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교육은 죄가 없다. 그러나 대안교육은 죄가 있다

타협하지 않는 교육자의 운명=실험가=거짓말쟁이

by 정준민


때때로. 아니 대체로. 대안교육을 나온 이들은 자신들이 나온 학교에게 죄를 묻는다. 이우중·고등학교를 나온 나 역시도 재수를 결심하면서 그러했다. 아니, 6년 동안 대안교육을 받았는데 결국 학원에 가서 재수를 해야 하는 건가? 일반학교 나온 거랑 뭐가 다른 거지? 그러나 교육학 공부를 하면서 내가 다닌 학교에 죄를 물을 수 없게 됐다. 죄를 묻는다면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욕심, 혹은 모순된 욕망에 물어야겠지.


졸업생이 명문대에 못 간 게 대안학교 탓인가요?


카페에서 공부를 하다가 중3 자녀를 두신 어머님들의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듣게 됐다. 한 분이 자녀를 이우학교에 보내고 싶단다. 이우학교가 일반학교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하게 해 주고, 대학도 잘 보낸다고. 그러자 옆에 계신 분이 훅 끼어든다. “아니, 요즘엔 대학 잘 못 보낸다는데? 서울대 가는 애도 없다고 하던걸.” 또 다른 분이 거든다. “졸업생이 대학 못 가면 나 몰라라 한다던데...” 그러자 이우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싶다고 하신 분이 갈등이 생긴 듯 한마디 하신다. “아, 어쩌지? 그냥 일반고나 보낼까?”

여기서 드러나는 두 마리 토끼. 일반학교에서는 할 수 없는 경험과 좋은 학벌. 또한 꽤나 무리한 모순된 욕망도 엿보인다. 새로운 경험도 하게 해 주면서,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책임도 져주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 하나가 목구멍을 간질거린다. “아니, 그걸 학교가 책임져야 합니까? 학교가 학원이에요? 명문대 진학 보장, 뭐 그런 규범이라도 있나요? 나아가 명문 대학에 학생들을 보내는 것이 학교의 궁극적 목적입니까?” 학교의 목적은 학교의 개수만큼 다를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 대안학교엔 죄가 없다. 죄가 있다면 우리 안의 모순된 욕망에 있겠지.


대안학교가 지은 죄가 있다면 새로운 시도를 한 죄


그러나 대안학교엔 죄가 있다. 정말로 이우는 이우가 목표로 한만큼 학생들을 성장시켰는가? 과연 이런 질문에 이우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나? “원한다면 대학교를 나오지 않고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었는가?” “이 전도가 불투명한 사회에 나가 졸업생들이 겁에 질리지 않고, 무언가를 실패(시도)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었는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사회적 약자를 공감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었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설립자인 부모님께 여쭤 봐도 명확한 답을 듣지 못했다. 아이들이 일반학교를 나온 것보다는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과 기획능력, 친구들과 소통하고 협력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 능력, 도전 정신이 길러진 것은 맞으나 아이들마다 성취 수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3~6년의 과정을 통해 잘 성장했다고 보기 어려운 아이들도 더러 있다고 한다.

비단 이우만이 아니다.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모든 학교들은, 정말 그 새로운 시도를 의미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렸는가? 그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아니, 아닐 것이다. 아마 다른 대안학교를 졸업하는 많은 학생들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하여 이도 저도 아닌 듯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실험실의 모르모트가 된 것만 같아 학교를 탓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런 새로운 시도를 하는 학교들의 죄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의해 금단의 열매를 따 먹어 아담의 후손들인 우리가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듯이.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학교들은, 그 시도가 언제나 성공과 실패 사이 그 어딘가에 있기에 학생들에게 의도하지 않은 죄를 짓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들이 못나서가 아니다. 그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에 완벽할 수가 없는 것일 뿐이다. 나아가 인간이기에 불완전한 것이기도.

아담과 이브.png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inno04&logNo=221547113892


그래서 요즘은 비단 학교만이 아니라 모든 새로운 교육을 하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새로운 교육을 하지 않을 것인가? 아니, 나는 새로운 교육을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선생님들은 이런 말씀을 곧잘 하신다.


“네가 하는 그 새로운 시도가 네 생각처럼 잘되지 않아서 아이들이 좌절하거나, 애매한 상태에 머물게 되면 어쩔래?”


맞다. 그런 경우는 필시 나올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은 언제나 성공보다는 실패에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던 대로, 안전해 보이는 선택을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작금의 대한민국이란 구조에서 이루어지는 소수의 상위 학습자들만을 위한 교육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무력감에 빠진 채 사회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투영하며 살아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성장의 측면에서 안주란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니까.


새로운 시도는 아이들을 실험실의 모르모트로 삼는 것과 같다?


그러면 선생님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신다.


“그렇게 새로운 시도를 하다가 정말 실패하게 되어 잘못된 실험체처럼 남겨진 아이들을 보는 것도 괜찮아? 그 아이들이 너의 교육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 꼴이 되잖니? 성장을 100% 확신할 수 없음에도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교육을 아이들한테 강요하는 게 교육적으로 옳은 일일까?”


맞다. 실험체처럼 남겨진 아이들을 보는 건 결코 괜찮지 않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싫다. 어떤 교육을 강요하기도 싫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이들의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수업은 필연적으로 아이들이 꽤나 많은 노력을 해야만 한다. 아이들은 이전보다 많은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동안 관성에 의해 처음에는 저항한다. 그러면 나는 그런 아이들을 ‘억지로’ 끌고 가야 한다. 진실로 아이들이 이를 통해 성장할 것이라 믿으며 거짓말을 해야 한다. “애들아, 이거 하면 너희 정말 변화할 수 있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어.” 이런 거짓말. 하지만 그렇게 수업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과정에서 성장한 아이들도 있겠지만, 성장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아이들도 있다.

2019년에 책도 읽지 않고, 글쓰기를 싫어하는 취약계층 친구들에게 글쓰기 수업을 했다. 2주차 수업부터 아이들은 믿기 힘들 정도로 솔직한 심정들을 글로 쓰고, 발표했다. ‘나는 나쁜 아이다’란 주제로 내가 얼마나 이기적으로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가면을 쓴 채로 행동했는지를 이야기했고, ‘내게 있어, 울고 싶은 순간은 많았다’란 주제에서는 울고 싶었던 순간마다 웃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불행한 가정사와 체험들을 이야기해줬다. 나도, 아이들도 서로가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했던 독해 수업에서 아이들은 도망치려 했고, 실제로 점차 수업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서로가 실패를 직감한 수업이었다. 두 수업 모두 잘 될 거라 생각했는데, 하나는 잘 됐고 하나는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실험체가 되어 수업의 효과를 체험했다. 마치 실험실의 생쥐처럼. 12명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11명이 된 것이 그런 가슴 아픈 진실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그런데도 나는 그런 수업을 끊임없이 시도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변화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변화의 가능성이 사라지니까.

여기까지 말씀하시면 선생님들은 매우 불편해하시면서 이런 의문을 제기하신다.


“그럼, 너는 과학자가 되겠다는 거니? 아이들을 실험실의 생쥐나 모르모트처럼 다루겠다는 거니? 그게 정말 인간적인 거니? 교사가 그래도 되는 거니? 비윤리적이지 않니?”


그래, 맞다. 비윤리적일지도, 어쩌면 아이들을 실험실의 모르모트처럼 다루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을 위한 노력을 할 수가 없고, 나 역시 겁에 질려 대한민국이란 구조에 순응해야만 하는데... 하여 나는 윤리적이지도, 인간적이지도 못한 과학자와 같은 교사가 되기로 했다.

죄를 지어야만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죄를 짓기로 결심했다.


(지역아동센터 선생님들 대상 교육 연수를 진행한 경험으로 이 글을 작성했습니다.)

이전 04화마음 편히 거짓말을 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