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 단상
햇살 좋은 날, 점심을 먹고 느지막이 그녀들과 함께 집을 나선다. 그녀가 챙긴 작은 가방에는 그를 위한 과일과 소주 한 병, 전지용 가위 한 개가 들어있을 것이다. 행선지는 집에서 차로 40여분 정도 걸린다. 도로가 한적해서 보통 차는 밀리지 않는다. 명절에는 가끔 차가 밀리기도 하지만 참을 수 있는 정도다. 30여분 정도 국도를 달리다가 포장된 좁은 농로를 따라가다가 산 입구가 보이는 즈음에 주차하고 2분 정도 걷는다. 먼 거리는 아니지만 살짝 가파른 구간이 있어 운동화를 신는 것이 좋다. 그곳 주변에는 유난히 밤나무가 많다. 덕분에 여름 무렵에는 밤꽃 내음이 코를 찌른다. 가을에는 산길 곳곳마다 잘 여문 밤송이들이 떨어져 있어 줍고 싶은 충동이 절로 든다. 그렇다고 밤을 맘대로 주우면 안 된다. 밤나무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해가 거듭될수록 하나씩 낯선 누군가의 묘지가 늘어난다. 자손들이 묘지 주위에 심어둔 조경용 나무들이 볼 때마다 키가 커져있다. 다소 가파른 고갯길을 걸어가는데 멀리서 음악소리가 들린다. 국내 가요일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귀 기울여 들어보니 동남아 음악인듯하다. 열심히 밤을 줍는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도 동남아사람이다. 처음 해보는 일이 아닌지 손놀림이 멀리서 봐도 익숙하다. 나무 사이에는 검은색 긴 망으로 된 포가 길게 펼쳐져 있다. 아마도 밤을 그곳에 주워 담거나 털어낸 후 포대에 담는 작업을 할 것이다.
이마에 땀이 살짝 배어 나올 무렵 아빠를 만났다. 아빠와 같은 집에서 살았던 기간은 24년. 아니 정확하게 23년 5개월 정도가 맞겠다. 대학 4년을 제하면 19년 정도이다. 아빠가 우리와 함께 살던 집을 뒤로하고 새로운 곳 아니 태어난 고향 산기슭에 자리 잡은 기간이 벌써 30여 년이 지났다. 기억도 아슴한 오월 그날, 혼자 외떨어지고 차가운 곳에 머물러야 하는 그 사실 자체가 너무 슬퍼서 울었다. 이별 그 자체가 서러워 울고 또 울었다. 동생들은 너무 어렸고 엄마는 너무 곱고 젊었다. 그리고 나는 겉만 어른이었을 뿐 철이 없는 직장인 초년생이었다. 함께 온 동생이 아빠 산소 앞에 사과, 배 그리고 샤인머스켓을 진설한다. 뜨거운 햇살을 등지고 내가 먼저 아빠에게 절을 하고 이어서 동생이 술을 올린다. 평소 술을 즐겨하지 않으셨던 아빠지만 오늘은 두 번 모두 잔 가득 술을 채운다. 마지막 순서는 엄마. 엄마는 술을 올리는 대신 평소대로 음복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아빠에게 동생이 안부를 전하자 엄마가 대뜸 너무 일찍 떠난 아빠에게 원망 섞인 말을 던진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와 동생은 기다렸다는 듯 아빠 편을 든다. 거기서도 처자식 잘 돌봐주신 덕분에 우리가 잘 살고 있잖아. 게다가 착한 자식들 두고 가셨잖아. 말을 하자마자 수긍한 듯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고 먼산을 바라보신다.
성실함과 책임감의 대명사였던 아빠는 내가 대학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던 해에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나셨다.
나와 띠동갑이었던 남동생은 초등학생이었고 엄마는 40대였다. 아빠의 따스한 그늘에서 양지만을 걷던 엄마의 고된 가시밭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외동딸로 큰 고생 없이 사셨던 엄마의 손가락은 해마다 굵어졌고 허리는 굽어갔다. 다행스러운 건 나를 비롯한 자식들이 큰 걱정 끼치는 일 없이 성실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갔고 엄마도 팔순이 될 무렵까지 지난함을 잘 견뎌내셨다. 손마디가 굽고 주름살은 늘어갔지만 자식들의 작은 성공에 기뻐하시던 엄마의 희생과 정성을 먹고 우리는 제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매년 어버이날이나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나 혼자 이 호사를 다 누려도 되는 거냐고 묻곤 하시는 엄마의 음복 한잔에는 얼마나 많은 회한과 한숨이 묻어있을까 싶어 오늘도 어김없이 마음이 눅눅해진다. 자식들의 효도도 받을 사이 없이 너무 빨리 떠나버린 아빠의 소풍길, 얼마나 발걸음이 무겁고 멀었을까.
아빠에게 인사를 드리기 전 첫날부터 변함없이 아빠 곁을 지키고 있는 둥근 향나무 작은 가지들을 전지가위로 익숙하게 다듬어준다. 이미 동생들이 한번 다녀간 뒤라 크게 손질할 것도 없다. 오늘따라 묘소 뒤로 보이는 하늘이 유난히 곱다. 당신이 태어난 동네가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서 봄이면 산새들의 지저귐과 농부들의 발걸음 소리를, 가을에는 벼가 익어가는 소리와 햇살 먹은 밤이 툭툭 떨어지는 소리를 음악처럼 여기며 하루하루를 채우시겠지. 행여나 자식들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노심초사하며 애간장을 태우고, 홀로 남편의 짐까지 지고 고단한 삶을 살았던 반쪽이 힘겨워할 때마다 함께 한숨 쉬며 애달파하셨으리라. 가끔 묘소에 해코지를 하는 멧돼지의 만행을 떠올리며 오늘도 아빠에게 올렸던 술은 봉분대신 주변 숲에 부어준 후 다음 소풍을 기약한다. 음악을 틀어놓고 밤을 줍는 낯선 그들의 발걸음 소리와 흥얼거림 덕분에 오늘은 조금 덜 지루하실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산을 내려온다.
학창 시절 소풍은 늘 즐겁고 신이 났었다. 끼가 넘치는 친구들은 마이클잭슨 춤을 추면서 즐거움을 주었고 매번 보물 찾기를 해도 제대로 찾아본 기억은 없지만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신바람이 나고 설레던 소풍.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뒤 나에게 소풍은 아빠에게 가는 길의 다른 의미가 되었다. 예전처럼 슬프기만 하거나 우울한 시간도 아니고 49세 젊고 따뜻하고 자상했던 아빠의 안부를 확인하고 염려와 기도 덕분에 잘 살고 있다고, 이번에 드디어 기다리던 승진을 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즐거운 소풍. 비록 평소 트레이드 마크였던 호탕한 웃음소리도 아저씨 유머도 들을 수 없지만 명주바람처럼 따사롭던 아빠의 손길과 미소를 다시 만나고 오는 행복한 시간이다. 그 시간 덕분에 사 남매는 다시 힘을 내어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는 용기와 힘을 얻는 것이다. 먼 훗날, 내가 세상 긴 소풍을 끝내고 떠났을 때, 내 가족들도 슬퍼하거나 우울해하지 않고 나를 만나러 오는 길이 학창 시절 소풍처럼 설레는 추억의 시간이 되길 바라며 파란 가을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