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사치, 복숭아

할인하는 과일은 늘 그 값을 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by 콩딘이

가격이 비싸도 품질이 안 좋을 순 있지만 싼 것은 늘 싼 값을 한다. 옛말에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싼 게 비지떡이라고. 어느 상황에서라도 값으로 매길 수 있는 것들은 대개 항상 그 값을 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배워가는 요즘이다.


일을 쉰 지 벌써 6개월이 돼 간다. 월급이 끊기고 생활이 쪼들리기 시작하니, 나름의 긴축재정에 돌입했다. 긴축재정이라고 하니 말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별건 아니고, 평일 식사 정도는 되도록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이다. 대신 손재주가 없으니 식재료를 일일이 다 사서 하기보다는 쿠팡에서 밀키트를 주문하거나, 조리법이 간단한 요리 위주로 만들어 먹는다.


미식가보다는 대식가에 가까운 입맛이라 가끔 너무 귀찮을 때는 냉동실에 얼려둔 밥 한 공기를 해동해 잘 익은 총각 무 김치 한 조각과 김을 반찬삼아 먹을 때도 있다. 이런 여름에는 속까지 김치국물이 잘 밴 무에 뜨끈한 밥만 먹어도 속이 금방 시원하고 개운해지는 게 별미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런 나도 종종 특정 음식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때는 주로 주말을 이용하기로 한다. 남편과 함께 데이트도 할 겸 주말에 한 끼 정도는 외식을 한다. 평일에 밖에서 여러 종류의 음식을 먹고 오는 남편은 주말에는 나를 위해 먼저 음식 선택권을 양보해 주는 편이다.


카페도 웬만하면 자제하고 있다. 원체 커피를 잘 마시진 않아서 이건 사실 좀 쉽다. 집에서 여러 종류의 허브티와 과자 등을 쟁여두고 간식이 먹고 싶을 때마다 간간이 조금씩 꺼내먹는다. 하지만 오늘 같이 날이 너무 덥고, 집에서는 도저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는 아주 가끔씩 카페로 나간다. 대신 꼭 스타벅스로 간다. 텀블러 이용 시 할인되는 쿠폰이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깨끗이 씻어둔 텀블러를 챙겨 책 한 권을 끼고 나가 카페에서 음료와 함께 책을 읽으면 꼭 바캉스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때 책은 주로 동네 도서관을 이용한다. 쉬는 동안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읽고 싶었던 책을 실컷 읽는 것이었던 만큼 많은 책을 읽는데, 거의 모든 책을 도서관에서 대여해 읽는다. 읽고 싶었던 책이 도서관에 이미 다 구비돼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어 원서를 읽고 싶을 때도 웬만한 원서들이 다 구비돼 있어 따로 책을 살 필요성을 못 느낀다. 게다가 신간이 들어올 때 희망도서로 신청해 두면, 2주도 안 걸려서 새 책을 공짜로 읽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다.


운동도 싼 값에 가능하다. 운이 좋게도 집 근처 5분 거리에 구민 체육센터가 하나 있다. 그곳 헬스장에서 매일 아침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수강료가 한 달에 5만 원도 채 되지 않는다. 가끔 주말에도 운동하고 싶어지면 종종 이용하는데 이때 일일권은 3천 원이면 끊을 수 있다. 사설 헬스장이었으면 일일권은 5만 원, 한 달 이용료는 10만 원이 넘었을 텐데. 게다가 이 체육센터는 샤워실도 잘 구비돼 있어서 여러모로 이득이다.


이렇게 예전과 비교하면 쓰는 돈을 크게 줄였지만, 힘들거나 쪼들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가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을 사고 있는 느낌이랄까. 다만 한 가지, 가성비의 아쉬움을 떠올리게 하는 게 있다면 바로 과일이다. 과일을 사는 것만큼은 전보다도 더 주저하게 된다. 음식은 어차피 꼭 먹어야 하니까 당연히 산다고 생각하지만, 과일은 어쩐지 사치품처럼 느껴진다. 안 먹어도 그만인 것을 그 맛 때문에 먹는 거니까.


그래서 돈을 벌던 시절에도 과일만큼은 거의 대부분 항상, 떙처리 매대를 먼저 살펴봤었다. 거기에 없으면 할인율이 조금이라도 있는 과일을 찾아서 골라왔다. 그런데 이렇게 할인율이 높은 과일은 항상 이유가 있다. 당장 오늘 빨리 먹어치우지 않으면 하루 이틀 안에 당장에도 물러져서 버려야 할 상태의 것들이다. 겉 주름이 쪼글쪼글한 망고나, 줄무늬가 선명하지 않은 수박, 가지 부분이 바싹 말라버린 포도, 갈색 멍이 든 복숭아 같은 것들이 그렇다.


그래도 이것마저 백수인 나에게는 감지덕지다. 백수 주제에 이런 할인된 가격에 과일을 먹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린다는 게 어디인가, 하면서 땡처리 매대에 과일이 올라오면 대충 상태를 살펴보고 나쁘지 않다 싶으면 바로 집어와 그날 바로 소진한다. 그렇게 먹기 시작한 땡처리 과일의 맛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식감이 조금 물렁할 뿐 당도도 괜찮았고.


그렇게 할인된 과일에 입맛이 길들여지고 있을 즈음, 누군가에게 과일을 선물로 받을 때면 신선한 과일 맛에 놀랄 때가 있다. 키위의 식감이 이렇게 적당히 단단한데도 달달할 수 있는 거였단 말이야? (내내 유통기한이 임박한 물렁거리는 키위만 먹었다)


얼마 전 시댁에 갔을 때도 점심식사 후 복숭아를 먹으라며 내주셨다. 할인해도 4개에 만원이 넘는 복숭아. 개당 단가가 너무 비싸서 마트에 갈 때마다 눈물을 머금고 지켜보기면 했었던 복숭아였다. 나와 달리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이 됐다며 자리를 파하려던 걸 억지로 붙잡아 앉히고 그 자리에서 천천히 한 조각씩 복숭아를 음미했다. 올해 여름 처음으로 맛보는 복숭아였다. 2~3개 정도를 깎아주셨는데 앉은자리에서 염치 불고하고 천천히 다 비워버렸다. 아삭아삭 달고 상큼한, 그날 먹었던 복숭아의 맛이 아직도 생각난다.

집에 돌아와서도 내내 복숭아 생각이 나서, 엊그제 남편과 마트에서 장을 보는데 복숭아가 20% 세일을 하길래 냉큼 집어왔다. 동네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물복을 세일해서 팔고 있었는데, 육안상으로 봤을 때 상태가 꽤 괜찮아 보였다. 그런데 역시나 집에 와서 플라스틱 상자를 열어보니 보이지 않는 복숭아 아래쪽에 갈색 멍이 꽤 크게 들어 있었다. 너도 빨리 먹어줘야겠구나?


집에 오자마자 복숭아 하나를 씻어 껍질만 조심스럽게 깐 뒤에 한 입 베어 물었다. 달달한 과즙이 얼굴과 손을 타고 흘렀다. 과즙을 양손에 다 묻히면서 정신없이 먹은 후, 손 냄새를 맡아보니 아직도 상큼한 복숭아 특유의 냄새가 남아있었다. 그래 이게 여름이지. 그리고 조금 더 물렁하면 뭐 어때, 너무 맛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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