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 동료들과 점심식사 후 카페에서 오붓하게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휴대전화 벨이 울린다. 예전에 같이 근무한 적이 있는 낯익은 그녀의 이름이다. 옆 면소재지에서 수업을 마치고 마침 사무실 근처를 지나는데 내 생각이 났다며 위치를 묻는다. 마침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라 이내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발걸음을 서두른다. 반갑게 그녀를 만나 20여분 정도 짧은 대화를 나눈다. 배우는 것을 좋아해 꾸준히 공부를 즐겨하는 부지런한 그녀와는 도서관이나 각종 문화행사에서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곤 했다. 그동안 제대로 만나 밥 한번 먹은 적도 없지만 그녀는 일 년에 두어 번 정도 읽고 좋았던 책을 직접 선물로 건네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매번 받기만 하는 것이 미안하던 터였는데 오늘도 대화가 끝날 무렵 갑작스레 줄 것이 없다며 에코백을 뒤적이더니 법정스님의 미공개 강연록이 실린 두툼한 책 한 권을 내민다. 내용이 좋아 시간 날 때마다 꺼내 읽는 중이었고 아직 반정도 덜 읽었단다. 미쳐 다 읽지도 못한 책을 나에게 주면 어쩌냐는 말에 본인은 다시 구매해서 읽겠다며 서둘러 사무실을 나선다.
그녀와는 10여 년 전 함께 근무한 것이 첫 인연이다. 이후로는 가끔 행사장에서 만나기도 했고 업무와 연관된 덕분에 가끔 마주친 정도인데 그녀가 기억하는 나는 그녀 말에 의하면 '좋은 사람'이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각인시켰는지는 아마도 그녀만이 알겠지만 함께 근무하는 동안 얼굴 붉힐 일이나 불편했던 일은 없었던 덕분인 듯하다. 이유야 어쨌든 다만 내 입장에서는 누군가가 나를 편안하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음이 다행스럽고 고마울 뿐이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동안 최근 그녀가 거주하는 아파트에서 겪었던 황당한 일을 털어놓으며 손바닥 뒤집듯 언행이 다른 이들의 행동에 분개해 목소리가 높아진다. 비합리적인 상황들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그녀의 말에 나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 또한 살면서 어려운 일중의 하나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들과의 만남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 나이에 비해 순진하다는 말도 듣는다. 이 말이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좋은 뜻인 것 같지만 사회생활에서는 좀 모자란 구석이 있다는 의미가 더 크다. 주된 이유는 사람을 잘 믿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겉으로 보이는 대로 그 사람의 본모습이라고 여긴다. 얼굴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며 본인은 전혀 몰랐던 일이라거나 일말의 관심조차 두지 않았는데 이렇게 좋은 일이 생겼다거나 하는 말들을 그대로 믿는다. 그 말을 그대로 전하기라도 하면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너 바보야?" 또는"넌 그 말을 믿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마음을 감추는 일 데도 서툴다. 누군가 정보를 캐내고 싶거나 떠보고 싶어 물으면 내숭을 떨거나 숨기는 일도 허술하다. 이미 허공으로 흩어진 단어들을 바라보며 후회하는 순간은 이미 떠나버린 기차다. 그로 인해 최악의 경우 뒤통수를 맞기도 하는데 그때도 상대방을 원망하기보다 나 자신을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 분명 내가 본 그 사람은 나쁘지 않았는데 뭐가 잘못된 것일까 그 저의를 궁금해하며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요즘 들어 자꾸 나를 돌아보게 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대로 살고 있는지 자꾸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다. 사주팔자를 말해주던 그분 말씀대로 뭐 하나 공짜로 쉽게 얻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처음 직장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잘 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세상은 늘 조금은 달랐다. 제자리에서 묵묵히 일만 하는 사람은 늘 동기들보다 뒤처졌고 간혹 패배자라는 말을 듣는다. 승진은 하려고 하는 사람이 한다고 했던가. 누가 봐도 무리수를 두는 과한 욕심을 부리는 이들이 경력이나 능력에 관계없이 선두를 탈환하는 예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반면에 소위 뼈를 갈아 넣을 만큼 힘들게 일을 하면서 어렵사리 그 자리를 얻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배려하고 저렇게 양보하고 오지랖 넓게 여기저기 책임을 떠맡는 것들이 과연 잘하는 것일까. 경우에 맞지 않으면 좌고우면 하지 않고 몸이 힘들어도 내 고집대로 나를 혹사하며 살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을까. 그냥 대충 남이 차린 상에 숟가락만 올리면서도 다 내가 한 공이라고 여기며 조금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 잘 사는 것은 아닌지 자괴감도 든다. 여러가지 크고 작은 이유로 최근 들어 책 한 줄 제대로 읽지 못하고 하고 싶다고 노래 부르는 일 또한 늘 뒤로 밀리는 일상의 연속이다. 이러다 평생 피곤하게 누군가의 설거지만 하면서 실익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염려가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어쩌면 좋은 사람병에 걸려 나를 괴롭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늘 피곤함에 찌들고 나를 위한 삶보다는 타인을 위한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며 살고 있는지도.
그런 내 맘을 미리 알았다는 듯 신기하게 오늘 그녀가 건네고 간 법정스님의 도서명이 <진짜 나를 찾아라>이다. "산을 건성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산은 그저 산일뿐이다. 그러나 마음을 활짝 열고 산을 진정으로 바라보면 우리 자신도 산이 된다. 나 자신 '진짜 나'가 되어야 진정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 책 뒤표지에 적혀있는 길지 않은 글귀가 나에게 건네는 법정스님의 죽비처럼 여겨져 가슴이 알싸해진다. 나는 정말 좋은 사람일까, 진짜 나는 누구일까 사뭇 궁금해지는 가을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