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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가 없다

추석 집밥 단상

by 정은숙


추석연휴 첫날, 아파트 근처 식자재마트에 들러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식재료를 구입한다. 주요 품목은 부추, 무, 매운 갈비양념, 팽이버섯, 브로콜리, 파프리카, 상추, 등갈비 한팩과 컵라면.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점심 식사 준비를 시작한다. 야채를 씻어 물기를 빼고 양념 소 불고기는 프라이팬에 담아 익힌다. 냉동실에 있는 육전 재료를 꺼낸 후 달걀을 풀고 쌀 부침가루도 접시에 덜어 둔다. 오늘 점심 메뉴는 소고기 육전과 부추무침 그리고 불고기. 육전을 부치는 동안 압력솥에서는 하얀 쌀밥 내음이 주방을 가득 채운다. 생표고버섯은 데쳐서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그릇에 담고 모처럼 빨강, 노랑 파프리카도 잘라서 식탁에 올린다.


창밖은 비가 내리는지 어슴푸레하고 식탁에 자리 잡은 유리컵에는 분홍색 장미와 이름 모를 꽃 서너 송이가 조명을 받으며 새침한 표정으로 서있다. 달달한 밥냄새가 퍼지기 시작할 무렵 육전의 느끼함을 잡아줄 부추를 무친다. 보통은 파채를 곁들여 먹지만 내가 파를 좋아하지 않으니 대체음식이다. 미리 익혀둔 불고기에는 팽이버섯을 얹은 후 다시 인덕션 전원을 켠다. 적당하게 맛이 든 배추김치도 조금 썰어 접시에 담고 물기를 뺀 상추와 깻잎, 데친 표고버섯을 찍어먹을 초고추장, 식사의 느끼함을 덜어줄 낙지젓갈까지 식탁에 세팅한다.


시어머니 병문안을 갔던 가족들이 드디어 도착해 하나 둘 거실로 들어온다. 아침을 거른 탓에 배가 고팠는지 주방을 두리번거린다. 이제 음식 준비는 다 되었으니 갓 지은 밥만 공기에 푸면 준비 완료. 남편과 아이들, 모처럼 함께 한 시누이와 조카까지 젓가락을 들고 본격적인 식사를 시작한다. 육전에 부추무침을 얹고 취향에 따라 명란젓갈을 함께 먹는다. 식사가 무르익을 즈음 아들이 비빔면을 준비한다. 애초에 육전과 함께 먹으려고 마트에서 사 왔다고 한다. 맛깔스럽게 비벼준 비빔면에는 얼음이 사각대는 시원한 냉면육수를 부어준다. 고기를 먹으면서 느끼했던 입맛을 깔끔하게 잡아주는 메뉴라는 설명이다. 예상대로 가족들의 젓가락이 연달아 면이 담긴 그릇으로 향한다. 배부르다는 말을 연발하던 가족들이 식사를 마친 후 딸이 후식으로 커피를 준비한다. 쌉싸름한 진한 커피 향이 진동할 무렵 간식 창고에 있던 쿠키를 꺼내 같이 곁들인다. 배부르다고 말하면서 연신 쿠키를 먹는 가족들의 얼굴에 포만감과 편안함이 묻어난다.


주말에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평일은 바쁘다는 핑계로 집밥을 먹는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다. 아침은 사과와 계란, 견과류와 요구르트로 대체하고 점심은 사무실에서 해결하고 저녁마저 약속이 있는 날이 이어지니 불가피한 일이다. 그나마 주말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배달음식이 더 익숙해졌다. 본격적인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다. 냉장고에는 주부의 손길을 기다리는 생선과 고기 그리고 야채들이 줄을 서 있으니 모르쇠 할 수 없는 상황. 아마도 연휴 내내 나는 모처럼 불량주부 타이틀을 내려놓고 밥 잘하는 아내와 엄마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들 말대로 연휴에 더 요리를 많이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음식을 준비하는 한 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 다리가 아프고 피곤함이 몰려오겠지만 엄마표 음식을 맛있게 먹는 가족들의 칭찬과 뿌듯한 표정 덕분에 아마도 나를 포함한 많은 주부들이 요리를 하는 건 아닐까.


여느 때 보다 길고 긴 연휴. 매년 이 기간 동안 명절 증후군과 스트레스 때문에 이혼율이 높아지고 가족 간 싸움도 많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자못 마음이 씁쓸해진다. 작은 두레상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반찬이 몇 가지 없고 음식이 넉넉하지 않아도 웃음소리가 피어나던 시절. 모기를 쫓기 위해 마당에는 모깃불을 피우고 어느새 까만 하늘에서는 별들이 종알거리는 소리가 당연하던 그때도 그랬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객지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 몇 주일 만에 집에 내려올 때마다 엄마는 백년손님이라도 온 듯 늘 푸짐한 집밥을 해주시곤 했다. 딸이 평소 좋아하는 잡채, 치킨, 짜장면.... 세세하게 음식 종류가 다 기억나진 않지만 엄마의 따사로운 정성 가득한 집밥을 먹고 나면 금세 배가 불렀다. 포만감을 가득 안고 밀려오는 노곤함에 못 이겨 긴 낮잠을 한숨 자고 나면 지치고 버석거렸던 몸과 마음이 든든해지고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추석 연휴 오일째 되는 날, 오늘 집밥 점심메뉴는 매콤한 등갈비찜으로 정했다. 사다 둔지 며칠이 지나서 빨리 먹어야 한다는 딸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한 결정이다. 가족들이 돌아올 시간을 맞춰 잡곡과 쌀을 섞어 밥을 안치고 등갈비찜 요리를 시작한다. 핏물을 빼기 위해 찬물에 담갔던 갈비를 먼저 익힌 후 매콤한 소스로 양념을 하고 배를 갈아 넣는다. 양념이 잘 배이고 뼈가 쏙쏙 빠지는 마무리 즈음에는 치즈떡볶이 대신 가래떡을 잘라 넣고 매콤함을 덜어 줄 모차렐라 치즈 두 봉지를 얹으면 요리 완료. 오늘도 어김없이 시어머니 병문안을 다녀온 가족들이 하나 둘 집으로 들어선다. 배고프다며 서둘러 식탁에 둘러앉는 그들의 입에서 행복한 감탄사가 연신 터져 나온다. 배가 고픈 건지 음식이 맛있는 건지 모르지만 아무튼 오늘도 집밥 대성공! 그럼에도 살짝 가사노동의 피곤함이 몰려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역시 난 현모양처 주부 체질은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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