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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Sep 25. 2016

준비된 기적 _ 영화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 리뷰

스물아홉 번째 지난주




끝까지 자리를 지킬 것


 영화는 언제 끝나는가? 할 말을 다 했으면 끝난다. 아니, 끝나야 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주인공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면, 끝내야 한다. 간혹 그 종결의 시점에서 어영부영하다가 관객의 마음을 얻지 못한 작품들도 보았다. 그런데 작품 속 주인공의 할 얘기는 다 끝났는데, 연출자가 더 보여주고 싶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영상을 첨부하고는 하는데, 영화관에서 나가려다가 멈춰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그 어정쩡함을 야기한 영상을 이름이다. 필자는 그런 애매함이 싫어서 배급사의 로고가 뜨는 순간까지 자리를 지키는 편이다. 대체로 엔딩크레딧 영상이 없는 경우가 많으나, OST를 감상하며 영화 자체를 곱씹는 시간으로써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마침 이번 <지난주>에서는 ‘끝까지 자리를 지킨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한 편의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그간 그 어떤 작품과 비견해도 손색없을 만치 묵직한 감동을 전하는 엔딩크레딧 영상이 나온다. 그러니 힘주어 전한다. 반드시, 끝까지 자리를 지킬 것!



※ 스물아홉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는 영화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에 대한 리뷰 글입니다.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으므로, 스포일러에 대한 부담이 적은 것이 사실이나, 영화에 대한 그 어떤 사전 정보도 원치 않는 분들은 읽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본 리뷰 작성을 가능하게 해 준 <브런치 무비데이>의 시사회 초청에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어떤 장면을 스크린에 담아야겠다는 의식


 이것은 의식에 관한 영화이다. 바로 수많은 세상사 중에 어떤 장면을 스크린에 담아야겠다는 그 의식 자체가 선연하게 빛나기 때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숫자를 그대로 빌리자면, 사고는 단 208초 동안 일어났으며, 구조에는 단 24분 만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어떤 맥락으로부터 이어진 것이 아닌, 단지 새떼와 부딪혀 일어난 그야말로 사고였다. 후속적으로도 어떤 반전이랄 것은 없었다. 기장의 판단은 옳았고, 기적적으로 생환한 사람들을 추억해야 할 만치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었다. 이를 러닝타임 96분짜리 영화로 만드는 일은 물리적 숫자의 간극만 보더라도 쉬운 결정일 리 없었을 것이다.


 숫자 따위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이야기는 늘리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주지할 바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숱한 일 중 어떤 장면을 스크린에 옮길 것인가라는 판단에 있다. 이야기는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실화는 일어난 일에 근거하는 터라, 어떤 장면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된다. 2009년 1월 뉴욕 허드슨 강의 그 사고는 어쩌면 모든 것이 잘 풀린 결과이며, 어떤 의혹이랄 것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거장의 반열에 오른 연출자는 직접 제작까지 맡으며 굳이 이를 스크린에다 옮겨놓았다. 왜일까?


 단견이 미치는 사고의 범위 내에서는 미국의 오래된 영웅주의가 떠오른다. 그리고 기적적인 구조의 모습은 단지 뉴스 자료화면만으로 존재하기에는 어떤 아쉬움을 일으켰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이후의 감상은 짧았던 예단을 보기 좋게 비웃었다. 영화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은 어쩌면 하나의 사고였을 뿐인 그 장면 속에서, 미쳐 그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했을 차원의 모습들을 담아 우리를 찾아왔다.





영웅이 아닌 인간


 이것은 인간에 관한 영화이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고뇌하는 한 인간의 심연을 따라간다.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은 이 지점에서 흔한 예상을 빗나간다. 뻔한 영웅주의나 감동적인 구조 실화를 전면에 내세우리라는 관객 일반에게 체화된 관습적 사고는 이내 민망함으로 돌아온다. 미국 언론 특유의 영웅 만들기가 아니더라도, 그즈음의 금융위기를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2009년 1월 뉴욕 허드슨 강에서 발생한 사고 자체만을 독립적으로 떼어두고 보아도, 155명의 생명을 구해낸 기장 체즐리 설런버거(Chesley Sullenberger, 이하 “설리”)는 영웅으로 대접받아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카메라는 사건 자체의 긴박감이나 설리의 영웅적 대처가 아닌, 설리의 내면을 파고드는 ‘혹시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이라면’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왜일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은 이미 공유된 사실이라는 공감이 그 자체로 예고편의 구실을 하며, 관객에게 상대적으로 쉽게 접근한다. 관객은 뉴스를 통해 전달받은 사전 정보를 바탕으로 그 어렵다는 ‘이해’를 위한 영화감상 초반부의 몰입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를 획득한다. 하지만, 그렇게 아낀 에너지는 이내 더 높아진 연출에의 기대치로 전이되어 발현된다. ‘내가 본 뉴스를 얼마나 더 멋지게 찍어내었느냐’라는 호기심과 평가 사이의 어떤 단계로 쉽게 올라타는 것이다. 이에 대부분의 연출자는 사건의 직접 당사자가 아니었으면 경험하거나 볼 수 없었을 장면을 멋들어진 CG와 배경음악을 동반하여 전달하고는 한다. 하지만, 단일 사건이 언론을 통해 전해질 때, 간과된 대목이 있었다면? 언론이 사건을 보는 프레임을 설정한 탓에 ‘기적’이니, ‘영웅’이니 하는 개념어로 이미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은 상태라면? 혹시 그로 인해 놓친 것이 있다면? 영화가 사건을 재구성할 때, 어떤 의무감을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일 수 있음이다.


 우리가 언론을 통해 쉽게 부여받는 사건으로서의 기적과 인물로서의 영웅은 어쩌면, 그것이 한편의 ‘이야기’로 소비되기에 적절한 방식일는지 모른다. 더욱이 근래에는 언론이 사실관계에 극적인 요소를 부가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사실을 넘어, 수요자가 어떤 감상으로 수렴하게끔 유도하는 장면의 구성, 배경 음악의 사용, 뉴스 전달자의 멘트 등의 장치는 이미 보편적인 것이 되어, 어떤 거리낌을 느끼기에도 늦어버린 듯하다. 영화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에서도 언론은 시종일관 설리를 영웅화하며, 콘텐츠로서 소비하기에 바쁜 모습이다. 하지만 대상으로서의 인간 설리는 언론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악몽으로 되뇔 만치 커다란 중압감을 느낀다. 더욱이 순간적인 판단이 오류였을지 모른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까지 더해지며, 기적적인 영웅이라는 TV 속 존재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영화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의 카메라는 주인공 설리의 내면에 대한 시선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거대한 사건 속 뉴스에서는 전해받지 못한 한 인간의 고뇌를 되새기게 한다. 그리고 이는 설리가 ‘인간’이 누락된 조사위원회의 시뮬레이션을 지적하는 장면으로 이어지며, 기민한 대처와 영웅적 대접 속에는, 새떼가 날아들어 엔진이 손상되면 당황하고, 세간의 쏟아지는 관심에는 부담스러워하는, 한 인간이 있을 뿐임을 역설한다. 영화 속 설리의 대사처럼 기적이라는 것이 영웅이 아닌 “그저 할 일을 한” 한 인간에 의해서임을 되새기게 하며, 묵직하게 우리의 마음을 파고드는 것이다.


* 영화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에서 NTSB(미 연방교통안전위원회)의 청문회에 참석한 기장 체즐리 설런버거 





그리고, 의도하지 않음이 전하는 울림


 이것은 구조(構造, structure)에 관한 영화이다. 가정을 해보자. 2009년 1월 15일, 라과디아(LaGuardia) 공항의 US 에어웨이스 1549편의 기장이 설리가 아니었더라면, 참극을 피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우선 강에 착수한다는 판단은 노련한 기장의 순간적인 기지가 아니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장이 누구였건 간에 여객기가 허드슨 강에 착수한 순간으로 가정의 시점을 옮겨보자. 그 사람의 직명이 기장이건 선장이건, 적지 않은 사람들의 안전을 담보한 어떤 이가 가장 먼저 탈출할지, 끝까지 자리를 지킬지가 그 사람이 속한 사회의 다름에 따라 그 차이가 확연할 수 있다면? 실험하지 않았음에도 짐작으로 가늠되는 어떤 수치들을 떠올리며,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의 상영관에 모인 우리는 연출자가 의도하지도 않은 종류의 울림을 느끼게 된다. 


 뜯어보자. 사고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 들은 관제사는 끔찍한 사태를 직감한다. 이내 심정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된 그 관제사는 바로 배제된다. 그리고 착수한 기체를 가장 먼저 발견하고 사고 현장으로 접근한 선박, 헬기로 즉각 현장에 당도하여 몸을 던져 사람들을 구조해낸 구조대의 모습, 얼른 비행기 밖으로 나가라고 지시하는 승무원들의 조치, 무엇보다 마지막까지 비행기를 둘러보며 승객이 남아있지나 않은지를 살펴본 기장의 모습은 유난히 잊히지 않는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뉴스나 영화를 통해 전해 들은 바에 따르자면, 상급자에게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구조에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는다. 긴박한 순간에도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일제히 구동할 수 있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가장 소중한 목숨을 지켜 내거나 혹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바다 너머로부터 이 영화를 건네받은 지켜내지 못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연출자가 의도하지도 않은 부끄러움을 나누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상영관을 나선다.


** 영화 속에서 기장인 체즐리 설런버거가 비행기에 마지막까지 남아 탈출하지 못한 승객이 있는지를 찾는 모습









준비된 기적


 이것은 기적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2009년 1월 15일 뉴욕의 허드슨 강 위에서 일어난 일은 기적이 맞다 할지라도, 이 영화는 기적을 담아내고자 하지 않았다. 차라리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은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한 인간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며 쌓은 직능의 원숙함은 가장 긴박한 순간에서 빛을 발휘했다. 그리고 사회의 구조 속에서 암묵적으로 이행한 가장 중요한 것을 지켜내는 훈련은, 끔찍한 참변을 막아내야 한다는 일정한 목표의식 속에서 실제로 성공적으로 구동되었다. 준비된 기적이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미국이라는 한 사회의 힘을 체감하면서도 우리는 한 척의 배를 떠올리게 되고, 어째서 잘 만든 한 편의 영화가 우리에게는 반성문을 요구해오는지를 묻는다. 어째서 연출자가 의도하지도 않았을 부끄러움이 자리하는지를 묻는다. 우리는 흔히 돌아본다고 표현한다. 이 한 편의 영화를 보고도 유사한 감상은 가능할진대, 단일 사건이 아닌 사회 자체의 문제로 치환하여 보자면, 대체 우리는 어디서부터 되돌아봐야 하는 것인가? 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뒤틀린 것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아득하며 요원하다.


*** Janis Krums씨가 촬영하여 트위터에 게시한 당시 사고 장면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한국어 포스터

 - yonhapnews.co.kr/bulletin/2016/09/18/0200000000AKR201609180131000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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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TSB(미 연방교통안전위원회)의 청문회에 참석한 기장 체즐리 설런버거 

 - yonhapnews.co.kr/bulletin/2016/09/18/0200000000AKR201609180131000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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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공식 예고편 화면 캡처

 - youtube.com/watch?v=ofDzbPXBx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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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anis Krums의 트위터

 - twitter.com/jkrums/status/423458459737419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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