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여움과 슬픔도 가족의 힘으로 견디며
분주한 아침 출근 시간.
빠른 손놀림으로 얼굴을 두드리다가 혀에 닿는 이물감에 멈칫했다. 나도 모르게 거울앞에서 입을 벌렸다. 혀 아래 무언가 빨갛게 올라와 있었다. ‘이게 뭐지?’ 중얼거리며 내 짝꿍 H에게 보여줬다. 오늘 당장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4시에 조퇴를 했다.
이비인후과에 접수했다. 의사는 장갑을 낀 손으로 내 입속의 종기를 꾹꾹 눌러봤다. 입안에 난 것이 말랑하지 않고 딱딱하다고 했다
“미루지 말고 이번 주 중으로 대학병원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의뢰서 써 드리겠습니다.”
콜센터에 당일 예약을 했다. 종기 발견 다음날 우여곡절 끝에 단국대학병원에 예약했다. 나는 ‘당진시 운전면허’다. 혼자서 장거리 운전을 한 적이 없다. 내비게이션을 보며 주행한 경험이 전혀 없다. 갑작스러운 병원행으로 내 짝꿍 H는 시간을 낼 수가 없다. 당일 예약이 아니면 2주 후에나 진료를 받아야 했다. 대학생 딸과 동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딸은 면허는 있지만 시내 주행만 조금 했을 뿐이다. 내비게이션을 찍고 가다 보니 고속도로다. ‘신랑이 천안 갈 때는 고속도로로 안 간 거 같은데.’ 불안함이 들 때쯤 내 짝꿍 H에게 전화가 왔다.
“왜 고속도로를 탔어?”
“아니 내비가 가라는 데로 간 거지!”
“알았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천천히 진짜 천천히 가야 돼. 거기 큰 차들이 많을 거야.”
“맞아 왜 이렇게 큰 차들이 많아? 무서워.”
“진료 보고 돌아올 때는 국도로 와! 알았지? 무료 도로 있어. 내비에!”
“아빠, 저도 있으니까요. 걱정 말고요 도착해서 전화할게요.”
우리는 3차선으로 100km 정도 유지하면서 달렸다. 내 차 앞에 25t 트럭이 80km로 갔다. 답답해서 차선을 변경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나의 긴장된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의 구름은 뭉게뭉게 너무 이뻤다. 비록 운전을 대신해 주지 못하지만, 옆에 딸이 있는 자체가 큰 힘이 됐다.
단국대학병원 주차타워에 무사히 도착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딸아,고생했다.”
수납하고 이비인후과 진료실에 대기하고 있으니 이제야 내가 환자로 왔음을 알았다.
교수님은 마스크를 쓰고 초록색 수술 가운을 입고 있었다. 입안에 난 종기를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같은 방향인 왼쪽 림프샘을 초음파로 몇 번 보면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자, 오늘 입안에 종기하고 림프샘하고 조직검사 할 거예요. 나가셔서 설명 듣고 동의서 작성할게요.”
나는 쫓겨나듯 진료실에서 나왔다. 한참 기다렸더니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입안에 종기는 표면마취제를 하고 살점을 떼어낸다는 느낌으로 할거예요.”
림프샘은 마취 없이 주사로 세 번 조직을 채취할 거라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20분쯤 기다리니 간호사가 짜 먹는 마취제를 들이밀며 절대 삼키지 말고 입안에 머금고 있으라고 했다.
‘금방 나를 부르겠지!’ 생각했지만 진료실에 환자가 5명이 들어가도록 부르지 않았다. 체감상 30분 정도 있으니, 간호사가 종이컵을 가지고 와서 뱉으라고 했다. ‘아 안 삼켰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앉자마자 교수님은 말했다.
“ 어린애들도 하는 거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요,”
내 목에 주삿바늘을 찔렀다. 림프샘 조직을 떼기 위해 조이고 비틀면서 당기기도 했다. 소리라도 지르면 금방이라도 피가 샘솟을 것 같아서 신음을 꾹꾹 삼켰다. 의사는 두 번 더 내 목을 겨냥했다. 교수님이 서 있는 상태에서 내 목을 향해 돌진하는 그 자체가 공포스러웠다. 몇 걸음 떨어진 채 딸이 나를 보고 있다.
이번엔 입안에 있는 종기를 교수는 ‘이 정도쯤이야.’ 외치듯 절도있게 떼어냈다. 마취가 돼서 따끔한 정도였다. 아이스크림 막대 같은 것에 거즈를 돌돌 말아 지혈제라면서 꽉 물고 있으라고 했다. 피와 약 냄새가 섞여 비위가 상했다. 15분이 1시간 같았다. 간호사가 뱉으라고 했다. 입안을 들여 다 보고 아직 지혈이 덜 됐다면서 다시 막대기를 들이댔다.
조직검사가 끝나고도 피검사, 심전도, 소변, X-ray 검사까지 했다. 일주일 후 CT도 예약도 했다.
다시 당진으로 가야 한다. 딸과 함께 국도로 가자고 했다. 얼마 가지 않아 우리 차 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내비게이션에는 분명 직진으로 되어있는데 직진 차도는 한두 개가 아니다. 어디로 가라는 것인가? 게다가 퇴근 시간까지 겹쳤다. 귀향길을 보는 듯했다.
6차선에서 갑자기 우회전을해야 하는 상황을 알아차린 우린 아직 3차선.
그대로 직전 한후 유턴을 해서 다시 돌아오는 걸 반복했다. 목을 겨냥한 주삿바늘보다 더 공포스러웠다.
“네 아빠는 대체 왜 국도로 가라고 한 거야? 하은아, 오른쪽 차선이야? 계속 직진하면 돼?”
“엄마 저도 오늘 내비게이션 처음 보는 거에요! 아!!”
뒤에 있는 차는 빵빵거리고 오른쪽 깜빡이를 켰지만 차량 몇 대는 본체만체 갔다. 배려의 신이 나타났다. 비상등을 누르며 인사를 꾸벅꾸벅한 후 겨우 빠져나갔다.
복잡한 천안 시내를 빠져 나오니 이제야 평정심을 찾았다. 옆에 앉은 딸도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부은 듯 지쳐 보였다
.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 4:11~12)
일주일 후 CT검사를 위해 조퇴했다. 내 짝꿍 H와 동행했다. 몸컨디션이 좋지 않은 데다 금식까지 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천안까지는 내가 운전하겠다고 했다. ‘언젠가 내 짝꿍 H도 갑작스럽게 병원 갈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이번엔 국도로 가보기로 했다. 내비게이션 상단에 좌회전 시 몇 km에서 할 예정인지가 표시되어있다고 했다. 우측으로 빠져나갈 때도 어느 도로로 가야 할지 색상으로 표시가 된다고 한다.
아산 IC로 빠져 나갈 때쯤 내 짝꿍 H는 현장 전화를 받았다. 나는 금방 당황했다. 내비게이션을 보고 있음에도 어디로 갈지 몰라 갈림길에 거의 섰다. 내 짝꿍 H는 괜한 작업자에게 볼륨을 높였다.
“내비게이션이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는데도 왜 망설이는 거야?!”
전화를 끊고 나서 답답하듯 따졌다. 나는 혼자 장거리 운전을 할 수 없는 걸까?
서둘러 우측 등을 켜고 애원하듯 뒤에 오는 차를 바라봤다. 25톤 트럭이 클랙슨을 울려대며 지나갔다.
처음 장거리 운전에는 딸이 동행했다. 두 번째는 내 짝꿍 H가 함께 했다. 겁나고 두려웠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나 혼자였으면 절대 갈 수 없었을 것이다.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곳저곳 몸을 돌아볼 때가 생기고 있다. 조직검사를 하면서 받은 공포와 생애 최초 장거리 운전의 전쟁터에서도 살아남았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
[구의 증명]에서 함께 하면 분명 더 큰 불행이 올 거라는 구의 말에 담이가 고집스럽게 대꾸하는 말이다.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담이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희로애락에는 기쁨과 즐거움도 있지만 노여움과 슬픔도 있다. 이 모든 것을 끝까지 함께 하리라. 사랑하는 이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