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손은 정말 하얗기만 할까
백수는 오랜 나의 로망이었다.
일할 의무로부터의 자유.
일이 즐겁지 않음에도 생계를 위해 강제된 생산성에 복무해야 하는 삶으로부터의 해방.
어쩌면 그것은 나만의 로망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은밀한 꿈일지도 모른다.
한국 산업화 세대를 살아낸 근면 성실의 DNA를 가진 부모님을 보며 자란 나에게, 그분들의 노고로운 삶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은 분명했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한가롭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묘한 부채감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생산성을 내려놓고 싶으면서도, 그 내려놓음을 완전히 승인하지 못하는 마음.
나는 오래 그 양가감정 속에 머물러 있었다.
내게 백수와 관련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솝우화 「개미와 베짱이」의 베짱이였다.
먹고 마시며 노래만 부르다가, 겨울이 오자 먹을 것도 집도 없이 개미에게 문을 두드리는 존재.
어린 시절 그 이야기는 강력한 교훈이었다.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 동시에 ‘그래도 베짱이처럼 살고 싶다’는 은밀한 동경.
부러워하면서도 끝내 부러워할 수 없게 만드는 우화의 힘.
백수에 대한 나의 첫 감정은 어쩌면 그 양가감정에서 시작되었는 지도 모른다.
사실 ‘백수’라는 낙인은 단순한 상태 묘사가 아니라,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를 드러내는 언어다.
미셸 푸코가 말했듯, 권력은 사람을 금지하기보다 규범을 만들고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일하는 인간, 생산하는 인간,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는 인간이 ‘정상’으로 설정되는 순간, 그 바깥의 존재는 자동으로 결핍과 실패의 언어로 호출된다. 베짱이는 단순히 게으른 곤충이 아니라, 생산성 사회가 경고하기 위해 만들어낸 서사의 타자였다. 백수는 그래서 하나의 직업 상태가 아니라, 생산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체제 밖의 인간 형식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백수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는 늘 비슷하다.
빈둥빈둥, 건들건들, 얹혀사는, 1도 도움도 안 되는 꿀만 빠는 등등...
이 단어들은 생산성의 의무를 방기한 존재, 사회의 기생충과도 같은 상을 만들어낸다. ‘백수건달’이라는 표현이 그 이미지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강화해 왔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전적으로 ‘백수(白手)’는 직업이 없는 사람, 일정한 수입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반면 ‘백수(白壽)’는 ‘일백백(百)’에서 ‘한 일(一)’을 뺀 99세를 의미하고, ‘백수의 왕’처럼 ‘온갖’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백수’는 거의 언제나 경제적·사회적 무능의 상징으로 호출된다.
그런데 백수의 한자를 보면 ‘하얀 손’을 가진 사람이다.
하얀 손은 곱고 예쁜 손일 수도 있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아 때가 타지 않은 손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게으름의 극치를 “손도 까딱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한다.
손은 여전히 인간 노동의 본질을 상징하는 신체다.
인간은 손으로 도구를 사용하며 동물로부터 분리되었고, 손의 노동은 늘 귀한 노동으로 여겨져 왔다.
어느 유명한 드라마 대사처럼 “장인의 손으로 한 땀 한 땀 만든 ”이라는 표현,
음식의 ‘손맛’,
할머니의 ‘약손’이라는 말까지,
한국 문화는 유난히 손과 노동, 돌봄의 가치를 연결해 왔다.
그렇다면 일하지 않아 하얗기만 한 손은 어떤 의미였을까.
백수라는 말에 깃든 부정적 감정의 결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더 흥미로운 것은, 식민지 시절 다방에 모여 무위도식하던 지식인들을 민중이 ‘백수’라고 부르며 비꼬았다는 이야기다.
육체노동으로 삶을 버텨야 했던 민중의 눈에, 말만 많은 지식인의 하얀 손은 조롱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수란 손의 노동이 멈춘 상태일까.
그래서 백수를 ‘멈춤의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은퇴를 단순한 멈춤으로 볼 수 없듯, 백수의 시간 역시 단순한 정지 상태로 환원될 수 없다.
영어 retirement는 ‘withdrawal(물러남)’의 의미가 강하지만,
스페인어 jubilación은 라틴어 jubilare-“기쁨을 외치다”에서 왔다.
모든 은퇴자와 모든 백수가 기쁨을 외칠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은퇴가 보상의 시간으로만 존재하지 않듯, 백수 역시 낭만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의 ‘취준생’, ‘청년 실업’이라는 말,
캐나다의 대규모 layoff 소식들.
백수는 구조적 현실이자 개인의 생존 문제다.
백수의 시간은 철학적 사유이기 이전에 경제적 조건이다.
내가 실제로 백수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월급이 아니라 시간의 규칙이었다.
요일의 의미가 흐려졌고, 아침과 저녁의 경계가 느슨해졌다.
대신 질문이 늘어났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니, 무엇을 하지 않고 있는가.
백수의 시간은 자유이면서 동시에 심문이었다.
“너는 지금 무엇을 생산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손은 멈췄지만,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걸으며, 읽으며, 기록하며, 관계를 되짚으며,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사고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노동이, 그러나 가장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백수를 단순한 무위(無爲)의 상태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백수는 멈춤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노동 상태다.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노동,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노동,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인 노동.
손이 멈춘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사용하고 있었다.
모든 은퇴자와 모든 백수가 jubilare를 외칠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아직 그렇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이 시간을
퇴장이 아니라 재점화로,
나는 비록 fired 됐으나 refire의 시간으로 재정립하고 싶다.
백수의 손은 하얗다.
그러나 그 손은 비어 있지 않다.
그 손은 지금,
분명 다른 방식으로 불을 붙이고 있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