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못했던 이야기의 시작
나를 ‘예순의 백수’로 부르며 세 편의 글을 썼다.
하지만 정작, 내가 왜 백수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졌고, 내가 있었던 자리의 민감함을 피해 가고 싶었던 마음도 분명 있었다. 무엇보다, 그 시간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내 마음이 가장 컸을 것이다.
나의 해고는 전격적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준비하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해고는 늘 칼에 찔린 듯한 상처를 남긴다. 소득을 잃는다는 경제적 타격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나만의 속도로 설계해 왔던 시간의 궤도가 한순간에 부정되는 경험, 그로 인해 삶의 타임라인 자체가 붕괴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10여 년 전, 캐나다인 남편과의 결혼으로 캐나다에 정착했다.
90년대 후반 영국에서 3년을 보냈던 경험은, 여성으로서 외국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독하고 치열한 일인지를 이미 충분히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인생의 후반부에 또 다른 나라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냥 가볍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남편의 든든한 지지와 지원을 믿고, 캐나다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이민 정착의 경로로만 보면, 배우자 스폰서십은 가장 무난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낯선 땅에서 배우자의 지원만큼 든든한 울타리가 또 있을까. 하지만 오랜 시간 독립적으로 살아왔고, 쉰을 넘어서까지 미혼으로 지내왔던 나에게 ‘그 울타리 안에 머무는 삶’은 애초에 맞지 않았다. 아무리 안정적이라 해도, 내 성정은 늘 그 바깥을 향해 있었다.
캐나다에서 처음 시작한 일은, 내가 살던 미드타운에서 가까운 다운타운의 저소득층 노인 아파트에서 시니어들의 사회적 교류를 돕는 일이었다. 말벗이 되어 드리고, 소규모로 시사나 관심사를 나누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 시간을 통해 나는 ‘나이 듦’, 특히 치매와 알츠하이머로 대표되는 비정상적 노화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2017년, 노인학을 공부하기 위해 다시 학교에 들어갔고, 이후 토론토 곳곳에서 시니어와 관련된 일을 이어왔다. 치매 연구센터의 연구조교로, 또 중증 치매 환자들을 위한 음악·미술 치료를 담당하는 일까지. 이 일들은 결코 쉽지 않았고, 보수 또한 넉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노인들과 연결되는 경험은, 육체적·정신적 소진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 일의 전환점은 코로나 시기였다.
시설 안에서, 아무도 찾지 않는 고독 속에서 생을 마감하던 수많은 노인들의 얼굴을 나는 잊지 못한다. 동시에, 오랜 시간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사회학적 질문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결국 나는 석사과정을 시작했고, 공부와 일을 병행하며 노인 관련 현장을 더 넓게 경험해 나갔다.
석사를 마치고, 두 번째 박사과정 진학을 준비하던 중 한 제안을 받았다.
온타리오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실버타운을 설립하는 프로젝트였다. 총괄 책임자를 맡아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파이널 인터뷰까지 갔지만, 마음은 쉽게 정해지지 않았다. 거리, 조건, 그리고 무엇보다 ‘노인을 대상으로 한 영리 사업’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결국, 그 제안을 한 차례 거절했다.
그리고 곧바로 깊은 후회에 빠졌다. 다시 연락이 왔을 때, 나는 이것이 우연인지 운명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래, 한 번 부딪혀보자고.
설레는 마음으로 첫 출근을 했던 날,
이곳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은 이상하리만큼 선명했다.
그래도 내가 내가 당했던 방식으로 해고를 당하게 될 줄은 미처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