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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Nov 07. 2024

꽃을 주는 남자

시월의 마지막 날

이용의 잊힌 계절이 떠오르는 시월의 마지막 날 아침, 급히 제출할 자료 검토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통화 가능 할까요'라는 문자가 도착한다. 얼마 전까지 월간지 '시인'을 매월 선물해 주던 지인이다. 통화한 지도 꽤 되어서 반가운 마음에 얼른 전화를 걸었더니 오늘이 시월 마지막 날인데 공연이 있느냐고 묻는다. 10여 년 넘게 활동하는 단체에서는 매년 10월 31일 시와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공연을 개최하고 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꼭 함께하는 고정팬이기도 하다. 언젠가 이런데 올 때는 꽃다발을 들고 오는 것이라며 농담 반 진담 반 건넨 이후로 그는 잊지 않고 꽃다발을 챙겨주곤 했다. 원체 쑥스러움이 많은 탓에 행사장에서 주지 못하고 공연 전에 미리 전달하는 것이 그만의 스타일이다. 이번에는 사무실 일정으로 공연에 참여하지 못하고 대신 업무와 관련된 다른 행사에  참여한다고 전하니 이내 시간과 장소를 묻고 전화를 끊는다.


오전 시간 예정된 발대식 행사에 참석 중인데 그의 전화가 또 걸려온다. 곧 연락드리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문자가 도착한다. 행사에 함께하지 못한다며 꽃다발을 사무실에 맡겨두었다는 내용이다. 오전 시간이니 사무실에 있을 것이라 여기고 연락 없이 꽃을 건네주러 갔다가 허탕을 친 상황이다. 굳이 꽃까지 챙겨 줄 행사도 아닌데 배려하고 챙기는 마음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행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오니 책상 위에 붉은 장미와 소국 한 다발이 환한 미소로 반겨준다. 이내 인증숏을 찍어 그에게 보내주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곁에서 지켜본 동료가 엄청 찐 팬이 분명한 것 같다고 한마디 거든다. 꽃 한다 발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타임이다. 60대 중반 희끗한 머리의 중년 남자가 화원에서 꽃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모습, 이쁘게 포장된 꽃다발을 들고 걸어오는 모습을 상상하는데 절로 웃음이 나온다. 평소 만날 때마다 띠동갑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물 없이 대해주는 것이 고맙다고 말하던 그다. 하루도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허전해할 정도로 애주가이기도 하지만 책을 사랑하는 문학중년이다. 아마도 그 덕분에 간헐적인 만남이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는 것일 게다. 몇 달 동안 주말까지 매주 쉼 없이 이어지는 일정에 마음마저 가을 낙엽처럼 퍼석거리는 즈음이었는데 정성 담긴 꽃다발 하나에 마음이 금세 촉촉해진다.


밤 10시가 넘어 사무실 행사를 마치고 꽃을 들고 집으로 향하는데 발걸음이 가볍다. 밤공기를 가득 채우는 꽃향기 덕분이다. 신발을 벗자마자 꽃에 얽힌 스토리를 가족들에게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풀어내고 화병을 준비한다. 며칠 지나지 않아 꽃은 시들어 버리겠지만 매년 잊지 않고 꽃을 안겨주는 누군가의 온기 가득한 마음은 오래도록 다정한 잔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소국 향기가 진하게 집안을 가득 채우는 가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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