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귀가

by 파레시아스트

저녁 8시

동지를 며칠 앞둔 해는 다시 나타나지 않을 기세로 사라졌다.

사무실을 나와 지하의 주차장으로 몸을 옮긴다.

공회전 없이 출발한 차는 서문을 빠져 나와 곧장 집으로 향한다.


5분 밖에 걸리지 않는 퇴근 시간이지만 라디오의 지직~ 거림을 왠지 듣고 싶었다.

약간의 잡음이 섞인 채널에서는 낮에 뉴스창에서 보았던 정치 주제로

갑론을박을 하고 있다.

토론의 결과가 내 삶에 끼칠 만한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무의식적으로 고민을 하게 된다.

직업 습관이다.


직장에서 집까지 신호등은 총 10개.

우회전 신호등을 빼면 녹색불을 꼭 받아야 하는 것은 7개다.

경찰청에서 신호등 세팅을 꾀나 잘 해놨다.

덕분에 첫번째 신호등만 잘 잡으면 집까지 논스톱이다.

첫 직장을 구하고 결혼하기까지의 처럼 말이다.


아파트 정문을 향해 빛을 옮겨 담으면 바리케이드가 멀뚱히 보고 있다가

노인처럼 한템포 늦게 바를 올려준다.

등록되지 않은 차는 열어주지 않기에 뒤에서 기다릴 때도 있고 바로 들어갈 때도 있다.

차단바는 좀 굼뜨긴 하지만 어김없이 나를 알아본다.

'오늘도 고생하셨군요~'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나의집 주차장은 지하1층까지만 있다.

이르지도 늦지도 않는 8시를 조금 지난 시간대. 빈자리가 제법 있다.

왼쪽 기둥을 끼고 후진.. 왼쪽으로 공간없이 바짝붙여 주차. 오케이~

왼쪽을 바짝 붙이면 오른쪽에 공간이 많이 남아 다른차가 편하기도 하거니와

다음날 우측으로 바로 차를 빼내기도 좋기 때문이다.

'패트릭 너는 혹시 매너남?'


목적지는 16층. 전망 오케이~

지하 출입문. 비서L(엘레베이터)이 기다렸다는듯 마중을 나오는 군.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 1층에 있었다는 건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집에서 저녁을 먹고 방금 1층으로 나갔다는 의미? 흠~'


나를 태운 지하1층 엘리베이터는 1층에 세울듯 말듯.

교묘한 무빙으로 16층까지 바로 올라간다.

아무도 타지 않기를, 아무와도 마추치지 말기를 바라는

내맘을 배려라도 하는 것처럼.


'삐 리 리~ 슬륵~'

현관문 건너편에는 신발들이 오늘도 가지런하다.

그들의 신발은 서로 자리싸움 하듯이 옹기종기다.

내가 도착해도 두줄로 선 그 녀석들은 서로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다.

신발들이 자라고 있다.

몇년전에는 작았는데 지금은 내것보다 크다.


내 신발 한 켤레는 비맞은 리트리버견처럼 현관문 우측에 있다.

아마 쪽수에 밀린 듯 하다.

'이 녀석, 외롭게 왜 그러고 있냐'

그들의 신발들과 내 신발사이에는 3.8선 경비구역만큼이나 멀고

삭막하다.

하루종일 외로웠을 한벌의 신발 옆으로 뒷꿈치로 벗은 구두를

갖다 슥~ 붙여준다.


질겅~ 내 신발을 주눅준 그 녀석들을 일단 한번 밟아주고~ 들어간다.

도르르.. 현관 슬라이딩 도어를 열면 거실은 캄캄하다.

모두 방으로 스멀스멀 들어갔기 때문이다.

흐흐~ 나의 존재감이란.


너무 조심히도 과격하지도 않게 현관 슬라이딩 도어를 닫고

거실을 지나간다.

복도 왼쪽 방밑 문틈으로 불빛이 흘러 나온다.

음악도 말소리도 tv소리도 그 어떤것도 없다.

공기만 있을 뿐..

'설마.... 이곳은 화성인가...'


중력을 의식한 듯 뒷꿈치를 든 조용한 걸음으로 거실을 비틀비틀 횡단하여 안방으로 향한다.

'스슥 스슥. 스슥 스슥'

양말이 거실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오늘따라 크다.

이 소리가 바로 나의 트레이드 마크 소리다. 이 집에서 내가 존재하는 유일한 소리.


'띠릿' 안방 전등이 켜지고

문을 살짝 닫는다.

잠금장치 놀이쇠가 '탁'하고 끊어치는 소리를 낸다.


도착했다. 무사히


나의 방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