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2007)

by 마법거북이


종교란 마치 연기자의 리액션과 같아서, 어떤 이들은 액션이 없는 자를 두고 홀로 리액션을 하듯 종교를 대한다. 그리고 이들을 위해 대리자가 있다. 대리자들을 통해 응답을 듣고자 하는 이들은 저마다 어떤 반응을 하게 된다.

밀양의 원작, 벌레 이야기에서 영화의 반전은 결말에 해당한다. 홀로 끙끙 않던 신애가 토해내는 절규는 작품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영화에서 원작의 결말은 러닝타임이 아직도 50분이나 남은 지점에 나온다. 그렇다고 원작에 없는 사건을 새롭게 각색하지도 않았다. 1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영화는 그저 인물의 리액션을 담아낸다. 영화의 후반 1시간은 오롯이 영화의 기점이 되는 사건에 대한 인물의 반응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면 이 영화에서 남은 1시간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가, 당연히 그럴 순 없다. 영화란 무엇이든 보여주기 마련이고, 신애의 리액션을 지켜봐야 하는 괴로움으로 가득한 이 영화는 한 편으로 순박한 남자의 순애보가 있어서 신애의 등 뒤에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종찬이 있다.

비극 속에 놓인 신애에게 주위의 대리자들은 자꾸만 종교를 권유한다. 그녀가 처음부터 대리자들의 말을 믿었던 건 아니었으나 교회에서 가슴 속 응어리를 토해내는 경험을 하고 난 뒤 그녀는 종교를 믿고자 한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종교에 대한 마음이 믿음이 아닌 노력임을 모르지 않았기에 유괴범을 용서함으로써 이 노력을 믿음으로 바꾸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애는 유괴범을 만난 이후 노력조차 내려놓게 된다.

믿으려는 노력,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함으로써 이러한 노력을 완성 시키고자 했던 믿음은 바로 그 죄를 지은 자, 신애의 아들을 유괴하고 기어코 살해한 자가, 자신 역시 신을 만나 용서받았다는 말로 단숨에 무너진다.

노력을 내려놓은 뒤에 신애는 뒤늦게 종교를 통해 가리고자 했던 아픔을 앓기 시작한다, 하늘을 향해 실존적인 말을 쏘아붙이기도 하고, 어린 시절, 하느님 아버지가 아닌 실제 아버지에게 당한 일을 방언 터지듯 중얼대며 용서를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가 없을 것임을 다짐하기도 하면서.

신애는 영화의 첫 시작에서 종찬에게 자신이 던졌던 질문에 대해 도리어 본인이 답을 내놓는다, 비밀의 햇볕.

햇볕에 덧붙인 비밀,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어디에나 내려서는 햇살을 비밀스럽게 마주하는 방법.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의 그림자다. 신애의 말마따나 하필이면 오늘, 질리는 우연으로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유괴범의 딸을 마주한 신애는 견디다 못해 미용실을 박차고 나왔다가 다시 우연히 옷가게 주인을 만나 함께 웃고 집으로 돌아와 홀로 머리를 깎는다. 신애의 등에는 햇살이 내려서고, 카메라는 옆으로 돌아 햇살이 아닌, 햇살에 의해 생겨난 그림자를 비춘다.

버닝이 나오기 전까지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햇살과 관련된 장면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었다. '오아시스'는 벽에 비친 그림자로 시작해 내리쬐는 햇살로 인해 드러난, 부유하는 한공주 방 안의 먼지로 끝나고, '박하사탕'은 긴 터널 끝의 빛을 향해 거꾸로 달려 나가, 햇살을 맞는 영호의 얼굴로 끝을 맺는다.

어쩐지 이들 모두에게 비밀의 햇볕이란 말은 그럴듯하게 어울린다.

3년 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창동 감독의 작품전 주제는 '트라우마의 시네마'였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극복 과정이 존재하질 않는다. 단지 '박하사탕'의 마지막 장면처럼, 영화 속에서 영호의 인생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마주하게 되는 장면들을 통해 어떤 열쇠, 한 인물의 인생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 작은 열쇠를 햇살을 비추듯 조심스럽게 보여줄 뿐이다.

트라우마를 햇빛에 내놓고 바싹 말리듯 극한의 상황에 몰린 인물을 지켜봐 놓고 함부로 어떤 희망을 제시하기는 감독으로서도 당연히 어려웠을 테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겹다는 말을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두고 하는 이들이 많다.

다만 밀양은 감독의 이전 작품과 다르게 처음으로 약간의 긍정적인 결말이나마 덧붙였다고 할 수 있다. 홀로 끙끙 앓던 소설의 신애가 자기 속에 있던 응어리를 토해낸 뒤 택한 결정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 관계. 너무 상투적이고 교훈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을 것만 같은 이런 소박한 긍정이 미약하나마 원작과 달라질 수 있었던 힘은 밀양이라는 배경, 종찬이라는 배경으로부터 나온다.

신애를 좋아하는 종찬은 한편으론 밀양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신애의 배경이 된다. 신애와 신애의 동생은 영화의 처음과 끝에서 종찬에게 밀양이 어떤 곳인지 묻는다. 구체적으로 답하건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간단히 답하건 종찬의 답은 비슷하다. 종찬의 말 그대로 그곳에는 욕망, 시기, 소박함, 진솔함이 한 몸에 들어 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밀양에 내려간 신애는 나름의 호의로 옷가게 주인에게 조언을 건네나, 주인은 이를 불쾌하게 받아들인다. 그 주인을 영화의 끝 무렵에 다시 마주쳤을 때, 신애가 그동안 밀양에서 쌓아 온 관계 속에 주인의 말실수를 함께 웃음으로 넘긴다.

하지만 정작 이런 소박함이 종찬과는 통하지 못한다. 그래도 종찬은 그저 묵묵히 그녀가 교회에 나가면 따라 교회에 나가고, 그녀가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는 자리에도 따라 나간다. 그 역시 어떤 액션을 하진 않는다, 단지 뒤에서 지켜볼 뿐.

종교를 믿지 않는 종찬은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느냐 요구하는 신애와 달리 신애가 더는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된 이후에도 단지 습관이 됐다는 이유로 교회에 나간다. 어차피 믿음이란 사적인 것이어서, 증명이 필요하지 않으며 증명이 가능한 영역도 아니다. 그런데도 신애는 본인의 믿음은 믿으면서 종찬의 믿음은 믿지 않는다. 물론 신애의 예측이 틀린 것은 아니다, 종찬의 믿음은 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신애를 향한 것이므로. 다만 대상은 다를지언정 종찬의 이와 같은 행동은 누구보다 종교적이다. 마침 종찬을 대하는 신애의 한결같은 태도도 꼭 신과 같다. 그녀는 종찬이 무엇을 하든 관심이 없고, 종찬의 기다림을 뻔히 알면서도 응답할 생각이 없다.

신애에게 답이 주어지지 않듯이 종찬에게도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종찬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그는 한결같이 믿음을 지킨다.

모두가 종교를 믿지만 진실로 종교적인 사람은 종교가 없는 김종찬뿐이라는 역설, 그저 지켜볼 뿐인 그의 행위가, 종교인이 아니기에 그의 지켜보는 리액션은 액션이 된다.

응답 없는 이에게 응답을 바라는 이는 결국 스스로 답을 찾아 헤매기 마련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초월해 모두에게 적용되는 그런 답은 없다. 답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을 위해 그 사람이 스스로 마련해 낸 답일 뿐이다.

감독이 신애의 마지막 행동을 이것이 답이라고 결론 내린다면 영화는 모두 헝클어지고 말 것이나, 감독은 종찬과 같이 응시에서 끝내기 위해 카메라를 돌린다. 신애의 내부에서 일어난 일은 신애만이 알아야 한다. 그저 지켜보는 일이 스스로 신을 찾아 나서는 비밀스러운 과정이 되기 위해서. 그러므로 지켜보는 것이 전부인 영화가 액션을 발생시키기 위해서.

종교란 마치 액션과 리액션이 뒤섞여 있는 연기와 같아서, 응답 없는 이에게 응답을 바라는 거짓 속에 스스로 찾아 나서는 비밀스러운 과정이 있다. 이 과정 속에, 고통을 부유하는 삶에 소리 없는 햇살이 내려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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