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인가 했는데 벌써 한여름 기온으로 무더위를 선물해 주는 5월 중순. 갑자기 더워진 날씨 탓인지 남편이 시스템 에어컨 리모컨의 출처를 묻는다. 짐 정리를 하면서 어딘가 잘 챙겨놨을 텐데 기억은 가뭇가뭇하다. 거실 쪽 수납장 여러 곳을 열어봐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지청구를 하던 남편이 주방용품이 들어있는 수납장 칸에서 리모컨 박스 다섯 개와 낯선 탭 하나를 찾아낸다. 요즘 이런 상황은 특별한 일도 아니다. 집안 곳곳을 정리한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고 내 기억력은 하루하루 얇아지고 있으니 말이다.
18년 만에 고민 끝에 이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삐걱거리며 아우성치는 집구석구석의 민원을 최대한 반영해 이뤄진 어려운 결정이었다. 아니 더 결정적인 이유는 지금 이사하지 않으면 평생 구축 아파트에서 살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이사 날짜는 입주기간 중 최대한 늦은 날로 정했다. 살고 있는 아파트 매매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 이사 계획을 할 때 전혀 생각하지 못한 복병이었다. 공인중개사무소에 매물로 등록만 되면 바로 매매가 될 것이라고 여긴 것이 부동산 흐름을 읽지 못한 오판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입주 마감일 1주일을 남겨두고 우리 가족은 새 집으로 이사했다.
군데군데 작은 하자들이 지속적으로 발견되었지만 새 집에 대한 식구들의 만족도가 꽤 높았다. 기존 집은 서향이었던 반면 날이 밝으면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남향이었고 종전 집은 낮은 야산뷰였지만 이곳은 하천이 내다보였다. 대로에 접해있지 않은 덕분에 소음도 없어 조용했다. 평수는 별 차이가 없었지만 짐을 줄이려고 노력한 덕분에 평수 대비 더 넓어 보였고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복도식으로 되어있는 구조 덕분인지 거실 또한 널찍했다. 반면에 적응을 위해서는 학습을 필요로 했다. 습득해야 할 새로운 기능들이 여러 가지였기 때문이다. 딸은 일단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고도 집에 들어올 수 있도록 현관문 지문 등록을 해주었다. 물론 가끔 오류가 날 때도 있지만 덕분에 열쇠나 번호가 없이 간편하게 출입이 가능해졌다. 다양한 옵션들 덕분에 거주 환경도 좀 더 쾌적해졌다. 예를 들자면 화장실은 환기는 물론 건조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어 쾌적함을 더했다. 공기청정시스템으로 실내 공기 또한 청청해졌고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방마다 설치된 시스템에어컨 덕분에 공간활용도도 높아졌다.
새로운 기기에 대한 적응과 아울러 일상에도 변화가 생겼다. 첫 번째는 집안 청소다. 종전에 주로 사용하던 무선청소기가 하던 일들을 로봇청소기가 전담하게 된 것이다. 청소기는 홈쇼핑을 보다가 출시기념 30만 원 할인이라는 문구에 혹해서 거의 100만 원을 주고 구입한 물건이다. 전에도 두어 번 중소기업 제품을 구입한 경험이 있는터라 이번에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것이 제법 살림꾼이었다. 일단 청소용 걸레를 탈부착하거나 빨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었다. 물론 직접 걸레질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인공지능 패턴이 입력되어 있어 작동 버튼만 눌러주면 알아서 척척 30여 평 넘는 집 청소를 거뜬히 책임져주었다. 두 번째는 산책패턴이다. 일단 집 앞 하천 주변을 반복해서 걷기도 하지만 새로 찾아낸 코스는 시장 방면이다. 아파트에서 10여분 걸으면 도착하는 전통시장을 어슬렁거리거나 평소 필요했던 티셔츠나 집안 곳곳에 필요한 작은 생활용품을 사는 습관이 생겼다. 산책도 하고 쇼핑도 하는 덕분에 씀씀이는 이전보다 헤퍼졌지만 말이다. 동네가 달라지고 지하주차장을 주로 이용하면서 주거래 마트도 바뀌었다. 집 앞에 있던 작은 마트가 아닌 식자재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대형마트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지하주차장을 자주 이용하면서 주문하면 다음날 지정된 시간에 배송해 주는 온라인 배송을 애용한다. 이 아파트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주차공간이다.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에 귀가해도 주차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뿐더러 주차면 공간이 넓어 나 같은 영원한 주차초보에게는 그만이다. 새 집 적응 제일 마지막 관문은 공동현관 출입등록이었다. 번거로움을 예상했지만 얼굴 등록으로 그것 또한 깔끔하게 해결했다. 매일 낯선 화면을 통해 내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 여전히 어색하지만 말이다.
아이들과 남편의 적극적인 도움 덕분에 외적인 환경에 대한 적응을 포함해 일상도 이제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다. 나 또한 꼭 해야 하는 일, 알아야 하는 것들만 습득하는 것으로 최소화해 일단 새집에 대한 적응을 일단 마무리했다. 나보다 두어 달 먼저 입주한 직장 동기는 나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새 집에 적응했다고 말했다. 일단 익스프레스 이모가 정리해 준 물건 위치를 내 기준으로 다시 정리하느라 에너지를 소비한 나와 달리 이모가 정리해 준 대로 위치를 외우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이런 방법도 있었구나 무릎을 쳤지만 그건 내 성격상 맞지 않으니 패스. 동기는 결국 이사한 지 세 달이 다 되도록 정리를 못한 드레스룸은 정리의 달인에게 맡겨 해결할 까 고민 중이란다. 물론 난 어설픈 정리솜씨로 며칠을 허비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그 말에 적극 찬성표를 던졌다.
모든 일이나 환경에는 적응기간이 필요하다.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겁을 내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커진다는 것이다. 알고 보면 아주 사소한 것들인데 괜히 움츠려드는 순간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꾸 누군가에게 의지하게 되고 어느 순간 소심해지고 더 심해지면 아이들의 반복되는 잔소리를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다. 사실 알고 보면 아주 사소한 관문이라서, 겨우 이거였어하는 경우도 많은데 왜 그리 위축되는지 모를 일이다. 바야흐로 100세를 넘어 120세를 바라보는 시대가 도래했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세월은 흐르고, 새로운 환경을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나이 들어가기를 바라지만 눈앞의 일도 장담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니 일단 노력을 해보는 수밖에 달리 방법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당분간은 다시 새 집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일을 없을 듯 하지만 나이를 핑계로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주저하는 일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아직 나는 100세를 기준으로 간신히 절반을 살아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