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이후, ‘주 4.5일 근무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제도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가질 수 있게 하고, 과도한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자는 휴머니즘에 입각한 정책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더 많은 사람이 더 적게 일하게 되었을 때도, 기존과 같은 수준의 성과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제시한 ‘파레토의 법칙(80/20 법칙)’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그는 조직 내 약 20%의 인력이 전체 성과의 80%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이는 봉건제 이후 등장한 관료제가 분업과 전문화를 통해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본 막스 베버의 이론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관점이다. 베버는 각 개인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고, 상하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조건에서 조직의 효율성이 발휘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역할이 분명히 구분된 관료제 구조에서도 다수의 인력이 '가짜 노동'에 머무르고, 실제 성과는 소수의 책임 있는 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인식은 점차 조직 설계에도 반영되기 시작했다. 조직은 더 이상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는 인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지 않고, 복수의 역할을 자율적으로 감당하며 성과에 책임지는 인력을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복잡계 이론과 시스템 사고에 기반한 애자일 조직(Agile Organization), 또는 Cali Ressler와 Jody Thompson이 이야기한 성과책임조직(Results-Oriented Work Environment, ROWE)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국내 기업인 토스는 이러한 조직문화의 대표 사례로 언급된다. 토스는 전통적 관료제의 틀을 깨고, 출퇴근 방식이나 보고 절차가 아닌 결과 중심의 평가 체계를 도입했다. 각 프로젝트마다 최종 의사결정권자(DRI: Directly Responsible Individual)를 지정하고, 자율성과 책임을 바탕으로 구성원 각자가 업무를 주도하는 구조를 만들어왔다. 이를 통해 토스는 규모가 커진 이후에도 빠른 의사결정과 유연한 실행을 가능케 하며, 실질적인 비즈니스 임팩트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최근엔 미국시장 상장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 형태도 결코 이상적인 모델은 아니다. 빠른 성과와 자율성을 강조한 만큼 그 이면에는 ‘성과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소진시키는 구조적 압박이 존재한다. 주 40시간이라는 표준 근로 시간이 의미를 잃고, 자율이라는 이름 아래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성과를 위해 투입하게 된다. '가짜 노동'은 줄었지만, 철학자 한병철이 말한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 주체"로서의 정체성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토스는 주 4.5일제, 연말 휴가(‘겨울방학’) 도입 등 근무 환경을 개선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해왔지만, 야간과 주말까지 이어지는 몰입형 노동이 여전히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업무용 메신저에서는 ‘24시간 알림이 울린다’는 표현이 등장할 만큼, 일과 삶의 경계는 모호해진 것으로 보인다. 구성원들은 명시적 강요 없이도 프로젝트에 대한 책임을 내면화한 채, 성과주체로서 저녁 시간과 주말, 심지어 휴일에도 일을 놓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자율과 책임이라는 명분이 일과 삶의 균형을 해치는 구조적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할 때, 이제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핵심 과제는 명확해진다. '성과주체로서의 소진을 막으면서도, 조직이 지속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지속 가능한 삶’을 가능케 하는 열쇠다. 이 문제를 수치로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5명이 50~60시간 일해서 내는 성과’를 ‘7명이 40시간씩 일해서 동일하게 달성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
하지만 파레토의 법칙이 시사하듯, 단순히 사람 수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성과가 증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원이 많아질수록 책임감 있는 집중과 실행이 분산되며, 성과는 하락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가? 그 구조적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원이 많아질수록 성과가 떨어지는 이유는 단순히 분업화 때문이 아니다. 조직 내부의 심리적·구조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1. 책임 회피 심리
다수가 존재하면 ‘내가 하지 않아도 누군가 하겠지’라는 심리가 생기며, 개인의 주인의식이 약해진다.
2. 의사결정 지연
이해관계자가 늘어나면서 의사결정이 느려지고, 실행 속도는 급격히 둔화된다.
3. 정보 비대칭
구성원이 많아질수록 정보가 일관되게 전달되기 어려워지고,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증가한다.
4. 신뢰 밀도 저하
팀원 간의 신뢰 기반이 약해지며, 확인과 통제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내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낳고, 구성원들은 점차 주도성을 잃은 채 지시를 기다리거나 승인만을 받는 방식으로 일하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원이 늘어나도 각자가 책임을 지고 실행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구체적인 방안은 다음과 같다.
1. 역할 기반 분산 책임 체계(DRI 구조)
각 구성원이 자신만의 책임 영역을 명확히 갖고, 실행과 의사결정을 병행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즉, 인원이 늘어도 각자가 책임지는 영역이 명확하고, 권한이 부여된 구조를 유지한다. 애자일 조직에서 흔히 말하는 Squard/Tribe 모델이나, 토스의 Silo-DRI 방식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핵심은 ‘한 명의 책임자만 있는 팀’이 아니라 ‘각자 역할에서 책임을 갖는 팀’을 만드는 것이다.
2. 공유 목표와 개인 DRI의 병행
팀 전체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되, 세부 활동마다 명확한 책임자를 두어 실행력과 일관성을 유지한다. 세부 활동마다 개인 단위 DRI를 지정해 책임과 실행을 동시에 유지한다. 해당 해결책의 핵심은 “나는 이 목표의 어느 부분을 책임지는 사람인가?”를 모든 구성원이 알고 있게 만드는 것이다.
3. 정보 접근과 의사결정의 탈중앙화
모든 구성원이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실리콘밸리나 토스의 사례처럼 Slack, Notion, 전사 타운홀 등을 통해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가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해당 해결책의 핵심은 정보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구조가 아니라, ‘누구든지’ 판단 가능한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4. 심리적 소유감을 높이는 ‘작은 팀’ 중심 설계
팀 규모가 클수록 책임 회피 심리가 높아진다. 따라서 인원이 많아지면 ‘작은 팀’ 단위로 나누어 작은 조직처럼 운영하고, 각 팀에 자율과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 핵심은 ‘조직의 소속감’보다 ‘과제에 대한 소유감’을 강화하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5. 성과 공유 구조의 재설계
성과가 소수에게만 집중되지 않도록 설계하고, 팀 성과와 개인 기여를 연결하는 보상 구조를 마련한다. 이때 정량적 지표뿐 아니라 동료 평가, 목표 기여도 등 다양한 기준이 필요하다.
다만, 위와 같은 해결책은 이상적이지만, 스타트업과 같이 유동성이 높은 조직에서는 쉽게 적용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특히 여러 환경적 이유로 투자시장이 축소된 스타트업이 처한 현실은 다음과 같다.
1. 지속적인 피봇
사업 모델, 고객, 시장 타겟이 끊임없이 바뀌며, 직원의 역할 정의가 고정되기 어렵다.
2. 역할의 유동성
한 명이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며, DRI를 명확히 나누기 어렵다.
3. 자원 부족
인력도 자본도 한정되어 있어, 여러 명에게 자원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 어렵다.
4. 의사결정의 급박함
정보 공유보다 실행이 우선되는 문화, 공식적 구조화보다 ‘누가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해진다.
이런 유동적 환경에 처한 현실을 고려하면, 이론적으로 깔끔한 책임 분산 구조보다 더 유연하고 실용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다분히 유동적이고, 예측하기 어려운 스타트업의 환경을 고려하였을 때, 대안적인 방안은 다음과 같다.
1. 업무 단위 책임자(DRI) 설정
업무(프로젝트) 단위로 단기 책임자를 설정하고, 1~4주 단위로 업무가 재정렬(Re- Align)될 수 있는 구조를 도입한다.
2. 기여의 시각화
모든 업무(프로젝트)에 대해 누가 DRI인지, 누가 기여자인지를 가시화한다. 이는 역할이 아니라 업무(프로젝트)기준으로 책임을 부여하기 때문에 역할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한다.
3. 긴밀한 회고 기반 피드백
스프린트 종료 후 회고를 통해 업무 성과를 점검하고, 변화한 상황에 맞춰 책임을 재정렬(Re-Align)한다.
핵심은 인원이 늘어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업무 단위의 책임이 설계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점이다. 각 구성원이 자신의 책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이를 업무 중심으로 시각화하고 관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원 증가가 생산성 하락으로 이어지지 않게 된다.
성과는 자율성과 책임, 그리고 가시성을 바탕으로 구성될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것이 된다. 저녁이 있는 삶, 회사의 확장 등 사람 수는 다양한 이유로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성과가 유지되어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임팩트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의 업무에 대한 책임의 구조가 반드시 설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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