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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100kg 덤벨을 들기를 꿈꾸는 '멸치'들

취준생 버전: 원하는 내가 아닌 아무렇게나 사는 내가 되는 이유

by 정준민




재수 때부터 군대를 거쳐 29살이 되기까지. 약 500여 명의 대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원하는 삶을 원하는 방법으로 살아내게 하는 것이 나의 비전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과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낼지에 대한 이야기도 참 많이 나눴다. 개인적인 편차가 있었지만 그들이 하는 고민의 본질은 똑같았다. 표면적으로는 ‘요즘 취업이 참 어렵다’ ‘자아실현하면서 사는 게 참 어렵다’는 말로 퉁쳐지는 그들의 감정 서사를 기승전결로 펼쳐보겠다.


‘원하는 나’가 아닌 ‘아무렇게나 사는 나’가 되다


기) 막연한 희망


정말로 되고 싶은 직업과 관련된 경험을 학과 수업을 통해서만 얻으면서도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전문직, 창업가, 증권가, 대기업 취직 등을 말한다. 대학생들은 어떻게 이런 터무니없는 희망을 갖는 것일까?

대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지난하고 지루한 입시의 관문을 통과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이제 입시는 끝이다! 정말 하고 싶은 걸 찾고, 해 봐야지.” 그런데 막상 대학교에 입학해서 하는 짓이란... 우선 신입생 때는 노느라 혹은 학점만 따느라 정신이 없다. 입시가 끝났다는 해방감과 부모님의 느슨해진 감시 하에 나사가 풀린 것처럼 논다. 출튀도 간간이 하면서. 어쩌면 이 순간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그저 입시로부터 벗어난 해방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점만 잘 따면 부모님이든 주변 사람들에게 떳떳할 수 있을 것 같고. 게다가 어쨌든 대학생이란 신분에 도취되어 전문직이든, 대기업 취업이든 할 수만 있을 것 같다. 그리고 2학년이 되면, 군대를 가면, 휴학을 하고 나면 뭔가 개 빡세게(?) 나를 찾아보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전문직이든, 취직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승) 절제된 불안


저런 희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는 방이 많아서 불안을 다른 방에서 키우고 있다. ‘전문직이든 대기업이든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안 될 것 같아서 미친 듯이 불안하다. 이대로 뭔가 하는 척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불안감에 무엇이든 붙잡고 해 봐도 그게 삶과 연결이 되지 않아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을 법한 내가 되지 못할 것만 같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또 어떻게 해야 할지도 막막하고, 심지어 좀 아는 것 같아도 노력하는 게 귀찮다. 그러니 이들은 의도적으로 그 불안을 적절히 절제한다. 왜냐하면 불안이 억누를 수 없을 만큼 커져 ‘이대로는 인생 망한다’라고 느끼면 내가 무언가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 막연한 희망과 적절히 밸런스를 유지할 정도로만 불안을 키워나간다. 이를 통해 현상유지를 할 수 있고, 더 노력하지 않아도 될 수 있게.

구체적으로 2~3학년 때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생각해보자. 군대를 다녀온 남학생들은 군대에서 나름대로 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전역을 하면 이것도 해야지, 저것도 해야지’ 많은 계획들을 세워본다. 하지만 전역하고 몇 달이 흐르면 또 똑같다. 학과 수업 듣고, 술 마시고, 게임하고.. 물론 좀 더 뭔가를 하긴 한다. 하여 신입생 때보다는 좀 더 많은 걸 했다고 생각하면서 그 막연한 희망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불안하다. ‘음,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지만 그렇다고 노력은 더 안 한다.

여학생들은 이 시기에 휴학을 한 번 한다. 뭘 해야 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혹은 무언가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 시기 동안 자기를 탐색하는 노력들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뭔가 한 것 같긴 하지만. 그래서 남학우들과 마찬가지로 불안하다. ‘음, 이대로 살아도 되나.’ 물론 그렇다고 치열해지는 건 아니고.

그러나 불안이 계속 커지지 않기 위해서 불안의 에너지는 무언가로 치환될 수밖에 없다. 스마트한 우리의 방어기제는 이를 우울을 증폭시키는 데에 사용한다. 왜냐하면 불안의 에너지가 커지게 되면, 무언가 노력하게끔 만드는 기제가 되기 때문이다. 현상유지를 위한 방어기제는 매우 스마트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전) 증폭된 우울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불안이 커지면 노력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학생들은 불안을 키우기보다 우울을 더 증폭시킨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계속해서 “왜 너 자신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되면 “그냥..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답답하고 우울해요”라고 대답한다. 왜 우울한지 물어보면 인정받을 법한 직업을 갖는 것의 어려움이나 주변 관계에서의 스트레스를 언급하는데, 종국에는 우울의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던진다. 너는 우울하다고 말하면서 스스로에게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우울하니까, 힘드니까,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어쩌면 네가 일부러 너의 우울을 증폭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면 학생들은 5초에서 10초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맞는데, 아.. 좀 그렇네요.”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이런 일련의 흐름을 3~4학년을 돌아보면서 생각해보자. 취업이라는 관문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이제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막막하다. 어디 대기업 인턴이든 뭔가 직업과 관련된 있어 보이는 것을 해보고 싶은데, 경력이 없다고 뽑아 주지 않고. (사실 경력을 쌓으려고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그마한 대외활동들은 지금 와서 해봤자 좀 늦은 것 같고. 명절 때 가족들이 “요즘 뭐하고 지내냐?” 등등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짜증 나고. 불안해서 뭔가 해야 될 것 같은데, 막 우울하고 지쳐서 신체적·정신적으로 그냥 무언가를 치열하게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래서 누군가가 ‘왜 치열하게 본인을 위해 노력을 하지 않냐’고 물으면 이런 대답을 하게 되는 것. “그냥.. 답답하고 우울해서.”

위의 말은 스스로에게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면죄부를 주기 위한 마음속 방어기제의 농간이다. 이는 의식적으로 이루어지기보다,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누군가가 진심으로 본인을 위해 정확히 알려주면, 학생은 이제 의도적으로 증폭시킨 우울의 커튼을 걷고 노력이란 걸 드디어 해보려고 한다. 우울이 합리화 기제임을 간파당하게 되면 쑥스러워서라도 노력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한 학생들, 우울감으로 인해 노력을 하지 않는 게 고착된 학생들은 무력감을 학습하게 된다.


결) 학습된 무력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어차피 해도 안 돼요.” 증폭된 우울은 노력을 회피하게 만들었고, 학생들은 예전보다 빠르게 사다리를 오를 것을 포기한다. 여러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친구들이 이런 모습을 보였다. 그로부터 1년, 2년이 쌓여 가면 이런 무력감은 더 강하게 학습될 것이다.

이들의 경우는 막연한 희망이 가장 구석진 방으로 쫓겨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리고 20kg의 덤벨을 들 수 있는 상황인데, 당장 100kg 덤벨을 들어야 된다는 생각이 무력감을 계속 학습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필자의 회사에서 진행하는 건강한취준 교육자료 일부


예를 들면 막연히 스포츠 마케팅 관련 직업을 갖고 싶은데, 자신이 스포츠 마케팅과 관련해서 한 것이라고는 그저 광고학과에서 들은 수업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스포츠 마케팅 관련 직업에 취직하기 위해 ‘00회사의 인턴을 해야 하지 않을까’ 등의 하기 어려운 미션을 막연히 생각하면서 나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취준생이 되었을 때를 돌아보면서 생각해보자. 취준생이 되기 전에 한 것은 딱히 없다. 내 전문성이나, 성취한 것들에 대해 자소서를 쓰라고 하면 자소설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일단 취준생이랍시고 가고 싶었던 데에 서류를 다 지원해 본다. 그렇지만 다 떨어진다. 중요한 것은 살면서 지금까지 이렇게 반복되는 실패를 단기간에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10개, 20개, 50개.. 다 떨어지다 보면 자존감도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러면서 내가 안 되는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인턴 경력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이런 자격증을 취득하지 않아서인 것 같아.’ 등등. 그러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내가 원하는 직업을 대부분 못 갖는 게 사실이잖아. 그냥 일단 아무 데나 들어가자.’


아무 곳에서 아무렇게나 일하는 나.


그렇게 원하는 나로 살아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포기하게 되는 것이 많은 대학생들의 비극적인 서사의 결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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