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여섯 번째 지난주
한 해를 영화로 닫고, 연다. 기분 좋은 일이다. 한데 해가 바뀐다뿐이지, 나 자신에게 어떤 변화랄 것이 뒤따르지는 않는다. 그저 보던 영화를 계속 보고, 쓰던 감상을 이어서 쓸 뿐이다.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영화를 보는 일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이는 리뷰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보는 행위와 관련된다. 몇몇 장면과 대사를 아예 머릿속에 담으려 한다든가, 나름의 관점이라는 것을 수립하고자 스크린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곧 감상자가 아닌, 관찰자의 지위를 내려놓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으로 러닝타임 내내 영화 읽기와 관련된 근육을 긴장시키고는 했다.
잘못되었다고 여기진 않는다. 아직 감상에의 깊이가 부족하여, 따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잘 읽을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겠다. 과정이려니 한다. 이 과정 중의 일이었다. 지난주, 역시나 관찰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단단하게 하고는 영화관에 들어섰다. 영화가 시작되었고, 시선은 적당히 경직되었다. 그런데 어느샌가 잘 관찰하고 있다고 여겼던 시선들이 제 둘 곳을 잃어버렸다. 스크린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반세기도 훨씬 지난 영국의 국회나, 전쟁 작전을 짜는 지하 벙커로 들어간 나는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제법 나이가 들었으나 목소리에 힘이 있었고, 비틀거리는 듯했으나 곧장 일어서고는 하였다. 상세히 전하자면 아래와 같다.
- 아흔여섯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에서는 영화 <다키스트 아워, Darkest Hour (2017)>를 다루었습니다.
- 본 영화가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었음에도 영화에 관한 어떠한 사전 정보도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감상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아직 개봉 전인 작품을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시놉시스 ¹
우린 결코 굴복하지 않습니다
승리가 없으면 생존도 없기 때문입니다
덩케르크 작전, 그 시작
다키스트 아워
영화적 시절은 분명히 존재한다. CCTV에 녹화된 장면들이 모두 영화가 될 수 없듯, 우리의 삶 중에서도 영화적 시절, 곧 스크린에 올려둘 만한 때는 따로 존재한다. 인물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의 모든 시간이 영화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명백히 영화적 인물도 존재한다 하겠다. 또한, 인물과 사건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지라, 이 둘을 떼어놓기란 쉽지가 않다. 난세 영웅(亂世英雄)이라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토록 보편성을 획득한 영화적 시절과 인물을 훗날 영화로 옮겨내는 시도는 그 자체로 너무 수월하지는 않은가? 쉽다고 하여 그릇되었다는 타박은 아니나, 소위 통용되는 ‘괜찮은 영화’의 반열에 너무나도 손쉽게 오름에는 어떤 경계의 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영화 <다키스트 아워>는 위와 같은 자기 검열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다키스트 아워> 속 처칠은 마냥 강하지만은 않다. 마냥 단호하지만도 않다. 그는 번뇌하고, 갈등한다. 그리고 과거의 실패 앞에 머뭇거린다. 그는 계속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조국의 선택지를 위해 고민한다. <다키스트 아워>는 처칠이 결정한 선택에의 옳고 그름을 따져 묻지 않는다. 다만 그 과정에서 한 인간이 결단을 내리기까지의 의식을 비춘다. 때로는 뿌연 담배 연기로, 때로는 붉은 조명으로, 때로는 그저 옆모습만으로….
곧 <다키스트 아워>는 덩케르크 작전이라는 사건이나 윈스턴 처칠이라는 위인이 아닌, 인간 처칠, 한 개인으로서의 처칠과 오늘의 관객을 만나게 하는 영화이다. 대개의 전기 영화가 사건의 긴박함과 인물의 영웅주의에 매몰되곤 하는 실책을 능히 극복해냄은 물론, 도리어 더 깊숙이 침투해 보인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인물의 깊은 곳에 카메라를 들이밀라치면, 그 역을 맡은 배우의 역량이 중할 수밖에 없다. 이제 영화의 일을 지나, 배우의 일을 본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를 논하는 일에서 누구나 언급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빠뜨릴 수는 없는 결정적인 존재가 있다. 바로 ‘윈스턴 처칠을 연기한 게리 올드만’에 관함이다. 아니 어쩌면 ‘윈스턴 처칠이 되고야 만 게리 올드만’이라는 수식이 더 적합할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는 행위만으로도 인지할 수 있다. 그 어디에서도 <다크 나이트>의 고든 경감이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스마일리를 연기한 게리 올드만은 찾아볼 수 없다. 아니, 그저 게리 올드만이 없다. 단지 처칠만이 있다. 어찌하여 가능했을까? 단지 연기를 매우 잘하면 그저 그렇게 되는 것일까?
게리 올드만 <다키스트 아워> 관련 인터뷰 중 ²
배우로서 필요한 것은 ‘관찰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상당 부분 ‘집중력’과 관련한다고 또한 생각합니다. 나는 그런 종류의 일을 하기에 좋은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배우로서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중략)
윈스턴 처칠에 이르자 분명해졌습니다. 그에 관한 많은 저서뿐 아니라, 사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그에 관한 영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설 패턴에서부터 그가 손동작하는 버릇에 이르기까지를, 보고 또 보며 공부했습니다. 누구나 처칠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인식이 처칠을 연기한 누군가에 의해, 그러니까 사람들이 Robert Hardy*나 Albert Linney**의 연기를 봤기 때문에 느낀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있어 진정으로 그 시절의 그로 돌아간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들을 피한다는 의미입니다. Robert Hardy의 프로그램을 보기는 하였습니다만, 나는 다른 누군가의 연기에 의해 영향받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 Robert Hardy _ 1981년 방영된 TV시리즈 <Winston Churchill: The Wilderness Years>에서 윈스턴 처칠을 연기함
** Albert Linney _ 2002년 방영된 TV판 영화 <The Gathering Storm>에서 윈스턴 처칠을 연기함
원문]
I think for an actor you need … it’s about observation. I think a lot to do with it is one’s concentration and focus. I sort of have a good ear, a facility for that kind of thing. It’s all the things that you need as an actor.
(중략)
But with Winston, it was exactly that. It was not only the reading material, which is of course voluminous. But the footage of the man, there’s actually more there than I thought. And so it was a case of really just watching and re-watching and studying everything from speech patterns to mannerisms to how he used his hands how he moved through a space.
I think that we have an idea of who Churchill was, and I’m not sure if that idea of him is not influenced by other people that have played him, so you feel that you have an idea of who he is because you saw Robert Hardy, or Albert Linney. For me it was to really go back to the man, and avoid all of the other … I watched Robert Hardy at the time when it was programmed, but I didn’t want to be contaminated sort of by anyone else’s performance.
실존했던 인물을 재현할 때의 태도를 본다. 시나리오상에서 최초로 만들어졌거나, 만화나 소설과 같이 가공된 인물을 근원에 두고 연기를 하는 처지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이 지점에 있어 게리 올드만은 특유의 인식과 태도를 위 인터뷰를 통해 내비친다. 그는 ‘관찰자’가 되는 일만이 배우로서 중차대한 과업이라 단언한다. 그리고 ‘집중’하여 관찰하라고 조언한다. 그는 자기의 소신대로 윈스턴 처칠을 집중하여 관찰했다. 관련 영상을 반복하여 보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염려도 놓지 않는다. 그에게는 윈스턴 처칠을 연기했던 다른 배우들과 자신을 차별화하는 것쯤은 관심의 대상조차 아니었다. 그저 그 사람이 되는 것만이 오롯한 그의 과업이었고, <다키스트 아워>를 통해 명확하게 증명되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얼마 남지 않은 때이다. 가장 유력한 남우주연상 수상자의 연기를 미리 만나보시기를 바란다.
지난해와 지난주를 지나며, '당시의 긴박했던 덩케르크 해안'과 '그 상황을 애타게 바라보며 작전을 지시한 인물'을 영화관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이뿐 아니다. 지난해 개봉한 <Their Finest>는 덩케르크 작전 당시의 선전 영화(propaganda films) 제작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넷플릭스 드라마 <The Crown>도 처칠을 그리고 있다. 어째서 제국의 시절을 지나 극단적 냉전까지도 종식된 오늘에 덩케르크와 처칠 그리고 그 시대가 주목받을까?
1940년 덩케르크는 받아들일 수는 없고 맞서기에는 거대한 현실의 장벽 앞에서 마지막 생존을 향한 몸부림이 일어나던 공간이었다. 이 넘쳐나는 밀도의 긴장감을 담아내는 일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몫이었다. 이제 ‘이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낼 것인가?’, 아니면 ‘굴욕적인 협정에 사인할 것인가?’라는 고뇌는 조 라이트 감독의 몫으로 돌아왔다. 지금의 우리야 ‘얼마 지나지 않으면 나치는 패망하는데….’라며 여유 섞인 관전기를 뱉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당시에는 분명 긴박하고도 중차대한 문제였을 것이다. 한참이나 시간을 지나온 우리에게 그 순간들은 전투 장면을 담기에 좋은, 영웅을 그리기에 좋은 영화적 시절에 머무를 뿐일까?
제국의 종언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국경을 넘고야 만 집단적 야만이 일단의 종식을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유럽이 잠식당하기 직전에 발휘한 용기는 오랫동안 기억할만한 것이다. 연합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지 않았다면, 우리도 몇 해는 더 뒤로 미루어진 광복절을 기념해야 했을지 모를 일이다. 더욱이 큰 위기를 넘겨낸 기억, 절체절명의 순간에 발휘해낸 용기를 기억하는 일에 있어, 영화는 더없이 적절하다. 때마침 영화는 인류 보편의 문화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운이 좋게도 영화와 관련된 기술은 발전을 거듭했고, 훌륭한 연출자와 배우들과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영화는 승자의 기록이다. 쾌적한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으며 이미 알고 있는 승리를 몇 번이고 반복하여 틀고 또 바라보는 심리의 기저에는 단연 승자의 여유가 깔려있다. 만일 패배하였다면 우리는 지금도 나치 선전물을 4DX나 아이맥스로 바라봐야 할지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영화관에서 인류의 진보를 느끼고는 한다. 더디거나 멈칫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간 인간사를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덩케르크 작전의 성공과 처칠의 선택을 기억하고 감상함은 승자의 여유이자, 우리가 다시 돌아가지 않을 지점을 확인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역사가 나아간다는 증명을 영화관에서 목격하는 것이다.
역사는 나아가고, 영화는 기억한다. 그렇기에 올바로 나아가야 한다. 좋은 영화를 보고 싶다면, 우리가 올바르게 나아가야 한다. 인류 번영의 역사를 써 내려가야 할 수많은 이유 중, 영화를 사랑하는 이의 몫도 있음이다. 영화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바른길을 가야 한다. 나는 영화를 사랑한다.
참고
¹
- 다음 영화 <다키스트 아워, Darkest hour>
-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8109
²
- Rogerebert.com, Nick Allen, Gary Oldman 인터뷰, 2017년 11월 20일 자, “A DISAPPEARING ACT: GARY OLDMAN ON "DARKEST HOUR””
-https://www.rogerebert.com/interviews/a-disappearing-act-gary-oldman-on-darkest-hour
이미지 출처
- 커버 이미지 및 영화 스틸컷
- http://movie.daum.net/moviedb/photoviewer?id=108109#1219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