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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 Dec 18. 2023

드라마는 12부작, 내 인생은 방영 중

꽉 막힌 내부순환도로보다 더 지루한 나의 우울

본 드라마는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지명, 기관, 사건, 단체 및 배경 등은 실제와 어떠한 관련도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지난주에는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기분이 무척 개운했다. 진짜. 시간이 정말 약이구나, 지나면 괜찮아지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진짜로.


오래간만에 남편이 없는 일요일이라 하루 종일 아이랑 둘이 집에서 있을 자신이 없어 엄마네로 향했다. 간만에 먼 운전이라 뿌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 약을 일부러 먹지 않았다. 여느 날과 크게 다르지 않게, 못 말리는 우리 개딸과 사랑둥이 손주의 완벽한 콜라보는 엄마와 아빠를 행복하게 한 것이 분명했다.


기침이었다. 전날 밤부터 목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사레들린 것처럼 그치지 않는 마른기침 몇 번에, 병원에 꼭 가라는 둥 약은 먹었냐는 둥 도라지청 이야기까지. 그냥 기침이었는데.


근무일과 겹쳐 아등바등하고 있던 아이의 겨울방학 기간에 학교에서 편의를 봐주어 연가를 쓰게 되었다는 말을 엄마는 진짜로 믿었을까?


휴직을 하게 된다면 엄마와 아빠에게는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언제나 밝고 활기차던 내 딸이 열과 성을 다해서 일하던 학교 때문에 우울증이라니. 그것도 엔간한 일은 다 참고 지나가는 씩씩한 애가 휴직을 할 정도라니.


집에 오는 차 안에서 뿌옇지 않은 정신으로 눈물이 났다. 다행히 뒷자리에 곤히 잠든 아이에게는 들키지 않을 정도의 고요한 눈물이었다.


나는 괜찮아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믿은 거였다. 어떻게든 애써보려는 거였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그 시간, 그 교장실 안에 갇혀 있다. 상담 선생님의 이야기들을 되새겨봤자 그건 앞으로의 이야기고 나는 아직도 그 눈빛에 갇혀 있다. 올 한 해 아이들과 반짝였던 순간들을 기억하려고 해 봐도 내가 했던 것들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칭찬하기고 나발이고 나는 진짜 심각하게 괜찮지 않다.


드라마를 12부작으로 만들어 놓고 4부에 걸쳐서 병동에 입원하고 회복하고를 하니까 4일 만에 괜찮아지는 줄 알고 나도 으쌰하고 일어날 뻔했잖아. 기립성 저혈압으로 넘어져서 큰 병원에 가면 진짜 애 두고 입원해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지. 토요일의 아침 볕에 깜빡 속아 내 인생이 박보영인 줄 알았네.


약도 적응해서 이제 낮에는 잠도 잘 안 온다. 그렇다고 뭘 할 기력도 없고, 뭘 할 의욕도 없고, 누워서 시간을 정말로 죽이는 일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도 오늘은 청소기를 돌렸다. 어마어마한 업적이다.


생산성 있는 삶 지겹다.

내일은 그래도 병원이라도 간다.

그래, 하루에 하나면 진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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