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버전: 노력하긴 싫은데, 있어 보이고 싶어
지난 5월 진로·상담 교과 교생으로 교육실습을 갔다. 아이들이 짓궂어 작년부터 교장선생님의 결단으로 여자 교생을 받지 않는 남자고등학교다. 이곳은 서울 강북구에서도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모인 학교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반 아이 중 한 명이 ‘긍정적 자극을 받을 수 없는 곳’이라고 말하자 많은 아이들이 그 말에 공감을 표현했다.
2주는 중간고사, 수학여행 등으로 공치고, 남은 2주 동안 31명의 고1 학생들과 상담을 했다. Z세대,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할 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뜻밖에도 자신의 진로를 위해 초록창에 “0000 학과” 혹은 “000이 되려면”이라는 검색어조차 눌러보지 않았다. 그들과의 상담은 개인적 편차가 있었지만, 그 고갱이는 똑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고딩일 때와 하루 일과를 보내는 양상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결국 똑같았다. 뭐가 똑같았을까? 그들이 갖고 있는 감정의 지도를 펼쳐보겠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이 비로소 노력이란 걸 하게 만드는 비밀을 조금 풀어보도록 하겠다.
아이들을 소외시키는 교육비극의 서사
기) 막연한 희망
고1 모의고사 5~6등급을 기록하는 친구들이 교사, 약사, 파일럿을 말한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터무니없는 희망을 갖는 것일까?
대부분의 아이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아, 이제부터 개 빡세게 공부한다. SKY 간다. 아니, 인서울이라도 간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막상 고등학교 들어와서 하는 짓이란… 학교 끝나면 일단 PC방이나 코노(코인노래방)로 간 다음 학원으로 간다. 물론 학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내용을 먼저 예습해 가진 않는다. 그냥 가서 선생님이 말하는 걸 듣는다. ‘음~ 저렇게 푸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간간이 카톡, 페메(페이스북 메신저)도 하고 유튜브를 보기고 한다. 그렇게 1시간 반 정도 들으면 공부를 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렇게 강의를 듣는 것은 운동한다면서 유튜브로 헬스 트레이너가 운동하는 걸 본 거랑 똑같을 뿐인데 말이다.
이제 집에 가서 공부를 해야 되는데, 오늘은 벌써 학원에서 공부를 했으니, 일단 애들이랑 피방이든 코노에 다시 간다. 또는 일단 집에 가서 공부를 하려 했지만 양말 벗고 침대에 살짝 누웠다가 스마트폰과 물아일체가 되어 스마트폰 너머의 세계를 유영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새벽 1~2시. 결국 잔다. 매일매일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하지만, 공부를 조금은 했다고 생각하며 자위한다. 그리고 내일은, 아니 방학이 되면 이제는 개 빡세게 공부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교사나 약사, 파일럿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승) 절제된 불안
저런 희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방이 많아서, 불안을 다른 방에서 키우고 있다. ‘SKY, 아니 인서울은 가겠지. 교사, 약사 혹은 파일럿이 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안 될 것 같아서 미친 듯이 불안하다. ‘인서울도 못 가고 지잡대에 가면 내 인생이 패배자가 될 것만 같은데, 이대로 살면 결국엔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 공부하기는 정말 싫고, 그렇다고 공부 말고 다른 흥미를 키워나가기는 싫고, 그래서 학생들은 의도적으로 불안을 절제해서 키워나간다. 왜냐하면 불안이 억누를 수 없을 만큼 커져 ‘이대로는 인생 X 된다’라고 느끼면 내가 무언가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 막연한 희망과 적절히 밸런스를 유지할 정도로만 불안을 키워나간다. 이를 통해 현상유지를 할 수 있고, 더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이렇게 더 이상 확대되지 못하는 불안의 에너지는 우울을 증폭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용되지 않으면 결국 불안이 커져 자신이 뭔가 노력하게끔 만드는 기제로 사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합리화 기제는 매우 스마트하기 때문에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전) 증폭된 우울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이들은 불안이 커지면 노력을 하게 된다. 이에 아이들은 불안을 키우기보다 우울을 더 키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계속해서 ‘왜 너 자신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가?’란 질문을 마주하게 되면 “그냥… 답답하고 우울해요”라고 대답한다. 왜 우울한지에 대해서 물으면 학업이나 가족과의 스트레스를 언급하는데, 나중에는 우울의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이 순간이 매우 과격하고 폭력적인 내 상담의 하이라이트다. “너는 우울하다고 말하면서 스스로에게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우울하니까, 힘드니까,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어쩌면 네가 일부러 너의 우울을 증폭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면 아이들은 5초에서 10초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맞아요. 와~, 대단하시네요! 그걸 간파하신 건 쌤이 처음인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나도 그랬으니까.”라고 답한다. 실제로 나도 고딩때 그랬으니까.
앞서 밝힌 것처럼 아이들이 우울을 증폭시키는 이유는 본인에게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면죄부를 주기 위함이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이루어지기보다,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누군가가 진심으로 본인을 위해 정확히 알려주면, 아이는 이제 의도적으로 증폭시킨 우울의 커튼을 걷고 노력이란 걸 드디어 해 보려고 한다. 우울이 합리화 기제임을 간파당하게 되면 쑥스러워서라도 노력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한 아이들, 우울을 통해 노력을 하지 않는 게 고착된 아이들은 무력감을 학습하게 된다.
결) 학습된 무력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어차피 해도 안 돼요.” 증폭된 우울은 노력을 하지 않게 만들었고, 아이들은 예전보다 빠르게 사다리를 오를 것을 포기한다. 31명 중 9명의 아이들은 이런 학습된 무력감을 강하게 드러냈다. 아마도 1년을 아무 조치도 안 한 채 보내면 이런 아이들은 20명으로 늘어날 것이다.
이들의 경우는 막연한 희망이 가장 구석진 방으로 쫓겨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리고 20kg의 덤벨을 들 수 있는 상황인데, 당장 100kg 덤벨을 들어야 된다는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어 무력감을 계속 학습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예를 들면 영어 실력이 중1인데, 본인은 고1이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고1 영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고1 영어를 하기 위해서 하루에 3시간씩 공부해야 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하면서 나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듯 학업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아이들은 이제 학교에서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존재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잠’이란 최후의 보루를 선택하게 된다. 수업시간에 존재 이유를 발견할 수 없어 느끼게 되는 무력감을 맛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학습된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
그렇다면 아이들이 학습된 무력감의 길로 빠져들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상담해야 할까? 아이들과 상담을 해본 결과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은 모두 ‘일단 공부를 해야 기회가 많아지지’, ‘너 지금 합리화하고 있는 거야’라고 결론만을 말씀하시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면 아이들은 바로 저항한다. 본인들이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을 때, 학원에서 강사의 수업을 듣고 있을 때, 침대에서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나 SNS를 보고 있을 때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말씀이 아무리 ‘맞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방어기제가 강하게 작동되기 마련이다.
그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을 짚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금 얘기한 그들의 일상에서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하나하나 얘기하면서 동의를 구해야 했다. 내가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본인이 인정할 수 있도록. “너 일단 학교 끝났으니까 공부할 마음은 없고, 애들이랑 놀고 싶고 게임 장면이 아른거려서 게임하러 갔지?”, “그래도 공부 하긴 해야 하고, 학원은 가야 되니까 학원 가서 수업 들었지? 먼저 풀어서 간 것도 아니고 그냥 강사가 설명하는 건데, 뭔가 이해되고 공부하는 느낌을 받았지?”, “학원에서 공부했다고 느껴서, 죄책감이 많이 사라져 침대에 누웠는데 다시 못 일어나고 계속 유튜브나 봤지? 그러면서 ‘내일은 그래도 좀 더 공부해야지’라고 생각했지?” 이런 식으로. 그랬더니,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본인의 감정을 내가 다 안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나를 ‘강한 어른’으로 인정하고 내 말을 경청할 자세로 바뀌어 자신의 합리화를 인정하였다.
20kg부터 시작하게 했다
합리화를 인정하고 나서도 아이들은 두렵다. 당장 100kg의 덤벨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때 아이들에게 너희는 지금 20kg밖에 못 드는 ‘멸치’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 부분은 학생 스스로 합리화 기제를 깨닫게 하는 과정을 어떻게든 해낸 선생님들도 제일 안 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본인은 그 나이 때, 한 시간 공부하는 것도 버거워한 경험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게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자기방어기제를 제거하면 의지를 통해 하루에 적어도 3시간씩은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안 된다. 평소 운동을 안 해본 사람에게 “당장 헬스장에 가서 100kg 덤벨을 12번씩 3세트 들어보세요.”, “매일 헬스장에 가서 1시간 30분씩 유산소와 무산소 운동을 반복해 보세요.”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이들에겐 공부라는 너무나도 하기 싫고 어려운 일을 3시간씩 할 엉덩이 근육이 없다. 또, 고1이라고 해서 아이들의 수학 실력이 고1은 아니지 않은가? 대체로 분수, 함수, 인수분해 등에서 큰 펑크가 난 상태이다. 이런 아이들이 고1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고1 수학을 푼다. 그러니, 이들에게 어떤 문제집을 풀지를 스스로 판단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운동으로 치면, 어떻게 근육을 길러야 할지 전혀 모르는 초보자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자존심을 죽이라 하고, 10문제 중 6문제를 풀 정도의 난이도의 문제집을 구해서 시작하게 했다. 대체로 수학은 중1부터, 영어는 1인칭, 2인칭, 3인칭을 구분하는 단계에서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라고 조언했다.
이렇게 개념적으로 100kg이 아닌 20kg을 들어야 함을 납득시키고 났더니, 실제로 20kg을 들 수 있는 일주일 시간표를 만들어 줘야 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이나 학원에서 공부하는 시간을 빼고, 유튜브나 SNS로부터 멀어진 상태에서 1주일에 딱 7시간을 공부하도록 했다. 하루에 한 시간씩 ‘자기 공부’ 시간을 갖게 한 것이다. 이렇게 7시간의 공부시간표가 나오면 아이들에게 “이렇게 20kg을 한 달만 들면 네가 30kg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렇듯 한 달에 10kg씩 무게를 늘리다 보면 충분히 100kg을 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때 내 경험을 들어 맛깔나게 썰을 풀었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매우 흥분된 상태가 되었다. 하루에 한 시간만 하면 된다니, 정말로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들은 막연하게 100kg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할 수 없다고 느껴 포기했던 것이지,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20kg을 드는 아이들은 내게 일주일 동안 한 일들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줬다. 자랑스럽게.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본인의 성취를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계속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연락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이 명분이 아이와 지속적으로 ‘좋은 라포’를 형성할 수 있게 해 준다.
(2019년 필자의 교생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저도 멸치여서.. 마른 분들을 비하하기 위한 의도는 전혀 아님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