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와 애칭은 비례한다.
인기가 많아질수록 애칭은 늘어나고, 애칭이 늘어날수록 인기는 더 커진다. 원인과 결과가 뒤섞인 자기강화적 순환이다. 물론 인기가 한 철로 끝날 때도 있다. 그때 쏟아지던 애칭도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인기가 오래 지속되면, 애칭은 그 사람을 둘러싼 또 하나의 세계가 된다.
1. 연애
연인은 단 두 명뿐이지만, 연애는 인생에서 서로한테 가장 인기가 높은 시기이기에 시도 때도 없이 애칭을 남발한다. 휴대폰 연락처는 당시의 가장 핫한 애칭으로 저장되고, 애정의 농도가 깊어질수록 이름도 바뀐다. 연애 초창기에는 '버리'라고 불렸다. 어린 시절 생활통지표에 빠지지 않던 "주위가 산만하다"는 평을 어찌 알았는지 단박에 간파하였고, 나는 자연스럽게 '어리'로 화답했다. 둘을 합치면 '어리버리'가 된다. 각자의 폰에는 '어리', '버리'로 저장되어 있지만, 둘이 만나면 한 세트였다.
상황에 따라 애칭은 달라진다. 격식을 차릴 때는 오빠, 급하게 부르거나 무언가를 시킬 때는 이름의 한 글자만 부른다. 철수는 '철'이 되고, 영희는 '영' 또는 '희'가 된다. 가르침을 줄 때는 '철수야', 한심하다고 느낄 때는 '철철아', 파마를 하고 나타나면 '마이콜'로 부른다.
사랑이 무르익으면 애칭도 깊어진다. 사람들 앞에서는 조용하지만, 둘만 있으면 서로의 서로의 모습 하나하나에 장난스러운 애칭을 붙였다. ‘분기’와 ‘탱천’. 가장 눈에 띄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부분을 그렇게 불렀다. 그 이름 덕분에 부끄러움은 줄고 자신감은 생겼다. 애칭은 신체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지금 너를 자세히 보고 있어”라는 고백이었다.
‘어리’와 ‘버리’가 쌍이듯, ‘분기’와 ‘탱천’도 늘 함께였다. 한쪽만 예뻐하면 서운하니까가 아니라, 한 번의 이름으로는 사랑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른쪽과 왼쪽처럼 고정된 대상이 아니었다. 그날 먼저 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애칭의 주인이 되었고, 그날의 사랑을 다 불러야 비로소 충만했다.
연애는 그렇게 애칭의 전성기였다.
2. 첫째 아이
그러다가 첫째가 뱃속에서 태동하면서, 판도가 바뀐다. 이제 연인에서 시작된 부부의 인기는 사그라지고, 애칭은 멈추어 버린다. 버리(남편), (존경)마눌로 고정되고, 더 이상 변주가 없다. 대신 새로운 대스타가 등장한다.
태명은 '똘똘이'. 태어나기 전부터 똑똑하고 즐겁게 살라는 바람이 담겼다. 태어나자마자 애칭은 폭발한다. 가만히 있으면서 먹고 자고 놀고 싸도 최고의 대접을 받는 왕자님, 두 턱으로 카시트에 널브러져 자면 회장님, 땅을 파고 벌레를 만지면 호기심 천국, 하루 종일 깔깔깔깔 웃고 떠드는 행복이, 한글을 깨치면 천재.
그러나 둘째가 태어나면서 첫째의 애칭은 줄어든다. 이름 세 글자 중 두 글자나 한 글자만 떼어내어 부른다.
인기의 밀도만큼 애칭도 줄어든다.
3. 둘째 아이
둘째가 태어나면서 다시 변화와 쏠림이 생긴다. 부부의 대스타는 첫째에서 둘째로 갈아타고, 특히 아빠는 둘째의 광팬이 되고, 첫째는 처음엔 관심을 보이지만 곧 자기 세계로 돌아간다. 애초부터 인기에 갈망하던 것이 아니기에, 줄어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둘째는 온갖 애칭의 주인공이 된다. 자는 모습만 보면 자동 발사되는 공주님, 기분이 좋다고 엉덩이 춤을 추면 똥꼬, 동작이 절도 있고 발차기가 일품인 태권소녀,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을 보고는 내곡동 김태리, 입이 짧아 더 먹이고 싶을 때는 우리 딸, 집안 일로 부려 먹을 때는 딸내미. 둘째가 장기집권할 줄 알았지만, 셋째를 입양하면서 모든 애칭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둘째의 인기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이름 두자로 축약된다. 심지어 첫째와 둘째를 통칭하여 김남매라고 부른다.
인기의 법칙은 냉정하다.
4. 셋째 냥이
돌돌이를 입양하면서, 애칭의 블랙홀이 열린다. 모든 이름이 빨려 들어간다. 막내라 '막둥이', '애기', 뱃살은 늘어난 채 자동 급식기에서 앉아서 밥 달라고 기다리면 '뚱땡이', '꿀돼지',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어쩌다 야옹 하고 소리를 내면 '귀염둥이', 훈련을 따라 하지 못하면 '바보탱이', 하루 종일 잠만 자면 '게으름뱅이', '잠보', 바람처럼 날아서 장롱 위를 오르거나 내리면 '날쌘돌이', 밥을 맛있게 먹을 때는 '냠냠이', 손님이 와서 후다닥 소파나 침대 밑으로 숨으면 '쫄보'. 동작 하나, 소리 하나가 곧 애칭이 된다.
둘째는 인기의 나락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셋째한테 온갖 사랑스러운 표현과 애칭을 발산하는데, 목소리는 한 옥타브 높아진다. 그래서 '하이톤누나'가 된다. 첫째는 산모가 아이를 안듯이 돌돌이를 품 안에 안으며 행복해 하지만 돌돌이는 무지막지한 힘 때문에 거리를 둔다.
가족 대화의 80%, 사진의 90%는 돌돌이다. 카톡 프로필 사진도 돌돌이다. 구성원들은 이제 돌돌이아빠, 돌돌이엄마, 돌돌이형님, 돌돌이누나가 된다. 이름의 중심이 이동하면서 정체성도 따라 이동한다.
가족에서 애칭은 사랑의 방향을 보여준다. 누가 지금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이름이 말해준다.
5. 회사
회사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회사에서는 조직문화가 아무리 좋더라도 직급과 직책이 우선이고 별명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한번 붙으면 퇴사할 때까지 따라다니기도 한다. 가족의 애칭이 사랑에서 비롯된다면, 조직의 별명은 권력과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조직책임자가 별명을 부를 때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부름은 언제나 권력을 가진 쪽에서 시작된다. 불리는 사람이 불편함을 표현하면 그 별명은 사라진다. 합의가 전제되어야만 유지된다.
반면 인기 있는 조직은 별칭을 가진다. 그 이름은 정체성을 압축하고, 구성원은 그 안에서 불리기를 원한다.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소속과 자부심의 표시이다. 외부에서는 그저 선망의 대상이다.
가족에서 애칭은 사랑의 방향을 드러내고, 조직에서 별명은 권력의 방향을 드러낸다.
결국 이름은 관계의 온도를 말해준다.
가장 많이 불리는 사람이 그 순간의 중심이다.
애칭은 호칭이 아니라, 사랑의 지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