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괜찮음, 행복함’이라는 가면
“돌이 되기 전, 두 번 정도 수술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수술하기엔 아이가 너무 작네요.
몸무게를 좀 더 키워서 하기로 하죠. 위험할 수도 있어서,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켜봐야겠지만, 아이가 또래보다 조금 느리게 자랄 것 같습니다.
지능이 떨어질 확률도 있고, 이런 문제, 저런 문제도 생길 수 있고요.”
내가 지금 한국에 있는 게 맞는 건가 싶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속싸개도 떼지 못한, 한 뼘도 안 되는 아이를 안고
대학병원 복도를 오가며 이해되지 않는 말들을 받아내기엔
내 몸도, 마음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이렇게 무능력한 사람이었나.
과연 신이 있기는 한 걸까?
“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 살았다고.
동화 속 해피엔딩의 주인공은 아니어도,
그냥 평범한 일상 정도는 살아낼 자격이 있지 않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렇게 새벽예배에 나갔다.
간절히 믿는 사람도 아니었으면서, 신에게 한 번은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제발 도와주세요”라는 기도라기보다는
“왜 하필 저인가요”라는 원망에 가까운 말들을 매일같이 쏟아내고 왔다.
그 와중에도 아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해맑고 사랑스럽게 자라났다.
나는 여느 엄마처럼
행복한 척, 괜찮은 척 아이의 성장을 사진으로, 글로 기록했다.
이 아이는 괜찮을 거라고.
다른 아이들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그냥 몇 달쯤, 조금 느린 것뿐이라고.
열두 달에 걷는 아이가
열아홉 달에 걸었을 뿐이라고.
그 일곱 달의 차이가 별일은 아니라고.
그렇게 나를 다독였다.
나는 그때
‘괜찮음, 행복함’이라는 가면을 쓴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