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아찔했던 그녀와의 인연

무소식이 희소식이 되길 바라며

by 솔빛태연




누구에게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아찔한 순간이 있다. 나에게는 15년 전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와의 인연이 그렇다.


그 당시 그녀는 세련된 옷차림에 풍성한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내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앞선 고객이 나가는 찰나를 기다렸다는 듯 들어온 그녀의 기색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말투 곳곳에는 상담 좀 받아본 '고수'라는 느낌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녀는 상담실 이곳저곳을 살피느라 눈과 고개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인테리어 소품들을 조심스레 만져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던 그녀가 잠시 나와 눈을 맞췄다.


“시간 되시죠?” 마침 점심시간이 가까워진 터라 상담 예약은 비어 있었다.

“네, 상담 가능합니다.”


그녀 앞에 따뜻한 국화차 한 잔을 내어놓고, 나 역시 향을 음미하고 싶어 잔을 챙겨 마주 앉았다. 그녀의 질문은 두 가지였다. 남편과 이혼하고 싶다는 것, 그리고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데 잘 생기지 않아 걱정이라는 것인데 대화를 나눌수록 모순이 느껴졌다. 이혼을 진지하게 고려 중이라면 아이 문제는 신중해야 할 텐데, 그녀에게서는 이혼할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에 쌓인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던지는 듯했다. 상담보다는 대화가 절실한 사람, 외모는 화려하지만 내면은 지독히도 외로운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따뜻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상담을 많이 다녀봤지만 이렇게 책이 많고 예쁜 갤러리 같은 곳은 처음이에요.” 그녀는 앞으로 단골이 되겠다며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부모님 이야기부터 성장 환경, 의사인 남편 자랑까지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다만 평범한 이들과는 미묘하게 다른 무언가가 느껴져 조심스레 신경과 약을 복용 중인지 물었다. 그녀는 예전에 정신과 약을 먹었지만, 지금은 본인이 스스로 조절하며 복용을 거르기도 한다는 답을 들려주었다.


상담이 시작된 지 1시간이 지날 무렵,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듯해 다음을 기약하며 상담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그녀의 눈동자가 뒤집히더니 목소리마저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녀는 큰 소리를 지르며 "더 상담하고 싶은데 왜 끝내야 하느냐"라고 나를 노려보았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결국 염려하던 상황이 터져 버린 것이다. 상가 복도까지 그녀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지나가는 사람이 들으면 큰 사건이라도 난 줄 알 정도로 격앙된 목소리였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지만,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면 증세가 더 심해질 것 같아 심호흡하며 그녀를 지켜보기로 했다.

다행히 그녀는 금방 안정을 찾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지옥을 경험한 기분이었다.


나는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스러웠지만 마음을 다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상담소에 오기보다 병원을 먼저 방문해서 의사 선생님과 상의하고, 약을 제대로 챙겨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감정 조절이 안 되네요. 근래에는 이런 일이 없었어요.” 그녀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내게 호소했다.

“선생님, 다음에 저 거부하지 마세요. 저 꼭 다시 오고 싶어요.”





마음속으로는 다시는 이런 불안한 상황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예약 전화가 오면 반드시 거절하리라 다짐했다. 언제 또 날벼락같은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전화 예약 대신 복도에서 나의 동선을 살피기 시작했다. 고객이 없는 시간이나 상담이 끝나는 시점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느 날 화장실 다녀오다 우연히 복도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응석을 부리듯 갑자기 나에게 안겨왔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오면서 미워할 수 없는 그녀를 다정하게 꼭 안아주었다. 마음이 아픈 그녀에게 정말 좋은 멘토로서 진실한 도움을 주리라 마음먹었다.


다행히 그 후로 고함을 지르는 사건은 재발하지 않았다. 그녀는 예의를 갖춰 전화하기도 하고 가끔 사람이 없으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오기도 했다. 주변을 서성이며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불편했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나는 언니 같은 마음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조급한 마음에 돈을 투자하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경계시켰다.


그녀는 때때로 주변 사람을 데려와 사업을 하겠다고 했고, 나는 그녀의 착한 성정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녀를 사업에 끌어들이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경제적인 투자 등 돈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성급하게 투자하려는 그녀를 말리는 편이었고, 본인은 신중하라는 내 조언이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녀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내면의 힘이었다. 상담을 쇼핑하듯 돈을 쓰고 다니지 말고, 더 단단한 자신이 되기 위해 노력해 보자는 조언을 건네면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어느새 원점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드문드문 상담이 이어지다 몇 달씩 소식이 없으면, 여러 점집에 다녀온 이야기나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무리하게 돈을 투자해 회수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부모님과 본인의 성장 배경은 풍족한 편이었지만, 유독 경제적인 욕심이 과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상가 건물을 사서 임대하다가 2년 정도 지나 대출이자도 못 낼 지경이라며 팔기도 했다.


한 번씩 들려주는 그녀의 투자 이야기는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여러 부동산을 통해 계약을 신속하게 하고 금방 되파는 모습에서 투자 욕심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의 이야기나 주변 상황을 보면 거짓말 같지는 않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그녀를 욕심으로 몰고 가는 것 같았다. 투자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나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며 신중할 것을 권했지만, 마음이 급한 그녀는 서서히 나와 멀어져 갔다.



세월이 한참 지나 그녀의 소식이 정말 뜸해지니 문득 궁금하기도 했지만 따로 연락하지는 않았다. 타로와 손금, 지문 분석으로 상담을 하는 나는 그녀와의 인연을 '세월'이라는 이름의 잔잔한 추억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믿으며, 그녀가 어디선가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상담하다 보면 5년, 10년이 흘러 불쑥 다시 방문하는 고객들이 있다. 한 곳에서 1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잊지 않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가족과 함께 오기도 하고, 결혼하여 어린 자녀들과 방문할 때도 있다. 때로는 직업이 바뀌거나 이사를 한 후 다시 소개를 받아 오는 경우도 있어 모든 분이 반갑고 고맙다. 그저 세월의 흐름에 맡기고 나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예전의 그녀도 나도, 이제는 흐르는 시간 속에서 문득 떠올리는 그리운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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