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양을 받아서 이사 온 집에서 출근하려면, 아침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왕복 8차선의 기다란 육교를 건너야 한다. 아침에 육교를 오르는 것은 고욕이다. 실내 계단은 무난하게 오르는데, 육교 계단은 바람 때문인지 또는 출근하기 싫어서 그런지 한 발 내디딜 때마다 한 칸씩 더 무거워진다. 특히 반대편에서 버스가 보이면 전력을 다해 오르고 내려야 한다. 버스에 탑승을 하면 헉헉대면서 '잘했어'라고 칭찬하지만, 놓치기라도 하면 씩씩대면서 '어떤 놈이 신호등 대신에 육교를 만든 거야'라고 욕을 해댄다.
며칠 전부터 육교 위 건너편으로 넘어가서 내려갈 때 '찍찍'인지, '지지직'인지 전파 잡음 같은 소리가 난다. 차소리와 섞여 있고, 한시라도 빨리 버스를 타야 하기에 그냥 지나친다. 호기심을 발동시킬 나이도 아니고, 지각하기도 싫다. 무엇보다도 1시간 30분을 가야 하기에 정신상태는 비몽사몽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러던 어느 날, 양쪽 차선을 달리던 차들이 각각 저 멀리에 있는 빨간 신호등에 막혀 있고, 오늘따라 일찍 서두른 탓에 여유가 있어선지 호기심이 발동 거린다. 육교 위 건너편에서 귀를 쫑긋하며 가까이 간다.
"짹짹짹 짹! 짹짹짹 짹! 짹짹짹 짹! 짹짹짹 짹!"
육교 위까지 걸쳐진 나무에서 장마철 장대 빗소리처럼 많은 소리가 합쳐서 큰소리를 쏟아낸다. 살아오면서 처음 들어보는 자연의 합창소리다. 안경을 고쳐 쓰고 눈을 부릅떠서 소리를 전달하는 나뭇가지를 따라 쭉 가보니 어린 새들이 한가득 있는 보금자리가 보인다. 이 녀석들이 아침마다 앙증맞은 입을 벌려 하늘에 대고 합창을 한 것이다. 신기하고 오묘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서둘러 육교 위에서 나무에 가까이 가서는 시원한 소리를 듣는다. 이제는 차들이 아무리 많고 쌩쌩 달려도 한번 귓가를 울린 어린 새들의 합창 소리는 또렷하다. 이제 아침마다 육교를 한달음에 올라가서, 새들과 '짹짹짹 짹' 인사를 나누고, 상쾌하고 행복한 아침을 맞이한다.
민원이 늘어나서인지 육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철거되고, 신호등이 생겼다. 신호등에 가만히 서 있어도 소리를 찾을 수가 없다. 그들도 나처럼 어린 새소리를 들었으면 민원을 넣지 않았을 텐데, 아니 육교 철거 반대를 외쳤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신호등에 서서 나무속 보금자리가 보이면 어린 새소리가 귓가에서 흘러나온다.
2.
한창 자전거 속도감에 빠져서 운동을 겸해서 신나게 타고 다녔는데, 어느 순간 내릴 때 사타구니가 저리고 찌릿해져서 그만두고 대신 러닝을 시작했다. 대신에 운전을 자제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였고, 가까운 곳은 걸어 다녔다. 만보기로 하루의 걸음수를 체크하여, 걸음수가 적거나 속상한 일이 있거나 몸이 찌뿌둥하면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러닝을 했다.
단지와 연결되어 있는 양재천의 제1지류인 여의천이 단지와 연결되어 있어서 접근성도 좋고, 외지 인원도 없어서 더할 나위 없다. 특히 청계산 쪽 방향은 물소리와 벌레소리도 들을 수 있다. 러닝을 할 때는 걷기를 주로 하고, 스트레칭을 겸해서 경보도 한다. 팔을 앞뒤로 빠르게 흔들고, 골반을 좌우로 크게 회전하면 몸이 쭉쭉 펴진다. 달리기는 힘을 쏟아 내야 하기에 마음이 동할 때만 한다.
러닝을 하면서 습관적으로 땅을 보면서 걷거나 달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하늘을 향해 오르던 시절은 저물고 땅의 품으로 서서히 내려앉고 스트레스와 걱정은 쌓여가면서 육체와 마음의 무게가 시선을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다. 그래도 좋은 점은 지치지 않고 계속 앞으로 갈 수 있다. 어쩔 때는 길을 개척해 가고 있다는 착시 때문에 성취감도 느낀다. 걷고 달리다 앞에 누군가 보이면 추월해 버리고, 자전거 벨 소리에 놀라 쳐다보면 벌써 지나간 후다.
그러다가 정면을 보면서 달린다. 길 뿐만 아니라 주변 풍경도 눈에 들어오고 하늘도 본다. 오늘 회의 시간의 토론을 빙자한 다툼이 떠오르고, 첫째 음악 실기 시험 결과가 어떨지도 걱정이다. 그러다가 가슴속까지 들이켜지는 상쾌한 공기, 머리를 청량하게 해주는 물소리, 나를 반겨주는 풍경들이 달리게 한다. 다시 와이프의 관심을 갈망하는 잔소리와 둘째의 짜증 섞인 대꾸가 생각나지만 고개를 들고 전방을 주시하며 달린다. 멀리 내가 좋아하는 청계방향 구간에 보인다. 조금 전에 돼지갈비를 맛깔나게 먹은 첫째 얼굴, 사랑스러운 몸짓과 하이톤 소리로 서로 숨바꼭질하고 있는 둘째와 셋째, 그리고 그걸 쳐다보는 행복한 얼굴의 와이프가 떠오른다.
요새는 하늘을 보면서도 달린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면 시야가 넓어지고, 가슴은 열리고, 마음은 가볍고 상쾌해진다. 대학 이후로 주로 출퇴근용으로만 사용되면서 녹이 슬어 버린 팔, 다리가 위아래로 발동을 걸고, 리듬에 맞추어 '칙칙폭폭' 심장 박동을 점점 높이더니, 거세지는 호흡으로 하늘로 뻗어간다. 낮에는 파란 하늘과 구름한테, 밤에는 달과 별들을 향해서 달린다. 러닝의 매력을 알아버리면서 수렵민의 본능이 되살아났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해방감에 빠지더라도, 찰나에 하늘과 앞을 동시에 보아야 하고, 너무 빠르게 달려서는 안 된다.
3.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순백으로 덮이고, 나뭇가지와 잎의 모양에 따라 다양한 눈꽃을 만들어 낸다. 자연스레 밖으로 뛰쳐나가서는 눈을 굴려서 눈사람을 만든다. 옆의 아이들과 경쟁력을 위해 아파트 한켠에 있는 재활용장에서 팻트병을 가져와서 팔을 만들고 떨어진 소나무 잎들로 가발을 씌우고, 나뭇가지들로 눈, 코, 잎을 만들어 주면 특출 난다. 잎은 스마일 이어야 한다. 아직 기운이 남았으면 편을 갈라서 눈을 뭉쳐서 던지고 도망치고 막는다.
다음날 새벽 6시 20분. 어젯밤까지 눈발이 날려서 출근을 일찍 나선다. 두터운 다운 패딩에 모자를 둘러쓰고, 귀마개까지 한다. 이제 눈을 보면 한걸음 한걸음 조심조심 걸어간다. 발자국을 따라서 청소되지 않은 눈은 피한다.
경비원 분들이 모두 출동해서 아파트 단지 내 눈들을 통행로를 중심으로 정리를 되고 있다. 많은 눈을 치우기 위해서 적어도 새벽 5시 이전부터 시작을 했을 것이다. 아파트 공터에 있는 특출 난 눈사람, 부서진 눈사람, 반쪽짜리 눈사람, 도처에 깔린 눈 뭉치들은 햇볕의 도움을 받으려고 그대로 둔다. 이제 눈썰매를 탔던 경사로만 남았는데, 두텁게 얼어버려서 애를 먹고 있다. 녹아내리기만 기다리기에는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유일한 통행길이다.
오후에 눈이 녹으면 먼지, 흙, 아스팔트, 과장봉지가 드러나면서 땅은 거무튀튀해질 것이다. 그래도 멀리 산은 하얗고 나무의 눈꽃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