸미지 않는 도로시아의 조언은 절망에 빠진 애비를 미소 짓게 한다. 일탈을 저지른 줄리를 괜찮다며 다독인다. 자신에게 급작스러운 키스를 한 윌리엄에게 분명한 태도를 종용하면서도, 그를 이해하며 관계를 풀어나가고자 노력한다. 도로시아의 태도가 만능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건강한 중심자’가 각자의 문제로 힘겨워하는 주변 사람들을 다독이며 정진해 나갈 줄 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자신이 좇을 수 있는 가치와 자신이 그것을 어느 만치 좇을 수 있는지 계속해서 견주어봄으로써 가능했으리라 짐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아들을 키움에 있어 좇아야 할 가치가 아들과의 긴밀한 소통임을 명확히 알아챈다. 그리고 자신이 부적격자임을 알고 물러날 줄도 안다. 아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이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임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무리하지 않으나,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리고는 괜찮다며 토닥인다. 나는 이런 사람이 어른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사회 어른의 부재라는 이슈로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인간 군상의 규모와 관계없이 도로시아가 보여준 ‘건강한 중심자’의 중요성만큼은 주지하고 싶다. 무엇이 나와 우리에게 따라오게 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좇을지를 고민하는 그런 사람의 존재를 말이다.
“좋은 신발은 당신을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라는 표현의 출처는 분명하지 않다. 유명 신발 디자이너가 발언의 주인공이라는 주장부터,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대사로 등장한 것이 최초라는 설, 그리고 소녀시대 멤버인 서현 씨가 한 말이라는 인용 전문 사이트의 기록도 있다. ³ 그나저나 이 라임을 가져다 쓰고 싶어 출처를 뒤적이던 나의 일요일 오후는 그 앞부분을 베어 물렸다. 어찌 되었건 좀 가져와야겠다. 마침 생각과 운율이 잘 맞아떨어진 탓이다. 좋은 영화는 좋은 세상을 만든다!
단언컨대 <우리의 20세기 (20th Century Women)>는 좋은 영화다. 지난 시절을 우리가 놓쳤던 시선으로 바라보며, 더없이 매력적인 등장인물을 선사해주었기 때문이다. 도로시아 이외의 인물들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절망에 빠진 애비는 쉽게 주저앉지 않고, 줄리와 제이미는 섹스가 아닌 사랑을 좇아야 함을 배웠으며, 윌리엄은 자신의 단점을 명확히 알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이 소중하다고 말하지만, 그 가치를 스스로 찾는 시도 앞에서는 작아지곤 한다. 그런데 이 영화 속 인물들은 그냥 달려 나가지 않는다. 자신을 점검하고, 서로를 돌본다. 이런 태도는 보고 따라 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좋은 책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들로부터 비롯한 명대사를 일일이 옮겨 적지 못했기에 이 리뷰는 완전할 수 없다. 다만, 책 목록을 글 하단에 옮긴다. ⁴ 끝으로 다시금 이 영화의 제목을 생각한다. ‘여성’을 누락시킨 명백한 혐의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피한 배경을 이해하려 하는 견해를 유지한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인데, 이 땅의 남성들로 하여금 이 영화를 더 많이 보게 하려는 소위 ‘빅 픽쳐’의 차원에서 제목에 ‘여인들’을 삭제한 것은 아닐까?
물론 아니겠지만, 부디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한다. 부디.
참고
¹
- 지미 카터, 「자존심의 위기」 연설 중 일부
- 영화 <우리의 20세기 (20th Century Women)> 예고편 중 참조
- http://www.youtube.com/watch?v=X3dF-uMlSOw
²
- 한겨레신문, 황예랑 기자, 2007년 5월 10일 자, 문화면 ‘책과 생각’, “몸 망치는 침입자를 막아라”
- http://www.hani.co.kr/arti/PRINT/208381.html
³
- 유명 디자이너 설
http://www.econovill.com/news/articleView.html?idxno=295017
- 드라마 <꽃보다 남자> 설
http://www.82cook.com/entiz/read.php?num=1471961 댓글 중 일부
- 소녀시대 멤버 서현 설
http://www.azquotes.com/quote/1190567
⁴
- Elan M. Carson`s Blog, 2017년 2월 3일 자, “20th Century Women List of Books Mentioned in the Movie”
- http://www.elanmcarson.com/20th-century-women-list-books-mentioned-movie/
※ 영화에 나온 도서 목록
- Our Bodies Ourselves by Judy Norsigian (read by Jamie and Abbie)
- Sisterhood is powerful by Various Authors (read by Jamie and Abbie)
_ “The Politics of Orgasm” (essay) by Susan Lydon
_“It Hurts to be Alive and Obsolete: The Aging Woman” (essay) by Zoe Moss
- Watership Down by Richard Adams (read by Dorothea)
- Forever by Judy Blume (read by Julie)
국문) 주디 블룸, 『포에버』, 김영진 옮김, 창작과 비평사, 2011
- The Road Less Traveled by M. Scott Peck (read by Julie)
국문) M. 스캇 펙, 『아직도 가야 할 길』, 최미양 옮김, 율리시즈, 2011
- Future Shock by Alvin Toffler
국문) 앨빈 토플러, 『미래의 충격』, 장을병 옮김, 범우사, 1997
이미지 출처
모든 이미지
- IMDb, 20th Century Women (2016), Photo Gallery
- http://www.imdb.com/title/tt4385888/mediaindex?ref_=tt_mv_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