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

부록

by 에퀴티

입에서 주문이 생겼다.

마법을 작동시키는 동화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기억을 사라지게 하는 블랭크다.


1.

벌써 내년도 목표 수립 시즌이다. 올해는 특이하게 실무 단위별 워크숍을 통해 진행하라는 지침이다. 내키지 않은 퍼실리테이터를 맡게 되어 짜증이다. 바쁜 연말인데, 그냥 양식에 맞추어 뚝딱뚝딱 채워 넣어도 되는 것을 굳이 워크숍을 진행한다.

“가이드드린 대로 각자 내년도 계획에 대해서 돌아가면서 얘기해 주세요.”

그러자 똑똑한 한 명이 얘기한다.

“구성원 계획을 먼저 얘기하기 전에 회사, 본부, 센터, 담당, 실의 목표부터 Sync-up 하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모두들 웅성웅성 대면서 이구동성으로 지지한다. 나 또한 동조한다는 것을 알 것이나, 진행자로서 책임감을 갖고 워크숍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번에는 Top-down 방식이 아닌 Bottom-up 방식이니까, 우리 의견이 중요합니다.”

이제 다들 한 마디씩 한다.

“우리 계획을 우리끼리 정하면 뭐해요, 위의 목표를 알아야죠.”

“오늘 정하면 확정인 거예요?”

“도대체 오늘 워크숍을 왜 하는 거예요?”

“준비를 충분히 하고 진행했으면 해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쏟아낸다. 준비 못한 게 쪽팔린다. 그래도 진정을 시키고 한마디 한다.

“여러분 말씀 다 맞고, 죄송합니다. 그래도 모였으니 최대한 빨리 끝낼게요.”

속전속결로 형식적으로 채워야 할 내용을 빠르게 정리하고 마무리한다.


그날 퇴근길에 이끌리듯 무심히 걷고 있는데, 돌연 준비 부족의 민망함이 동료들의 쓴 말과 함께 귓가를 쏘아대자, 뜻밖의 말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에이 C8”

기억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주위를 휙 둘러본 후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발걸음 속도가 빨라진다.

주문이 생겼다. 아니, 감각 기관과 신경계 기관의 협업을 통해 창조적으로 주문을 만들었다. 신비하고 오묘하다.


2.

오늘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의사 결정을 받아야 한다. 울렁증이 있는 나에게는 힘든 날이다. 긴장한 목소리와 떨리는 손을 애써 고쳐 잡고 보고를 한다. 중간중간 더듬기도 하고, 말이 꼬이기도 했지만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간단한 질의응답이 이어진다. 최종 책임자가 오케이 해서 끝났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임원 한 명이 원론적인 질문을 한다.

“이거 왜 하는 거예요?”

의사결정에 필요한 부분을 설명했지만, 근본적인 물음에 당황하고 말문은 막히고 짜증도 났지만, 간신히 마무리한다.


그날 욕실에서 이를 닦는데 의사결정 상황이 떠오르자, 갑자기 입에서 주문이 튀어나온다.

“에이 C8 x같이”

기억의 잔상까지 순식간에 사라진다. 집에서 주문을 뱉어낸 것에 덜컥한다. 칫솔을 입에 쳐 넣으면서 거울에 반사된 닫힌 욕실 문을 확인한다. 입안 한가득 치약 거품을 뱉어 내고, 욕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 본다. 아내는 TV에 집중하고, 아이들 방문은 닫힌 것을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마음 그릇이 작아지면서, 일상 곳곳에서 스트레스가 불쑥불쑥 솟아나고, 그 기세는 나날이 사나워지고 있다. 강한 기세의 기억을 한방에 날려 보낼 수 있는 강한 주문이 필요하다. 스트레스 정도에 따라 주문이 바뀐다. 상황에 따라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생성형 AI 주문이다.


3.

오전에 임원이 급하게 보고를 요청해서, 우선순위를 조정한다. 구글 캘린더에서 금일 오후에 비어 있는 시간 30분을 확인하고 예약한다. 임원보고는 준비부터 부담되고 긴장되기에 재빠르게 정리하고 털어버리는 것을 선호한다. 물론 피드백으로 받을 상처를 감당해야 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어요. 상대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본인이 알고 있는 수준으로 설명하면 어떻게 해요?”

되레 짐작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요약을 했는데 착각을 했다.

“죄송합니다. 다시 자세하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는 듯이 허락을 하지 않는다.

“아니, 보고 자료 포함해서 다시 정리해서 오세요.”

반나절 동안 몰입했는데 허망하다. 상사가 굳어 버린 얼굴을 보고, 다독여 준다고 말을 꺼냈는데, 똥 씹는 표정으로 바뀐다.

“제가 표현이 거칠어서 그렇지, 절대 화난 것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자리로 돌아와서는 오늘 해야 할 다른 일들을 마무리한다. 오늘도 퇴근이 늦다.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는데, 오후 보고 상황이 떠오르자, 갑자기 입에서 주문이 튀어나온다.

“에이 C8 x같은 Dog새끼”

기억은 순삭 했는데, 방이라는 공간에 깜짝 놀란다. 다행히 아내가 거실 쪽 욕실에 있다.

자존감이 상한 만큼 주문은 거칠고 길어진다. 게다가 불쑥 뱉어내는 주문이 방까지 침범했다. 인기척이 없고 혼자만 있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문을 뱉어낸다. 나이가 들면서 주변에 대한 센시티브가 계속 약해지고 있는데, 인기척을 놓칠까 걱정이다.


노화가 탈모, 노안, 난청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감정이나 감정을 억제하는 전두엽에게도 발현되고 있다.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창피한 일이나 화나는 일이 자주 생길 뿐만 아니라 혼자 멍하고 있으면, 그날 좋지 않은 기억이 불쑥불쑥 나타난다. 그러면 본능적으로 머리를 흔들어서 기억을 지운다. 그런데, 기력을 다했는지 어느 순간 입에서 주문이 튀어나왔고, 기억은 사라진다.




철부지일 때 상대방이 아프건 말건 시원하게 배설한 욕이 몇십 년이 지나, 나를 향하고 불편한 기억을 다스리는 데 사용된다. 스트레스가 사라지지 않는 한 주문은 계속될 것이고,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처럼 아무한테도 주문을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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