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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May 08. 2024

아버님의 기억이 준
추억의 '일기장'

오늘을 사는 나는 어디쯤 와 있는가!

 오늘을 사는 나는 어디쯤 와 있는가?


아버지 기일을 앞두고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한 아버님의 모습을 찾아서 시골 고향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어머님의 부탁으로 화장 재를 뿌린 바닷가 내려 보이는 산자락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우리네 삶과 달리 여전히 굳건히 생명력을 지닌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랐고,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생명력을 지닌 아카시아 나무는 여전히 나의 기억과 달리 사방으로 뻗어 나 있다. 

다시 예전 기억을 더듬어 그 자리에 서 본다.


 오랜만에 돌아온 시골집 2층, 추억의 다락방에 오른다.

먼지 쌓인 책상 서랍을 열었더니 낡은 노트 몇 권 놓여 있었다. 

아마 동생이 다시 정리해 논 것 같다.

이 노트는 누가 쓴 걸까?

혹시 ‘아버지가 쓰시던 노트일까?’ 생각하며 노트를 펼쳤다. 

노트 상태는 오래됐지만 바랜 색만 빼면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의 손때가 거의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빛바랜 노트 첫 장에 검은색 사인펜으로 ‘자아(自我)’이라고 두 글자가 적힌 게 다였다. 


 그런데 분명 내 글씨였다. 

정확히는 20대 초반시절의 겉멋 든 필체이자 헝클어진 뒤죽박죽의 심경표현의 내용이다.

기억으로는 그 시절 나의 우상이었던 누군가의 글을 모방하고 그 사람의 글씨체도 따라 흉내 낸듯하다.
 
‘자아’라고 이름 붙인 그 시절의 감수성이 가득한 일상의 기록들이 적혀 있는 노트였다.

굳이 저 단어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왜 저 단어만 각 노트 첫 장과 그다음 장에 반복해서 적혀 있는 것일까? 

아무도 없는 다락방에서 생각이 깊어졌다. 

맥없이 노트를 덮는데 머릿속에서 여러 장면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 시절, 대학 방학이면 서울을 떠나 고향에 갔을 때였으리라. 

매일 고등학교 동창들과 밤늦게까지 놀았다. 

친구 아무개 생일이라고, 다른 아무개가 공기업에 입사했다고, 또 다른 아무개가 실연으로 우울 해 

한다고 해서,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부모님과 식사 한 끼 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의 불찰이었다. 

즐거움과 한가로움에 취해서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시기였다. 


어느 날, 친구집에서 2일 보내고 귀가한 내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그 나이에는 앞으로 뭘 할지, 그렇게 술만 마시면 어떡해! 몸 관리를 해야지”라고 하셨던 것 같다. 

지금이야 젊으니까, 무분별해지기 십상이지만 이제 곧 대학졸업도 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고 하셨다.

그 당시에 내가 아버님의 그런 말씀을 곧이곧대로 들었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름 바닷가 피서지에서 거짓말 같은 운명의 여인을 만났다.

그 여인을 통해서 세상의 불공평과 빈부의 격차, 단지 좋아함만으로 같이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단 4개월 만에 실연이란 이름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제야 보다 나은 세상으로 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었다.

집안 형편이 따르지 않았음에도 억지로 우겨서 유학길을 홀로 떠나는 계기가 됐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 시기에 나를 찾는 ‘자기’라는 처절한 자학적 감정 찌꺼기가 일기장의 제목으로 나타났으리라.
 
 젊은 청춘의 시기는 아름답지만 위험한 것이었다

청춘이어서 바쁘고, 청춘이니까 그렇게까지 열정을 기울였다. 

그런 청춘에만 기댔다가 해야 할 일과 시기를 그르치기도 한다. 

젊은 열정만 믿고 과로하거나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주변사람을 잃기도 한다. 

아버님은 아마 그런 과 몰입한 열정의 신기루에 대해 말씀하시고 싶었을 것이다.


 빛바랜 노트를 버리지 않아서, 나는 다시 그 시절, 그 장면들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의 과신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과는 별개로, 두 글자로 열어젖힌 실연과 숱한 잊힐 번한 기억들이 

떠오르는 생생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강박적으로 메모하기 시작한 것도 기억 때문이 아니었을까? 

남아 있어야 다시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남은 것으로부터 잃은 것을 헤아릴 수 있으니까! 

쓰다만 다 쓴 몇 권의 일기와 못 채운 노트를 선뜻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아직도 붙들게 남아서가 아닐까? 


처음 맛본 실연, 열정 가득한 바닷가의 추억, 유학길을 위해 밤새운 도서관에서 본 새벽 별들이다. 

그런 기억은 기록으로 추억된다. 

기록은 지난 기억에 다시금 소생시켜 생명력을 부여한다. 

‘그때’를 ‘지금’으로 소환하는 데 기록만큼 생생한 것이 없을 것이다

기록에 무엇을 쓸지, 어떻게 말할지, 언제 어디로 갈지, 왜 사는지, 

내가 누구인지 등의 질문부터 그때와 지금 무엇이 같고 다른지 그 상황의 내력까지 일러준다.
 기록을 들추면 여기까지 온, 살아온 실타래 같은 궤적이 선명해진다. 

고작 단어 하나, 사진 한 장뿐인데도 실타래가 풀리듯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남길 의도로 작성되는 기록이 아니라며 나를 깨우치고 변화시켰던 순간이 모인 일기이다. 

일상을 기록함으로써 감정은 분명해지고 나아가 생각도 단단해진다. 

기억의 왜곡과 축소를 막아주는 것도 기록들인 일기이다. 

어릴 적 쓴 일기가 일상의 패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성인이 되어 남기는 일기는 기억할 만한 내 인생의 장면들을 넓히고 늘려주는 일이 분명하다.
 
 몇 년 전부터 ‘제2의 자기’이란 의미로 일기를 쓰고 브런치에 글도 올린다. 

오늘 찍은 사진 한 장과 거기에 걸맞은 단어 하나를 적는다. 

들여다보면 그때 그 순간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기록하는 사람이 늘 한창때를 사는 그 이유이다.

“자신을 잘 알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매일이 똑같은 날은 없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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