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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백송자 Aug 09. 2023

난蘭, 꽃 피우다

자음과 모음을 소연스럽게 짜 맞추며 한 편의 글에 쉼표를 찍는다

 볼품없이 자란 줄기 사이로 무엇이 쑥 삐져나온다. 촉이려니 했던 것이 가녀린 꽃대다. 난석의 살갗을 찢고 나온 꽃대는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몸을 일으키며 꽃망울을 연다. 


 척박한 화분에서도 식물은 생을 이어간다. 그저 수돗물을 일주일에 한 번씩 흠뻑 받는 게 영양분의 전부다. 태양의 어루만짐도 없이 가끔 바람이 전하는 떨림을 안을 뿐이다. 한동안은 베란다 식물에 정성을 기울였다. 삭막한 아파트의 한 공간에 자연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바람과 햇볕을 안으며 벌과 나비의 사랑스러움을 받아야 할 식물의 본성을 깡그리 무시했다. 모름지기 식물은 땅을 디디고 흙냄새를 맡고 자라야 하는데….


 시들어 가는 화초가 생기면 이들을 곧장 시골집으로 보냈다. 우물가 근처에 놔두면 어느새 싱싱해진다. 잎은 푸르고 줄기는 단단해지고 꽃은 연신 꽃망울을 터트리며 환하게 타오른다. 햇빛과 바람을 종일 안고 가끔은 비를 흠뻑 맞으며 식물의 본질을 찾는 듯하다. 이웃끼리 자연의 소리를 함께 들으며 서로서로 소통하는 것 같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은밀한 언어가 있다는 상상을 해본다.


 한해를 건너는 12월, 날씨는 영하로 내려가며 추위가 온 세상을 강타했다. 꽃대 올라온 난을 거실장에 올려놓고 아침저녁으로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  본다. 서양란의 일종이다. 친구가 분양해 준 걸로 얼추 십 년이 넘는다. 화분에 남은 촉의 흔적을 봐도 긴 세월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다. 힘겹게 꽃을 피우고 나면 기존의 촉은 시들어 말라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사이에 새 촉이 다시 작게 나오고 매가리 없이 자라곤 하였다. 한 귀퉁이에 내박쳐 두고 관심을 거두어도 봄날이 오면 끈질기게 생명의 끈을 붙잡고 살아남은 난이었다. 


 꽃은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난은 꽃을 피우기 위한 어떤 간절함을 담뿍 품었을까. 그간 여러 번 꽃을 피워 내도 찾아오는 벌과 나비가 없었다. 이번만은 벌과 나비가 찾아오기를 열망하며 온 힘을 또 쏟아부었을 것이다. 어쩌면 매번 이런 희망으로 꽃을 피우며 기다렸으리라. 누가 봐주지 않아도 혼자서 피어나는 꽃, 존재의 몸부림이겠다.


 나는 어느 곳에서 존재의 실체를 느끼고 있는가. 스스로 묻는다면 글쓰기에서 찾고 싶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는 하는데 하루가 가고 내일이 오는 길목에서 매번 백지상태일 때가 수두룩하다. 머리로만 글을 지은 것이다. 첫 삽조차 떼지 못한 글짓기는 숱한 날이 지나고서야 어렵사리 기초를 세우기도 한다. 기초 위에 여러 공정을 올리다 보면 어쭙잖은 글이 만들어질 때도 가끔은 있다. 이것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스스로 증명한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오롯이 내 존재에 대한 가치다. 


 먹고 쉬고 잠을 자는 물리적인 일상에 읽고 쓰고 또 쓰는 일이 습관처럼 굳어지면 좋겠다. 매번 열매는커녕 향기조차 없어도 한 편의 글을 마무리하느라 몸부림을 치는 나를 칭찬한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인 양 멈추지 않을 뚝심도 키워본다. 


 누런 잎을 달고도 꽃대를 밀어 올리는 난처럼 나도 삶을 성찰하면서 굵고 큰 꽃망울을 잉태하고 싶다. 날아들지 않는 벌과 나비를 기다리며 꽃을 피우는 난의 열정을 나는 글 속에 쏟아 넣는다. 그 열정의 끝이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하여도 멈추지 않고 반복한다.


 난은 무언無言으로 꽃을 피우기 위하여 애쓰지만, 나는 언어로 글 꽃을 피우려 한다. 저마다 꽃을 피운다는 건 내면의 열정이다. 비록 씨앗 하나 낳지 못하더라도 혼신의 힘을 기울이며 반복한다. 반복하다 보면 하나 정도는 생기겠지, 하는 기대를 해 보지만 현실은 늘 녹록하지 않았다. 피었다 하여도 또 곧 지고 마는 것, 꽃 지는 소리에 온몸이 전율하여도 멈추지 않는 게 또 생물의 특성이 아닌가.


  꽃은 생기를 잃어간다. 누렇게 변색하여 금방이라도 꼬꾸라질 듯하다. 열매를 맺고 씨앗을 퍼트리는 영광은 없더라도 죽는 그 순간까지 벌과 나비를 애타게 기다리며 꽃으로서의 미美를 움켜쥐고 싶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주위를 밝게 비추는 것, 난은 한 송이 꽃으로서 여러 날 내 마음을 평화롭게 했다. 볼품없는 내 글 꽃도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이것은 내가 계속 글을 쓰는 이유다. 


 이제 난은 꽃을 피우기 위해 소진했던 에너지를 다시 찾으며 몸체를 부풀리며 또 힘을 쥐어짜리라. 생의 처절한 투쟁이다. 꽃대를 댕강 가위로 잘라내는 내 손이 떨린다. 여느 때처럼 긴 겨울을 잘 버텨내길 바라는 마음을 보탠다.


 따스한 봄날이 오면 시골집에 난을 데려다 놓을 생각이다. 마당에서 맑은 자연과 더불어 성장하는 장면도 보게 되리라. 뿌리와 줄기와 잎이 단단해지면 난은 어떤 꽃을 피울까. 그때는 나비와 벌이 드나들고 자연의 향기가 햇볕과 바람도 불러 세우겠지. 


 가슴 속에 쟁여둔 글감을 꺼내어 자음과 모음을 소연스럽게 짜 맞추며 한 편의 글에 쉼표를 찍는다. 빼곡한 행간 사이로 풀무를 돌려 여백의 미를 되살려 본다. 글 꽃은커녕 꽃망울도 맺지 못하고 히마리 없이 축 처진 내 글에 지나는 바람과 햇살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에 기죽지도 않고 나는 또다시 첫 문장을 머릿속에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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