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18개월 방위를 마치고 복학해 보니, 자업자득이었지만 성적은 참담했다. 세 학기만 남겨둔 상황에서 취업은커녕 제 때 졸업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필수과목은 F가 대부분이라 재수강하면 평균 3.0은 넘길 수 있겠지만, 문제는 졸업학점을 이수하는 것이다. 계산해 보니, 남은 학기와 계절 학기를 모두 채워도 3학점이 부족했다. 그러나,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듯, 다행히 방법이 있었다. 한 학기 평균 4.0을 받으면 다음 학기에 3학점을 추가로 수강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한 번도 3.0을 넘겨본 적 없는 내가 4.0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4학년 1학기에 학점을 잘 주는 과목들로 수강신청을 했다. 시간에 쫓기듯 공부했고, 교수님과 동기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4.0에 턱걸이했다. 2학기에는 추가 학점을 이수해 부족함 없는 졸업학점을 채웠고, 곧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 시절 삶의 목표는 '열심히 일해 자아성취하고, 월급을 받아 경제적 독립을 하는 것'이었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야근과 밤을 새기도 하고, 주말과 공휴일에 출근하기도 하면서 회사가 삶을 지배할 즈음에 악몽은 시작되었다.
1.
회사에 입사하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HR에서 연락이 왔다.
"성적증명서와 졸업증명서가 없습니다. 입사 지원 서류에서 4학년 1학기까지 학점과 재학증명서는 확인했는데, 입사하면서 2개 서류를 추가로 제출하지 않았으니, 빠른 시일 안에 제출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내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내 방에서 성적 증명서와 졸업장을 찾아보라고 다그친다. 잠시 뒤, 아무리 찾아도 없다는 연락을 해온다. 어쩔 수 없이 근무 중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방 안의 책장과 서랍을 모조리 뒤지고 또 뒤져보지만 끝내 나오지 않는다. 다행히 앨범은 남아 있어, 적어도 졸업은 했다는 사실에 잠시 안도한다.
다시 택시를 타고 대학교로 향한다. 학생처로 가서 성적증명서와 졸업증명서를 신청한다. 기다리는 동안 마음은 초조해진다. 4학년 2학기 때 취업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 기억은 떠 오르는데, 수업 출석이나 과제 제출, 중간/기말고사에 대한 기억은 아무리 애써도 떠오르지 않는다.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서성이며 중얼 거린다.
'제발, 제발'
한참을 기다린 끝에 이름이 호명된다. 떨리는 눈으로 내려다본 종이 위에 내 이름 석자가 찍혀 있다. 그제야 짓누리던 숨이 빠져나간다. 다행이다.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다.
눈이 떠졌는데도 긴장이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졸업에 대한 사실은 희미해지고, 의심으로 변해간다. 찜찜하고 불안하다. 아직 새벽이라 출근하려면 시간이 남았기에, 꿈에서 했던 대로 성적표와 졸업장을 찾기 위해 온 방을 헤집고, 기어코 찾아낸다.
'회사를 놓칠 수 없다. 계속 다녀야 한다.'
2.
회사에 입사하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멋진 양복을 차려입은 HR 담당자들이 자리로 찾아와서 말한다.
"졸업 학점이 부족한 걸로 되어 있으니, 일단 휴직하시고, 학교로 돌아가셔서 학점을 이수한 후에 다시 회사로 복귀하십시오."
"네에에..... 알겠습니다."
회사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학교생활과 실력이 드러났다는 사실에 놀라, 어찌 된 영문인지 따져 묻지도 못한다.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뿐이다.
학교로 달려가자 교수님과 후배들이 어쩐 일이냐며 반갑게 맞아준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자초지종을 털어놓자, 걱정 말라며 4학년은 수업만 잘 들으면 된다고 안심시킨다.
중간고사 전날,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후배들이 저녁 사달라고 하면서 끌어낸다. 술잔이 오가고, 내일 시험을 서로 도와주겠다는 말이 오히려 다툼으로 번진다. 말다툼은 몸싸움으로 변하고, 식당은 순식간에 아스라장이 된다. 얼마 후에 경찰차가 도착하고, 모두 끌려가면서 외친다.
"제발, 내일 시험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눈은 떠져 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경찰서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지만, 꼼짝도 할 수 없다. 수년 동안 비슷한 꿈을 드문드문 꿀 때는 몰랐는데, 가위에 눌리고서야 그것이 반복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요새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상사를 대하는 것이 두렵고, 몸은 피곤에 찌들어 있지만, 올해도 목표 이상 실적을 달성했으니 연봉 인상과 인센티브는 걱정 없다.'
3.
회사가 전 직원에게 공지를 내려다.
'요새 유명인들의 허위학력 혹은 학력위조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음에 따라, 회사에서도 전 직원 대상으로 졸업증명서에 대한 검증을 할 예정입니다. 근속 년수가 10년 미만인 임직원은 HR에서 기존 자료로 확인 가능하오니, 근속 년수가 10년 이상 되신 분들만 다시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배들이 웅성웅성 거린다.
"학교가 지방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라는 거지?"
"에이, A처럼 해외에서 학교 나온 사람은?"
"고등학교만 졸업한 사람은 안 해도 되겠지?"
몇몇 선배들은 찔리는 데가 있는 것처럼,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귀찮았지만, 모처럼 모교에 방문하니 기분이 좋다. 학생처에 가서 증명서를 신청했더니, 전혀 예상치 않은 답변이다. 나는 졸업생이 아니라 제적생으로 분류되어서 제적증명서만 제공할 수 있다고 한다.
"졸업을 해서 회사를 10년째 다니고 있는데, 무슨 말이죠?"
"여기 이력을 보면 4학년 2학기에 3학점이 부족해서 졸업을 못하신 걸로 나옵니다."
한창 실랑이를 한 후에, 당시 과목의 교수님을 찾아 나선다. 그 당시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깐깐했던 학과 교수님이다. 졸업작품을 심사하면서 팩폭을 당한 적도 있다.
'4학년이 그것도 제대로 이해를 못 하면 어떻게 하나요?'.
교수실 앞에서 서 있는데 문이 너무 커서 열리지 않는다.
눈을 떴는데, 안쓰럽고 지겹다. 한동안 잠잠하길래 결혼도 했고, 입사한 지 10년이 넘어서 툴툴 털어 버린 줄 알았는데, 사회 이슈를 타고 악몽이 재현됐다.
'진급을 했지만, 도태될까, 불편한 사람이 될까 불안하다. 그리고 아내, 첫째, 둘째와 행복한데, 그만큼 빚도 늘었다.'
4.
조직 책임자와 면담을 한다. 좋은 기회가 생겼으니 학교로 가서 4학년 공부를 다시 마치고 복귀하라고 한다.
학교에서 다시 젊은 친구들과 공부하니까 너무 좋다. 이번에는 기초부터 차곡차곡 공부하니까 시간이 짧기만 하고 계속 공부하고 싶다. 그동안 벌어둔 돈도 있었기에, 앞으로 가장 유망한 분야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편입을 해 학문에 매달렸고, 이어 석사와 박사까지 가방끈을 계속 늘렸다.
모든 것을 졸업하고 회사에 복귀하기 위해 출근했는데, 휴직 기간이 너무 길어 규정상 재입사해야 한다고 한다. 그사이 동기들은 부장이나 팀장으로 승진해 연봉도 크게 올랐지만, 나는 휴직 당시의 직급과 연봉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움, 성장, 보상을 기대하면서 그동안 공부했던 유망한 분야로 부서를 이동했는데, 예전에 하던 업무와 별다르지 않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회사 안에서 점점 외톨이가 되어 간다.
눈이 떠지니 헛웃음이 나오고 허탈하다. 악몽은 마지막 변이를 하였고, 이제 자취를 감출 것이다.
'산전수전을 겪고, 경제적 독립을 하니 이제 회사가 쉽고 편안하다.'
악몽 덕택으로 이직 없이 한 회사만 다니다 보니, 동료들과 오랜 시간 희로애락을 함께 겪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그들의 삶의 목표 역시 열심히 일해서 자아성취하고, 월급을 받아 경제적 독립하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