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진로에 대한 의문, 그리고 대답
학창 시절부터 진로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해왔던 나에게 고등학교를 선택해야 했던 중학교 3학년 때는 그 어떤 때 보다 중요했다. 그때 당시 살던 집 앞 5분 거리에 위치한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로는 일단 가까운 통학 거리 및 예쁜 교복 (당시 중학교 하복이 너무 촌스러웠기 때문에 무척 중요했던 포인트),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할 수 있다는 장점 등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40분 정도 떨어진, 무난한 교복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선택한 것은 친구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의 학교를 다니고 싶었거니와,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욕심이 남도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마음 한 곳에 조용히 똬리를 틀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실상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듬성듬성 공부해도 누가 뭐랄 것 없었던 ‘이지고잉(easygoing: 쉽게 쉽게 흘러가는)’한 중학교 시절 따윈 잊어버렸다는 듯, 모두들 고등학교 존재 유무의 본질 자체가 ‘대학 진학’에 맞춰져 있는 것처럼 다 함께 한 마음 한 뜻을 모아 판을 짜고 치는 듯한 분위기에 부당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연년생인 동생을 꼬드겨서 대학에 가지 않을 것이라 당당하게 공표하며 소소한 투쟁을 하기도 했지만 그 역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칭찬에 약하고 인정 욕구에 메말라있던 나는 초등학교 선생님 한 분이 내게 ‘글을 쓰는 재주가 있다’고 해 주신 그 순간부터 그 선생님을 인생의 멘토로 모시며 ‘작가’가 되는 것을 꿈꿔왔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단편 영화를 제작하게 되는데, 이는 나를 영화 편집에 매료시켜 ‘대학 진학 반대 운동’을 당장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영화 편집을 공부할 수 있는 '언론정보학과' 전공의 대학에 입학했고, 입학하자마자 방송, 영상 관련 학과 동아리에 가입했지만 빌어먹을 꼰대 문화가 영상 편집에 대한 나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말았다. 신입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카메라를 만질 수 조차 없었으며, 영상을 편집할 수 있는 랩실에 들어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한 살 많은 선배라는 이유만으로 후배들을 ‘갈구는’ 사람들 때문에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다 (이때부터 한국을 떠나서 살아야겠다는 이민의 꿈을 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불행 중 다행히, 신입생 여름방학 공연 때 인원 수가 모자랐던 연극 학과 동아리에 캐스팅이 되어 연극에 참가하게 됐는데, 연극 학회 사람들은 방송 학회 사람들과 천지차이였다. 연극이 끝나자마자 방송 동아리는 당장 때려치우고(!), 연극 동아리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왕성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연극부 활동은 대학 생활의 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말 재미있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같은 사람들과 연습을 하는 게 너무나 좋았고, 연극부 선배들은 꼰대가 아니라 연습하는 것을 보러 올 때마다 두 손 가득 과자 및 음료 등 매점 털이를 해 와 주시거나 가끔은 저녁까지 쏴주시는, 호방하고 후배를 진심으로 챙기는 마음 따뜻한 분들이 대다수였다. 여전히 하늘 같은 선배님들이라 앞에서 연습할 때 긴장도 되긴 했지만, 늘 연습 말미에 좋은 연기와 고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피드백이 있어 연기의 스펙트럼을 늘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연극부 활동을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연기를 업으로 사는 것을 잠시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외모로 평가당하는 직업을 갖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따로 관심이 있었던 ‘광고’를 파보기로 결심한 뒤 광고 동아리를 알아보다가 대학교 2학년 초, 장장 8시간의 시험 시간을 거쳐 서울, 경기 대학교 연합 광고 동아리에 가입했다. 하지만 광고 동아리 역시 전공학과 방송 동아리에서 느꼈던 비슷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졸업 후 이력서에 한 줄을 넣기 위해, 자신의 ‘스펙’을 쌓기 위해 동아리에 가입한 사람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인지, 연극학회에서 느꼈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정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게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휴학한 뒤 캐나다로 와서 영어, 영업 및 마케팅을 공부하는 동안에도, 진로에 대한 생각은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뭘 하고 먹고살지?”, “내가 잘하는 건 뭐지?”, “내가 좋아하는 일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할까, 잘하는 일을 해야 할까?”...... 만약 그때 구글 키워드 검색 기록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이런 질문들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치열하기 고민한 끝에 새로 잡은 삶의 키워드가 바로 ‘패션’이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 중에 가장 돈이 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다시 캐나다로 와야겠다고 생각했기에 당시 룰루레몬(Lululemon), 아릿지아(Aritzia) 밖에 없었던 밴쿠버 패션계의 발전 가능성이 무수해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몇 년을 밴쿠버에서 패션 마케팅부터 시작(관련 글: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로 패션 마케팅을 시작하다: https://brunch.co.kr/@beyunique/41) 해서, 비주얼 머천다이징, 스타일링, 세일즈 등등을 하며 패션계에 몸 담았지만 남은 건 번아웃 증후군과 패션에 대한 무관심뿐이었다.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진로에 대한 고민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학창 시절에는 스스로에게 날 해오던 질문이었지만 막상 어느 분야에서 일을 오래 하고 나니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가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구해 친한 친구와 함께 대학교 때 자취하던 시절처럼 동거 동락하며 지내다 보니 어느새 나 자신을 다시 마주할 준비가 되어 그 질문에 맞닥드릴 수 있게 됐다. 이때 가장 도움이 된 것은 '일기 쓰기'였는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내 일기장에는 ‘그래픽 디자인’이 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다시 캐나다로 돌아와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기로 결심, 사립학교를 등록하고 지난 1년 반 동안 열심히 학생 때로 돌아가 공부를 했다. 비록 학교의 퀄리티는 비교적 만족스럽지 못했으나, 졸업 후 바로 밴쿠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레스토랑 중 한 곳의 오너와 함께 일을 즐기며 하고 있고, 패키징 디자인 및 여러 제품들을 출시하며 절찬리 홍보, 판매 중이며, 현재 메뉴 및 웹사이트 리뉴얼 디자인에 집중하고 있는 중이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할까, 잘하는 일을 해야 할까?”
그래서 다시 되돌아온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을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을 통틀어 100% 똑같은 성격이 존재하지 않듯 말이다. 어떤 이는 잘하는 일을 꾸준히 하라고 할 것이고, 어떤 이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최선이라고 조언할 수도 있겠다. 나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좋아하는 일을 할 경우, 그 일을 잘할 수 있게 되어 일을 하기가 수월해지는 것은 확실하다고 본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을 때, 그 일 자체가 싫어질 수 있다는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내가 지금 20대 초반의 나 자신에게 조언을 해 준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일을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으라고 할 것 같다.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해 보니 하는 일은 거기서 거긴데, 같이 일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일하는 질의 차이가 달라지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캐나다에서 살다 보니, 한국처럼 동질적인 문화 속에서 트렌드에 민감한 무한 경쟁사회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성 및 다양성을 추구하며 사는 삶을 많이 보게 된다. 나이에 대한 부담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확연히 덜 하고, 다들 '스펙'이니 '대기업 취업' 혹은 '공무원 시험', '영어 공부' 등등 "~해야 된다더라"하는, 남이 정해 놓은 길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꾸준히 찾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0대, 20대, 30대... 나이에 관계없이, 부모님이 원하는 내가 아닌,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을 따라가지 않고, '나 자신'과의 솔직한 대화를 해 보자.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가?' '나는 어떤 사람과 같이 있을 때 좋은가?'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그렇게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내면을 관찰하다 보면 자기만의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