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나무, 구미호
1.
외삼촌은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에 살았고 시멘트 제조 공장에서 일하셨다. 당시는 이천 대부분이 개발 전이라 집 근처에 맑고 넓은 개울가도 있었다. 삼촌네 집에 가려면, 이천터미널에서 완행 버스로 갈아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서 도착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엄마와 삼촌 간에 무슨 얘기가 있었는지 초등생인 삼 남매한테 외삼촌네로 가라고 하신다. 엄마는 맏이인 누나를 믿고 보내셨겠지만, 누나는 겨우 막내보다 4살, 형은 2살 많을 뿐이다. 게다가 막내는 늘 엄마 곁에 붙어 지내는 껌딱지여서, 엄마 말고는 누구를 믿고 의지해 본 적조차 없다.
엄마는 용두동 집 근처에 있던 동마장터미널(동서울터미널이 생기면서 이전)에서 이천행 버스를 기다리면서, 가방을 하나씩 둘러맨 삼 남매를 안쓰럽게 쳐다본다. 버스가 도착하자, 맏이에게 이천터미널에서 호법면으로 가는 완행버스로 꼭 갈아타라고 재차 당부하며, 동생들을 잘 챙기라고 한다. 맏이는 외삼촌네를 이미 몇 번 방문한 적이 있기에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둘째와 막둥이 손을 꼭 잡고 버스에 오른다. 이천터미널에 도착해서 맏이를 따라 완행 버스로 갈아타니, 해가 벌써 저물었다. 이미 버스 안은 사람으로 가득하다. 삼 남매가 올라서자 승객들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맞이한다.
"엄마는 어디 있니?"
"너네들끼리 어디 가는 것이여?"
맏이가 똘망똘망하게 대답한다.
"엄마는 집에서 일을 하고 계시고요, 우리들끼리 외삼촌네 가는 길이예요."
이내 할머니들, 아주머니들이 목소리를 높이더니 운전석 옆 평상자리(예전 완행버스 운전수 옆 또는 뒤에 있는 마루처럼 생긴 넓고 평평한 자리로 히터로 인해 따뜻함)가 한바탕 시끌벅적하다.
"보자기를 왜 평상에 올려놓고 있어요. 애들 앉아야 하니 바닥에 내려놔요."
"어이, 거기 애들 앉게 엉덩이 좀 집어넣어 봐요"
"아저씨, 다리 벌리지 말고 오므려봐요"
앉을자리가 없었던 넓은 평상 자리에 삼 남매가 앉을 공간이 생겼다. 아랫목처럼 엉덩이가 따뜻하니 엄마 생각이 난다.
맏이가 창 밖을 보면서 언제 내릴지를 가늠하고 있다. 막내가 보기에는 똑같은 나무들만 계속 보이고 있어서 다름을 찾을 수 없다. 맏이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면서, 내리자고 한다. 차문이 열리자 맏이의 지시대로 둘째, 맏이, 막내 순서로 내린다. 버스는 삼 남매만 내려주고 다음 역으로 달린다. 가로등 불빛이 주변을 환하게 비추며 보호막처럼 감싸주지만, 땅 위에 길게 늘어진 나무 그림자는 공포를 키운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뱀처럼 거미처럼 꿈틀거린다. 나무 그림자는 앞에서는 길을 막고 서서 삼 남매가 다가오기만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뒤에서는 바짝 따라붙는다. 맏이도 멈추는 순간 붙잡힐 것 같은 공포를 느꼈는지, 그림자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계속 걷는다.
엄마 등에 업히거나 품에 안겨 있었다면 그림자를 마구 밟고 지나갈 수 있었을 테지만, 나무 그림자를 절대 밟아서는 안된다. 막내는 맏이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쥔다. 버스 정거장에서 벗어날수록, 보호막은 옅어지고, 어느덧 주변에 어둠만이 남았다.
이제 나무와 그림자는 혼연일체가 되어 괴나무로 변하고, 눈을 부릅뜬 채 삼 남매를 노린다. 발걸음을 빨리하면 더 빠르게 달려오고, 눈을 감으면 더 많은 괴나무들이 나타나며, 공포를 잊으려 삼 남매가 합창을 하면, 괴나무는 섬뜩한 메아리로 되돌려준다. 막내 입에서는 '엄마'라는 말이 터져 나오고, 눈물이 쏟아진다. 맏이는 그들이 공포만 줄 뿐 해치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 듯, 처벅처벅 앞서 걸어간다. 막내는 눈물과 콧물로 앞이 흐릿하지만, 맏이 손을 놓지 않은 채 걸음은 점점 빨라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삼촌네가 그들을 맞아준다. 그러나 울음 섞인 목소리는 좀처럼 멈추지가 않는다. 외삼촌이 전화를 연결해 주고, 수화기 너머로 엄마 목소리가 들려온다.
"막둥아~, 우리 막내 기특하네, 이제 다 컸어"
"엄마? 나 이제 엄마하고 떨어지지 않을 거야? 알았지?"
"그래, 알았어, 막내는 항상 엄마하고 있자."
막내는 엄마의 대답을 듣고 나니 진정이 된다. 그래도 여전히 한 손은 맏이를 잡고 있다.
그날 이후로 엄마 외에도 누군가를 믿고 의지할 수 있다. 그날은 맏이였고, 다른 날은 형인 적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한밤중에 잠을 깼을 때 어둠 속에 혼자 있으면 무섭다. 다행히 항상 가족이 내 곁을 지켜준다. 엄마, 누나, 형, 그리고 이제 아내가 옆에 있다. 그리고 어쩌다 무지렁이 첫째나 둘째만 곁에 있더라도 안심이 된다.
2.
여름방학이 왔다. 맏이와 둘째는 개울가가 있는 외삼촌네로 가버렸고, 막내는 엄마와의 약속으로 집에 머무를 수 있었다. 엄마가 출근해서 퇴근하는 동안에는 동네 아이들과 놀거나 혼자 시간을 보내고, 배고프면 엄마가 챙겨 놓은 점심을 먹는다. 학기 중과 거의 비슷한 루틴이다. 그래도 제일 좋아하는 TV를 5시부터 누나, 형과 채널 다툼 없이 시청할 수 있고, 게다가 다양한 납량특집 프로그램을 볼 수 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엄마와 이불에 누워서 TV 시청을 한다. 이제 광고가 끝나면 '전설의 고향 - 납량특집 구미호'를 한다. 공포물을 좋아하지 않지만, 납량특집이고 엄마가 있으니까 이불을 뒤집어쓰고 보기로 한다.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구미호가 멋지게 앞 구르기를 세 번 해서 인간으로 변하는 것을 빨리 보고 싶다. 다행히 초반에는 무서울 것이 없다.
'산골 마을에, 여인과 아들이 함께 살았는데, 여인이 사람 행색을 하고 있는 구미호다. 여인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아이를 기르면서 사람의 간을 먹어야 하는 본능을 억제하며 살아왔는데, 어느 날부터 본능이 깨어나면서 간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보름달이 뜨는 밤에, 잠들어 있는 아들의 숨소리가 들릴 때마다 평범한 어머니의 칼을 쥔 손이 떨리면서, 어떻게 할지 망설인다.'
엄마가 구미호고, 아들의 간을 호시탐탐 노리는 장면에서 그동안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공포가 전신을 덮친다. 구미호가 무덤을 파헤치고, 앞 구르기로 변신하며 사람을 헤치는 장면은 간신히 곁눈질로 봤는데, 잠든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부터는 도저히 곁눈질로도 볼 수 없다. 몸은 곤두서고 바짝 말라버린다. 숨이 막힐 정도로 이불속으로 몸을 말아 넣고,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스스로를 웅크린다. 때로는 엄마를 힐끗 흘겨본다. 그렇게 공포를 끌어안은 채, 잠에 빠진다.
새벽 몇 시쯤 되었을까, 오줌이 마려워 눈이 떠진다. 옆 이불에 엄마가 없어, 이불 밖의 어둠을 조심스레 훑어보는데, 저만치에 누군가 앉아 있다. 어둠 속이지만, 엄마다. 피부를 타고 스며드는 공포에 압도되어 엄마를 부를 수가 없다. 옆모습의 실루엣을 보니, 입가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린다. 침은 아니다. 바닥에도 무엇인가 고여 있다.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식은땀이 흐른다. 목 끝에서 비명소리가 차오르지만, 엄마에게 들킬까 봐 소리를 지를 수도 없다. 눈치챌까 두려워, 이불속 더 깊은 곳으로 빠져 든다. 누나와 형만 있었어도 이만큼 무섭지는 않았을 것이다. 함께 맞서거나, 달아날 수 있었을 텐데, 나만 두고 가버린 그들이 간절히 그립다. 무서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내가 잠든 사이 사람을 잡아먹었어'
'누구를 잡아먹었지? 제일 가까운 옆집 친구 도영이네 가족 중 한 명일까?'
'나도 잡아먹을까?'
'여기서 어떻게 탈출하지?'
'누나와 형이 없는 틈에 구미호가 본색을 드러내는 거다'
'누나와 형한테 어떻게 알려주지?'
그러나 잠시 멈췄던 잠은 다시 밀려온다. 구미호와 공포도 잠을 이길 수 없다.
다음날 아침은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 시작되고, 막내는 저녁에 엄마를 기다린다.
그날 이후 막내는 하나둘 엄마의 품에서 독립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여름방학에는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누나와 형을 따라 이천으로 향했다.
그리고 ‘엄마가 구미호일지도 모른다’는 말은 누나와 형뿐만 아니라 엄마에게도 끝내 꺼내지 못했다. 창피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엄마가 정말로 구미호로 변해 삼 남매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혹은 누나와 형이 그 말을 믿고 엄마를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무서운 날들 덕분에 엄마뿐 아니라 누나, 형까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의 범위가 넓어졌고, 엄마 품을 떠나 더 큰 세상으로 스스로 발을 내딛을 만큼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